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나와 이사나가 샴페인 용병단과 동행하게 된 지도 어느새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처음 출발했을 때만 해도 여름을 갓 벗어났던 계절은 이제 제법 쌀쌀해져 완연한 가을 날씨로 바뀐 지 오래였다. 지천의 나무들마다 색색이 물든 잎사귀로 무성했고, 어디를 가든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카펫처럼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도착지인 클모어까지는 두 달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이제 겨우 반을 온 셈이다. 아마도 카웰 공작을 만나게 될 즈음엔 눈이 내리게 될지도 몰랐다.
‘눈이라…….’
높은 건물과 공해가 없는 이곳의 풍경은 어디를 가든 절경이 가득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한가롭게 상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근처의 수풀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 시커먼 것이 휙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쿠웨에에에에!”
“우왁!”
“엘!”
가장 먼저 보인 건 흉측하게 벌려진 커다란 입이었다. 상대가 내뱉는 끔찍한 소음에 경직된 찰나, 곧 그 형상은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다가온 트로웰이 내게 덤벼드는 몬스터를 단숨에 걷어차 낸 것이다. 굼뜨기만 한 나를 보호하느라 최근 그의 반사 신경은 나날이 예민해져 가고 있었다.
“괜찮아?”
“으응, 고마워, 트…… 매튜.”
“수풀 쪽엔 가까이 가지 마. 숨어 있는 몬스터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조언한 다음 바닥에서 경련하고 있는 몬스터에게 걸어가 숨을 완전히 끊었다. 나는 놀란 호흡을 고를 겨를도 없이 축 늘어지는 형체를 바라보았다. 벌써 며칠째 겪는 일이건만 여전히 이런 상황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작고 볼품없는 몸뚱이를 지닌 몬스터는 언뜻 보기엔 작은 난쟁이로 착각할 만큼 사람과 모습이 흡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은 맹수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 심지어 몸 안에서 흘러나온 피도 붉은색이 아니라 초록색을 띠었다.
그 몬스터의 이름이 고블린이라는 것도 얼마 전에야 겨우 알게 된 사실이다. 몬스터 계보 중에서도 비교적 하급에 속한다고 하는 이들 종족은 근래 들어 상단 일행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쪽은 다 해결됐어요, 헤롤?”
트로웰의 질문에 다른 쪽에서 열심히 도끼질하던 헤롤이 여유 있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긴 처리 끝! 이제 슬슬 다른 놈들을 도와주러 가 볼까?”
그 말처럼 그가 서 있는 곳 주변엔 목과 몸체가 따로 분리된 고블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샴페인 용병단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가장 먼저 일을 끝내는 건 샴페인 용병단이었다. 덕분에 항상 시간이 남아돌아 다른 사람들의 전투를 도우러 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쉐리의 의견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에이잇! 난 이제 싫어! 지쳤다고! 그냥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
“왜 또 성질이냐, 쉐리.”
“지금 내가 성질나지 않게 생겼어?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아무리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해도 그렇지, 숨 돌릴 틈은 줘야 할 것 아냐!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러다 지쳐 쓰러지겠다고!”
“뭐? 쓰러질 것 같다고? 쉐리, 이왕 쓰러질 거면 내 품 안에…….”
근처에 있던 마이티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왔다. 물론 그 시도가 그녀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닥쳐! 저리 가, 변태야! 너도 이 녀석들과 같이 땅바닥에 뒹굴고 싶어?”
“변태라니! 나는 그저 널 위해서……!”
“거기서 한마디만 더 헛소리해 봐! 다시는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게 잘라 버릴 테니까!”
“크흑, 너무해…….”
물론 이번에도 쉐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에 널려 있는 몬스터의 시체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옷을 부산스럽게 닦아 냈다. 전투 중에 고블린들의 피가 튄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이미 갖가지 오물로 더럽혀진 옷이 새삼스럽게 깨끗해질 리는 없었다.
사실 쉐리가 투정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 번째 검문소를 지난 후부터 단 하루도 제대로 쉬는 날이 없었으니까. 울창한 숲에 들어선 이래, 본격적으로 습격을 시작한 몬스터 떼들이 원인이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용병들 모두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다행히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몬스터가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처음엔 신이 나서 날뛰던 헤롤 일행도 이젠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처리한 몬스터만 헤아려도 마을 하나는 족히 채우고도 남을 숫자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오죽하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트로웰조차 노골적으로 짜증 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무기를 점검하는 이릴 역시 지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진짜 독한 놈들이네. 아무리 지능이 떨어져도 학습 능력이 이렇게 없나? 한두 번 깨졌으면 좀 물러날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고 이렇게 악을 쓰고 덤벼드는 거람?”
“이 길목이 원래 좀 악명이 높다고 하더라. 영주가 토벌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지역으로 유명하던데.”
“윽, 그게 정말이야? 그런데 왜 이쪽으로 들어온 거야?”
“당연히 그만큼 거리가 단축되니까 그렇지, 뭐겠어. 상인들은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잖아. 내가 알기로는 여기 상단주가 구두쇠로 유명한 인간이거든. 그런 작자가 용병을 이렇게 많이 고용했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래도 두 번째 검문을 통과하고 나면 나아진다니까 조금만 참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헤롤의 말에 그녀는 한결 기분이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중에 쓸데없는 말다툼을 자주 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땐 그들은 호흡이 매우 잘 맞는 콤비였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행렬은 천천히 주변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수레를 보수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그 짧은 시간이 잠시나마 용병들이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휴센은 단장답게 단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다친 사람은 없나?”
“우린 괜찮아. 저쪽은 부상자가 꽤 많이 나온 것 같지만.”
“그래? 야단났군. 여기서 인원이 더 줄어드는 건 곤란한데.”
“신관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렇다면 좋겠지만…….”
나는 굳어 있는 휴센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신음하며 치료를 받고 있는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의 습격이 연이어지면서 부상자의 수 또한 매일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개중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급조한 수레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칵테일 용병단도 그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코웰, 너 다쳤냐?”
“다치긴 누가 다쳐. 그냥 스친 거야.”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무슨 헛소리야? 어디 봐, 얼른 치료하자.”
“됐어. 고작 이 정도에 무슨……!”
“맞고 치료할래, 그냥 할래.”
옥신각신 대화를 주고받는 용병들은 칵테일 용병단의 코엘과 빌트였다. 첫 대면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두 사람은 지금도 걸핏하면 수시로 다퉜다. 언제 주먹다짐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험악한 공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졌지만 그러면서도 내내 붙어 다니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상당히 사이좋은 것 같기도 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코웰은 계속 이쪽을 힐끗거렸다. 다른 용병들도 자주 시선을 주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대부분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라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명백한 질시의 감정이었다. 그들 쪽에선 하루에도 몇 사람씩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이쪽은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상당히 속이 쓰렸을 것이다. 그만큼 샴페인 용병단과 다른 용병들의 전력 차는 압도적이었다.
코웰은 곧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동패와 은패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다니 뭐 이런 사기 같은 일이 다 있어? 어이, 빌트. 심지어 당신은 은패인데도 저 정도는 아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칵테일 용병단은 단장인 빌트를 제외하곤 전부 동패를 소유한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패를 가진 휴센이라면 모를까, 설마 이릴이나 헤롤들에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는지 코웰의 얼굴은 실망감이 가득했다. 그러자 빌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그건 네가 아직 이쪽 바닥을 잘 몰라서 그래. 같은 은패를 가진 용병이라 해도 경력에 따라 실력은 천차만별이라고. 난 아직 은패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뭐야, 그럼? 저 녀석들은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데, 빌트보다 더 먼저 은패를 받았단 소리야?”
“당연하지. 내가 알기론 저들 대부분이 십 대 중후반에 은패를 땄어. 용병 길드에서 샴페인 용병단이라고 하면 모르는 자들이 없다고. 단원 전부가 은패 이상을 지닌 용병단이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컥! 십 대 중후반? 완전 괴물들이잖아.”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감탄을 담은 탄성이 울렸다. 다시금 우리 쪽을 바라보는 코웰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결투를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두 번 겪어 보는 일이 아닌지 일행들 중에선 그의 행동을 의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자 헤롤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갓 용병이 된 놈들은 저래서 싫다니까. 선배에 대한 예우를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원.”
“너도 예전엔 저랬거든? 용병계에 막 입문한 주제에 당시 은패였던 휴센에게 덤벼서 엄청 깨졌던 애송이가 어디의 누구였더라?”
“윽, 그 일은 왜 또 들먹여?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예전 일이라고 그게 없던 일이 되니? 그러니까 함부로 사람을 흉보지 말란 말이야. 누구에게나 어리숙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이릴의 따끔한 일침에 헤롤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아무리 시비를 거는 사이라 해도 옳은 말을 들었을 땐 결코 꼬투리를 잡지 않는다. 허물없는 사이에도 상대방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게 지켜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부상자가 늘어날 때마다 걱정을 하는 건 휴센만이 아니다. 나 역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기분이 조마조마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자니 양심이 쑤셔 왔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넘쳐나는 부상자를 보다 못해 내가 직접 치료를 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능력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는 트로웰의 조언에 따라 그저 얌전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인장을 받지도 않았는데 신관 행세를 하면 이단 심판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워낙 특별한 능력들로 넘치는 탓인지 그에 따른 몇 가지 규제들이 있었다. 즉, 신의 힘을 받았다면 그 신을 증명하는 인장이, 정령을 부린다면 가장 명확한 소환의 증거가,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 계파의 흔적이 분명히 드러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힘을 사용한다고 판명하여 엄벌에 처했다. 마치 명품 가방의 진품과 가품을 구분하듯이 타고난 능력에도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지구보다 더 구분이 명확한 세상이었다.
더구나 이 행렬엔 진짜 신관도 동행하고 있다. 아직 제대로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의심을 사기 쉬운 환경인 만큼 각별히 주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라곤 용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죄송해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서.”
“하하, 무슨 소리야. 애초에 너희들은 전력으로 기대하고 데려온 것도 아닌걸. 다치지 않고 그저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거야.”
일행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정령왕씩이나 되면서 보호만 받고 있어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면 한구석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는 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당장에라도 전투에 가담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사나는 제법 수준 있는 검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의 친위기사들만큼은 못하더라도 황통을 이을 후계자답게 어릴 때부터 꾸준히 육체를 단련해 온 덕분이었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에게도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황실의 검법이 너무 정직하게 몸에 배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알아볼 우려가 있다는 말에 이사나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내세우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라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인지 최근 그는 지나칠 정도로 정령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침 나 역시 그의 성장을 도울 생각이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매일 틈틈이 수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로 내가 일방적으로 물의 기운을 퍼부어 주면(?) 이사나가 그것을 받아들인 후 다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성과는 금방 나타났다.
“엘, 이것 봐! 내가 나이아스들을 더 많이 부를 수 있게 됐어.”
“엇? 그게 정말이야? 대단한데, 라이?”
나는 이사나가 보란 듯이 소환해 낸 정령들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의 말마따나 이전에는 간신히 두 마리에 그치던 물의 하급 정령들의 수가 이젠 다섯 마리로 불어 있었다.
소환된 나이아스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이사나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었는지 이사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힘들진 않아?”
“응. 처음엔 조금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 기분만으로는 당장 운디네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한번 소환해 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어? 그래도 될까?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명에 성공한 것뿐인데…….”
자기가 말을 꺼내 놓고도 자신이 없었는지 이사나는 난색을 표했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넌 네 자신을 좀 더 믿을 필요가 있어. 네 마나량은 이미 상당히 늘었어. 걱정하지 말고 해 봐. 혹시 문제가 생기면 내가 바로 도와줄 테니까.”
“으응…….”
이사나는 그제야 결심을 굳힌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안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을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파동의 기운이 손끝에 모이자 이사나의 입에서 잔뜩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디네 소환!”
그 순간 공중에서 청량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눈을 감고 있는 이사나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내게는 그 기운의 정체가 분명하게 보였다. 뱀의 몸통처럼 새파란 물줄기가 이사나의 몸을 천천히 휘감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선을 이룬 채 하늘로 솟구치던 물줄기는 이윽고 허공 위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완성된 것은 투명한 물빛 원피스를 드리운 귀여운 외모의 소녀였다. 물의 중급 정령 운디네가 소환된 것이다. 이 뜻밖의 성과에 이사나는 그대로 눈을 부릅떴고, 나는 너무 기뻐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