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64화 (64/608)

제64화

“키킥! 키이익!”

“케엑!”

“히이익!”

상단주는 몹시 겁먹은 얼굴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뒷걸음질하려고 했다. 그러나 등 뒤에 있는 나무에 가로막혀 더 이상 물러나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급히 한 손을 들어 물을 모았다. 이것을 날카로운 창처럼 만들어 던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을 하자니 망설이는 기분도 들었다. 단순히 비를 내리거나 파도를 일으키는 정도는 해 봤지만 무언가를 향해 공격을 시도해 본 건(이프리트와 다툴 때를 제외하고)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만 한편으론 이사나가 염려스러웠다.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정령계를 떠나 인간의 형상을 투영하고 있을 땐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이 모습일 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내 본연의 치유술과 자연적인 부분들뿐, 비자연적인 행위(예를 들면 지금처럼 물로 공격한다든가)엔 일부라도 계약자의 마나가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통의 평범한 정령왕의 소환자라면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정도로 무리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그들은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마나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이사나의 경우엔 보유한 마나의 한계량이 워낙 적은 편이라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게 뻔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크게 입을 벌린 고블린 하나가 상단주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키에엑!”

“으아악!”

‘이런……!’

조금만 늦어도 위험할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나는 곧장 물을 변환하여 고블린들에게 내던졌다.

쏴아아! 촤아악!

콰지직!

물의 창이 보인 효과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물줄기가 강하게 내리꽂히자 그 자리에 있던 고블린들이 한순간에 갈가리 찢겨 나간 것이다.

탁한 비명과 함께 물풍선처럼 터진 살점들 사이에서 진녹색의 채액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갈리다 만 뼈들과 시커먼 살덩이들이 젖은 바닥을 흉하게 뒤덮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말해 두 눈 멀쩡히 뜨고 바라볼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우욱! 괜히 봤다…….’

내가 일으킨 일이긴 하지만 그 결과를 확인하는 건 생각보다 더 참담했다. 나는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꾹 삼키며 상단주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시체의 널린 파편들 사이에서 넋을 잃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충격이 컸는지 부릅뜬 눈동자 색이 매우 혼탁했다.

“유렌 님, 이런 곳에 계셨네요. 괜찮으세요?”

“아, 아? 이, 이게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호, 혹시…… 당신이 한 겁니까?”

“예? 뭘요?”

“바, 방금 보지 못한 겁니까? 거대한 물의 폭풍이 일어나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저 근처를 지나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뿐이거든요. 혹시 꿈을 꾸신 건 아닌가요?”

모르겠다는 듯이 담담히 대답하자 상단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조차도 목격한 일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꿈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푸른 물줄기가…….”

“하지만 주변에 물이 흘렀던 흔적은 없는걸요. 보세요, 흙이 말라 있잖아요?”

내 말대로 주위 어느 곳에도 젖은 땅은 없었다. 물론 내가 미리 습기를 전부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상단주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 흙을 더듬거렸다.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된……?”

“저기, 괜찮으신가요? 아무래도 잠시 환각을 보신 것 같은데요.”

“환각…… 그게 전부 환각이었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아아, 그럽시다. 내가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군요. 어서 돌아가서 쉬어야겠습니다.”

상단주는 황망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닥엔 여전히 몬스터들의 살점이 널려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짐작컨대 몬스터에게 포위당했던 순간조차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음, 속이려니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정체를 들킬 수는 없으니까.’

나는 휘청거리는 상단주를 부축하며 무사히 숲을 빠져나왔다. 행렬의 근처에 이르자 상단 측 사람들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 내게 상단주의 부재를 알렸던 남자와, 하얀 의복을 입은 또 다른 남자였다.

“유렌 님!”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황한 두 사람을 향해 나는 간단히 거짓으로 상황을 꾸며 설명했다. 피로가 누적되어 환각을 보았고, 그 때문에 넘어져 다친 것 같다고 말이다. 다행히 그들은 내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듯이 보였다. 그중 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가 상단주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일단 유렌 님을 마차로 모시고 가지요. 제가 치료해 보겠습니다.”

“오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님?’

그제야 나는 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행렬과 함께한다는 신관이었던 모양이다. 멀찍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주로 거하는 위치가 달랐던지라 얼굴까지 익힐 기회는 없었다.

가까이서 본 신관은 선량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어깨까지 기른 검은 머리카락을 정갈히 늘어트린 채, 단정하게 드리운 얼굴이 생각보다 앳됐다. 준수한 눈썹 아래 하늘을 옮겨 담은 듯이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체향이 풍겼다. 그 때문인지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엘.”

“아, 매튜.”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서 트로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힐끔 앞쪽을 보더니 그것만으로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혼자서 다녀온 거야? 나를 부르지 그랬어.”

“아하하, 왠지 그냥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아! 그러고 보니 매튜, 나 조금 전에 되게 신기한 경험을 했어.”

“신기한 경험?”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거든. 그랬더니 갑자기 눈앞에 근처의 광경들이 훤히 펼쳐지는 거 있지? 마치 다른 사람의 시선에 침범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해서 떠드는 나와는 달리 듣고 있는 트로웰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간단하게 내가 겪은 현상을 축약했다.

“물의 기억을 읽은 거구나.”

“응? 그게 뭔데?”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트로웰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물의 기억. 간단히 말해서 하급 정령들의 눈을 빌리는 거야. 그들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보는 거지. 정령들은 왕에게서 파생한 몸의 일부와 같으니까.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네가 공유하는 게 가능하거든.”

“헤에, 그럼 마음만 먹으면 세상 어느 지역이든 한자리에서 다 둘러볼 수 있다는 거네?”

“정령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대부분 가능하지.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단지 범위가 너무 넓으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할 거야.”

“그렇구나.”

“그보다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물의 기억을 읽게 되다니 대단한데? 정령의 육체에 거의 적응했다는 증거야. 이제 걱정할 일이 없겠어.”

트로웰의 칭찬에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이미 나 스스로도 성장한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입을 통해 확인을 받으니 와 닿는 기분이 전혀 달랐다. 마치 응원을 받은 느낌이랄까.

지금까지 정령왕이란 자리가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면 지금부터는 내 한몫을 당당히 해내 갈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마저 차올랐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단순한 성격인 게 분명했다.

* * *

안 좋은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트로웰과 함께 일행에게 돌아간 나를 맞이한 건 혼비백산한 표정의 이릴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붙잡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엘! 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얼마나 찾았다고!”

“아, 이 근처에 잠시…… 무슨 일이에요, 이릴?”

“네 동생이 쓰러졌어!”

“……!”

역시 내가 마나를 쓴 게 문제였나?

조금 전까지 충만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식었다. 나는 이릴을 따라 급히 달려갔다. 아직도 식사 중인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머물고 있던 장소에 이르자 헤롤을 비롯한 낯익은 사람들이 근심에 찬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난 그들 사이에서 후드를 움켜쥐고 웅크려 있는 이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

“엘, 어서 와라.”

나를 본 휴센이 겨우 숨을 돌렸다는 듯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라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모양이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해도 건드리지를 못하게 해서 난감해하던 중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살펴볼게요.”

나는 허둥지둥 대답하며 곧장 이사나 옆으로 다가가 바짝 붙었다. 웅크린 몸에서 끊어질 듯 미약한 숨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 나야. 엘이야. 괜찮아?”

“엘…….”

다행히 이사나의 의식은 온전한 상태인 것 같았다. 희미하게 대답한 입술이 겨우 안심한 듯 긴 숨을 몰아쉬었다. 바짝 눌린 후드 사이로 살짝 드러난 두 뺨이 몹시 창백했다.

그의 상태는 이미 짐작했던 그대로 급격한 마나 소모로 인한 탈진이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몸에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악물었다.

“미안해, 라이. 내가 너무 부주의해서 이런…….”

내 말에 이사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그 역시 자신의 상태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정령 수련을 거치는 내내 지독한 탈진을 경험해 봤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더 큰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차가워진 이사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점점 더 급해졌다. 신의 인장을 받기 전까진 치료술을 쓰지 말라는 충고가 생각났지만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바로…….”

“실례합니다. 이곳에 위급 환자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등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보았던 바로 그 신관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뜻밖의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바로 트로웰이었다.

‘트로웰…….’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마도 그가 신관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내가 고맙고 민망한 기분에 머뭇거리는 동안 신관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이사나를 살폈다. 진료라고는 해도 후드를 벗지 않으려는 그의 의사를 존중하여 간단히 손목의 맥을 짚어 보는 수준이었다.

“심한 체력 소모로 인한 탈진 상태로 보이는군요. 이동하면서 피로가 쌓인 것이 문제가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외상에 비해선 효과가 높진 않지만 성력을 받으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치료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온걸요.”

진단을 마친 신관은 곧 이사나의 몸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이사나의 몸을 은은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엔 내가 치료술을 쓰는 방식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달랐지만 일반인의 시선에선 잘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 됐습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걷어 내자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사나의 몸을 점검해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약하던 생기가 많이 되살아나 있었다. 안정을 되찾아서일까. 이사나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그의 모습이 호전된 것을 알아챈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샴페인 용병단을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다른 용병들 또한 하나같이 치료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모두 감탄한 얼굴로 신관을 바라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관님. 바쁘실 텐데 이런 일에까지 직접 나서 주시다니…….”

휴센의 인사에 신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기쁩니다. 여러분도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괜찮습니다.”

“헛, 그럼 이런 것도 될까요? 얼마 전에 전투를 하다 살짝 긁혔는데…….”

“물론입니다. 봐 드리겠습니다.”

“헛! 그렇다면 저도!”

“앗! 나도, 나도!”

사람들은 순식간에 신관 앞에 몰려들었다. 깊게 파인 부상부터 시작해서 벌레에 물린 사소한 상처까지, 증상도 가지각색이었다.

그사이 나는 이사나를 편안한 장소로 데려가 눕혔다. 이왕 잠든 김에 출발 시간이 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푹 재워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정했던 시각이 되어도 행렬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의 그 일로 인해 상단주의 정신적 피로가 매우 극심한 것이 원인이었다. 덕분에 여유 시간이 늘어나자 눈치만 살피던 용병들마저 신관에게 다가왔고, 그 앞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굉장해요! 그렇게 지독하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잘되었군요. 앞으로도 신의 평안이 함께하시길.”

“감사합니다, 신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이 귀찮을 만도 하련만, 천성이 온화한 사람인 건지 신관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정성껏 용병들을 치료했다. 나는 계속 눈으로 그의 모습을 쫓았다. 분명 낯선 얼굴임에도 여전히 친근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 그를 살피게 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트로웰이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저 사람이 신경 쓰여?”

“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낯익은 기분이 들어서.”

“엘뤼엔의 사제야.”

“응?”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자 트로웰이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신관을 가리켰다.

“저 신관 말이야. 엘뤼엔의 사제라고. 소매에 가려져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팔목에 엘뤼엔의 문장이 찍혀 있어.”

“헉! 저, 정말?”

나는 황급히 신관의 팔을 바라보았다. 과연 손목 부근에 탈색한 듯 유난히 하얀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평행을 이룬 천칭을 휘감은 새하얀 뱀의 형상. 일전 엘뤼엔의 신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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