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우와! 라이, 굉장해! 정말 소환에 성공했어! 운디네야!”
“헉! 저, 정말 운디네인 거야?”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이사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순간 그의 시간은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정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얼굴에 점차 환희와 격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내 가슴이 다 설렐 정도로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극심한 마나의 소모로 탈진한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운디네가 원피스의 양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네 왔다.
―운디네, 고귀하신 물의 왕을 뵙습니다.
“에, 엘! 운디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정령의 작은 행동을 인지한 이사나가 부산스럽게 반응했다. 마치 갓난아기의 옹알이를 지켜보는 초보 아빠라도 된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내게 인사한 거야. 아마 정령의 언어라 너한테는 들리지 않는 것 같네.”
“헤에, 엘은 정령의 언어를 알아듣는구나.”
“당연하지. 나도 정령이잖아.”
“하하, 그렇지.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좀 신기하다고 할까. 이렇게 보면 엘 너는 그냥 인간인 것처럼 보이거든.”
“그렇지? 나도 가끔 신기하긴 해.”
“응?”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자, 운디네. 이사나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신기하다 못해 가끔은 스스로 정령인 걸 잊기도 한다는 걸 내 입으로 어찌 말할쏘냐. 다행히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이사나는 손쉽게 운디네에게 신경을 뺏겼다. 얼어붙은 채 붉어진 얼굴에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이번에도 운디네는 물빛 원피스의 양끝을 잡고 정중하게 몸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의 계약자시여. 당신을 보필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에, 엘?”
“처음 뵙겠다고 하네. 널 도울 수 있게 되어 기쁘대.”
“앗! 나,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해, 운디네. 나는 라이…… 아니, 이사나라고 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딱 여느 때의 그 또래 소년 같았다. 그 천진한 느낌이 운디네에게도 느껴졌는지 내내 무표정하던 작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을 본 이사나가 더 흥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와! 우와! 이것 봐, 엘! 운디네가 웃었어! 날 보고 웃었다고!”
“그래, 그래. 운디네가 널 마음에 들어 하나 보다.”
“지, 진짜? 와아― 어떡하지, 엘? 정말 너무 기뻐.”
이사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줍게 말했다. 어째 정령왕인 나를 소환했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 시큐엘을 소환할 땐 운디네의 몇 배에 해당하는 마나가 필요하거든. 앞으로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아, 그렇지. 시큐엘은 어떻게 생겼어? 나이아스와 운디네처럼 귀여워?”
시큐엘이 귀엽던가? 이사나의 질문에 나는 무심코 속으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내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녀석은 빈말로도 귀엽다고 할 만한 용모는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와 풍성하게 휘날리는 갈기, 사납게 치켜뜬 눈동자, 입 안에 드리운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도 귀엽다고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때문에 나는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귀엽다기보다는 멋있게 생겼어. 늑대의 모습이거든. 음성도 남자 같고, 꽤 과묵한 편이야.”
“헤에, 그렇구나. 늑대라니, 정말 기대된다. 빨리 만나 보고 싶어. 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 엘.”
“그래. 아마 지금 같은 속도면 분명 금방 소환에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으음, 글쎄. 그냥 유지만 하는 거면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운디네가 능력을 사용하면 어떨지…….”
“흠, 그래? 그럼 테스트를 한번 해 볼까?”
“응? 테스트?”
“운디네, 마나를 사용해 봐.”
충직한 운디네는 곧장 내 지시에 따랐다. 그러자 훅, 하고 터져 나오는 심호흡과 함께 이사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곧 운디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형의 기운이 흐트러졌다. 이사나가 집중력을 잃음으로써 저절로 결속이 끊어진 것이다. 아마 그의 눈에는 운디네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사나는 고통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엘…… 너무해.”
“아하하, 미안, 미안. 아직 능력을 사용하는 건 무리구나. 으음, 일단 조금씩 마나량을 넓혀 가 보자. 운디네의 소환 숫자를 늘릴 수 있게 되면 마나를 펑펑 써도 두 시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거야.”
“그, 그럴까?”
“당연하지. 그런 의미에서 목표를 정해 볼까? 이번 주 안으로 운디네 소환 숫자를 셋까지 늘려 보는 거야. 어때? 괜찮은 계획이지?”
“헉? 이번 주까지?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아, 연습하면 돼.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어딜 가도 정령사라고 내세울 수 있다고.”
“…….”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벅찬 수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는지 이사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사가 된 이상 아무리 고단해도 결국 언젠가는 이사나가 걸어 나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 * *
이사나의 근심과는 다르게 그의 정령술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했다. 처음 세웠던 목표량은 한 주가 되기도 전에 달성할 수 있었고, 그다음 주가 되자 다섯을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사나는 자신이 이룬 성과에 도리어 놀란 듯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정령왕의 계약자였으니까.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하기 힘든 것은 그만한 친화력과 마나량이 뒷받침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정순한 마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갖가지 불순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마나를 흡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구조였다. 설령 흡수한다 해도 원활히 순환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가로막히고 만다. 대부분의 정령사들이 상위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고비를 겪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사나의 몸은 내가 소환되었을 때(비록 그것이 변수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그 통로가 한 번 뚫린 상태다. 즉, 빈 통에 물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되는 식이었으니 누구보다 성장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다니, 아무래도 나는 천재가 됐나 봐.’
아무튼 이대로라면 이사나가 시큐엘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건 말 그대로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다 좋게 풀린 것만은 아니다. 막상 전력에 도움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추고 나자 이사나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더 주저하게 됐다. 정령사라는 존재 자체가 아직 이곳에서는 그다지 흔한 것은 아닌 만큼,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괜히 사람들 이목을 사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이사나는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더불어 밤마다 몰래 하던 수련도 중단했다. 시큐엘 정도의 정령을 소환하려면 상당한 마나량이 필요한데, 그쯤 되면 아무리 조심해도 주위에서 이상을 느낄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렇다 보니 최근 그의 정령술은 더 이상 나아지는 일 없이 계속 정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후로 이사나는 전투에 직접 나서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유심히 지켜봐 두는 듯했다. 웬만큼 숙련된 검사들은 다른 사람의 전투를 관망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실력 향상에 도움을 받는다고 들었다. 이사나도 아마 그런 부분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라이, 지치진 않아?”
“응, 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인걸? 솔직히 온몸이 근질근질해.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멋지게 싸워 볼 수 있겠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별처럼 눈을 빛내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이유 모를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언지 알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갑갑할 뿐이었다.
‘으음, 차라리 이쯤에서 적당한 틈을 내어 용병들과 헤어지는 게 나을지도.’
트로웰과 떨어지는 건 썩 내키진 않지만 어차피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니 별로 서운할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의 유희를 방해하고 있어 미안한 상황이니만큼 심각하게 고민해 볼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라 해도 배려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미 넘치도록 민폐를 끼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 때문에 그가 활동에 지장을 받는 건 싫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
“어? 트…… 매튜, 언제 왔어?”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나는 당황해서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마치 그린 듯이 수려한 모습의 트로웰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삐딱해진 표정을 보니 조금 전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다. 잠시간 못 말린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런 식으로 여기고 있었다니 좀 서운하네. 엘, 네 눈엔 내가 방해받는 것처럼 보였어?”
“그, 그치만 사실이 그렇잖아. 내가 거추장스럽게 구는 건 맞으니까. 전투 시에도 날 보호하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어차피 본힘을 다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야.”
“으응?”
“특별히 너 때문에 힘을 아끼는 게 아니라고.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간 곧바로 정체가 탄로 나고 말걸? 네가 없었어도 적당히 시늉만 내고 말았을 거야.”
“아, 그런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에 나는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로 인해서 내가 불편한 건 전혀 없어. 아마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설령 그렇다 해도 이곳의 일이 너보다 우선되지는 않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정말이야. 오히려 네가 이대로 떠나는 게 더 많이 서운할 것 같은데?”
“…….”
“네 기분은 알아, 엘. 이 여정이 네 입장에선 여러 가지로 번거로울 거라는 것도. 하지만 지금 네겐 많은 정보가 필요해. 게다가 첫 유희잖아. 계약자와 단둘이서만 생활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만이라도 날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이런 말이 실례인 건 알지만,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 싶어.”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트로웰이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왜?”
“매튜…… 왠지 형 같아.”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 조금 크게 뜨인 황금색 눈동자가 옆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건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한참 먼저 태어났는걸.”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말에 왠지 코끝이 조금 찡했다. 그가 단순한 의미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단 네 명뿐인 정령왕, 나의 새 가족이 된 형제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유대감을 다시 재확인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