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그날 아침에 있었던 사건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목격자가 워낙 많았던 데다, 평소 보드카 용병단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던 자들이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특히 단장인 숀이 거세당했다는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그날 보드카 용병단은 바로 계약을 해지하고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으론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단을 탈퇴한 자들도 있다고 하니, 아마도 곧 해체의 길을 걷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복수하러 오면 어떡해요? 게다가 길드에도 신고할 것 같던데.”
마지막 도망치듯 사라지던 그들의 얼굴엔 증오와 원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그 점에 대해 크게 염려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길드에서도 휴센은 함부로 못 건드려. 길드 내에서도 몇 안 되는 귀하신 금패 용병이잖아. 더구나 이번 일은 명백히 놈들 쪽에서 잘못했고 말이야.”
“맞아.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걸? 보드카 용병단은 예전부터 길드 내에서도 평판이 나빴거든. 질이 나빠도 성과는 잘 올리니까 어쩔 수 없이 놔두는 골칫거리였어.”
“그렇군요.”
위기(?)를 함께 겪고 일어난 탓인지 휴센들의 분위기는 모처럼 화기애애했다. 쉐리가 그동안의 일들을 반성하고 모두에게 사과한 덕분에 더 그랬다.
정오가 될 무렵, 나와 일행들은 장비를 재정비하고 출발지에 집결했다. 그곳엔 이미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낸 다른 용병단들도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보드카 용병단이 빠지는 바람에 사람 수가 모자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인원이 오히려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세어 본 인원은 확실히 불어난 상태였다. 나는 그들 중에 섞여 있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마이티가 싱글벙글하며 중얼거렸다.
“호오― 능력도 좋으셔. 그새 새 용병단과 계약했나 보지?”
“아, 그런 거예요?”
“하긴 이 상단 호위는 워낙 보수가 좋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사람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출발 전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들은 우리가 다가가자 하나둘씩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들 중에서 단장으로 보이는, 삼십 대 후반의 날렵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얼른 다가오며 휴센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클모어까지 동행하게 된 칵테일 용병단의 단장 빌트라고 합니다. 조금 전의 구경은 덕분에 잘했습니다. 정말 굉장한 실력의 검술이더군요. 남자로선 조금 섬뜩했지만 말입니다, 하하!”
아마도 그는 휴센이 이른 아침에 선보였던 ‘거세 기술’(이라고 불러도 될진 모르겠지만)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모양이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에는 휴센도 불쾌하지 않았는지, 그는 드물게 미소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샴페인 용병단의 휴센입니다.”
“금패 용병 휴센 씨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금패의 용병은 홀로 다니는 일이 많은데 특이하게 단을 운영하고 있다 들어서 개인적으로 한 번은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샴페인 용병단은 단원 전체가 기량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외모마저 출중하시군요. 이분들을 뵙다가 저희 단원들을 보니 전부 오징어처럼 보입니다, 허허허!”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자신의 단원들을 아무렇지 않게 오징어 취급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곧바로 이어졌다. 누군가 투박한 도끼를 그의 목 언저리에 들이민 것이다.
“방금 그 말 다시 해 봐, 영감탱이!”
그러나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닌 듯 그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이 담담했다. 오히려 그의 목에 도끼를 가져다 댄, 정체 모를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만 더욱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쯧쯧. 넌 언제쯤에나 그 험한 말투를 고칠 생각이냐? 이제 겨우 서른네 살인 나에게 영감탱이라니, 그딴 말은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생긴 건 충분히 영감 같거든? 머리도 하얗게 셌으면서!”
“난 원래 이 머리색이야! 아 참, 인사가 늦었군요. 이 녀석은 우리 용병단의 코웰이라는 놈입니다. 보다시피 얼굴도 오징어고 성격도 이 모양이지만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민망한 소개와는 달리 코웰이란 남자는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나이는 갓 성년을 넘겼을까? 비교적 마른 체구에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척 봐도 상당히 무게가 많이 나가 보이는 도끼를 한 손에 들고 휘두르는 것을 보니 근력이 약할 것 같진 않았다. 푸른 눈동자에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말투에서 묻어나는 성격은 상당히 거칠어 보였다.
“이익! 내 성격이 어디가 어떻다는 거야! 정말 죽고 잡나, 이 망할 영감탱이가!”
“하하하! 보다시피 이 녀석이 좀 팔팔합니다만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닙니다.”
“…….”
거친 말투에 불쾌해할 만도 한데 빌트는 능숙하게 웃으며 그를 무시했다. 다른 단원들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서로 이런 식으로 지내온 것이 한두 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바라보는 이릴에게 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왜 용병단 이름은 다 술 이름이에요?”
“응? 술 이름?”
“아니, 그렇잖아요. 샴페인 용병단도 그렇고, 보드카도 그렇고……. 처음엔 우연히 겹친 건가 했는데 이번엔 또 칵테일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해서요. 용병단 이름은 술 이름으로 정해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나요?”
“어머, 엘! 그건 오해야.”
“아, 역시 그런가. 하긴 그렇겠죠. 그런 규칙이 있을 리가…….”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용병단 이름은 술 이름이 아니라고.”
“네? 하지만 샴페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른 일행들도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어라? 설마 이곳에는 샴페인이라는 술이 없는 건가?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술 이름이 아니라고 했던 정확한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옆에 있던 쉐리가 냉큼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은으로 된 테두리에 주황색 빛깔의 보석이 박힌 단순한 모양의 반지였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아연해서 물었다.
“설마…… 이 보석, 샴페인?”
“맞아. 예쁘지? 우리 용병단의 이름은 이 보석의 이름에서 따온 거야. 그러니까 절대 술 이름이 아니란 거지.”
“……그, 그렇군요.”
술이 아니라 보석 이름이었구나.
아마 다들 술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지만 나는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세상엔 동명이인만큼이나 동음이의어도 많다는 진리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 * *
콰앙!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내리쳐진 책상이 크게 흔들렸다. 그 탓에 장식되어 있던 고급 도자기가 바닥에 굴러 깨졌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일반 서민들이 평생을 일해도 살 수 없는 고가의 향유였다. 하지만 이미 분노하고 있는 남자의 눈에 그런 것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수치인가! 내가 그 새파란 꼬맹이 술수에 놀아나 급급해하는 꼴이라니!”
쏟아진 향유의 냄새가 방 안에 온통 진동했다. 그것에 남자는 더욱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이걸 치워!”
그러자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종이 옆에 있던 시동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얼른 치우지 않고 뭐 하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시동 중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이 빠르게 다가가 깨어진 유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던 소년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름다웠지만,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그중에서도 특히 미모가 뛰어났다.
평소라면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에 흥미를 보였겠지만, 현재 남자는 너무 화가 나 있는 상태라 그쪽엔 시선도 두지 않고 있었다. 남자, 유카르테 란느 스왈트 대공은 쓰고 있던 황금 관을 거칠게 벗어 던지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대체가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믿다니! 신탁이 사주된 것이다? 게다가 황제가 미치지 않았다고? 그 증거로 삼 일에 한 번씩 비가 내려? 하,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오는군!”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제 비도 그쳤으니 더 이상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구요.”
“비가 그친 시점이 더 문제니까 그렇지! 물의 매매가 중단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그쳐? 이건 마치 누군가가 의도하고 벌인 것 같지 않은가!”
“단순한 우연일 뿐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비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문제인 거잖아!”
콰앙!
다시 한 번 그의 앞에 놓인 책상이 흔들렸다. 이번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옆에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들은 절로 몸을 움츠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대공은 한참이나 씹어 발기듯 이를 갈았다.
“그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도적놈들은? 행방은 좀 알아냈나?”
“여전히 귀신같은 놈들입니다. 어찌나 재빠른지 꼬리조차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원 병력을 더 늘려라. 어차피 그놈들은 황제의 친위기사들이겠지. 그중에 황제가 있을 것이 뻔하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놈들을 잡아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이사나. 그 빌어먹을 조카가 정말로 움직인 것인가.
마지막 탑에서의 유폐가 확정된 상황이었지만, 애초부터 대공은 이사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적당한 틈을 보아 죽여 버릴 예정이었는데, 설마 그의 친위기사들이 빈틈을 노리고 그를 도피시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황궁을 점거하던 바로 그날 그냥 죽였어야 했다. 법규 따위를 신경 쓰느라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렇기에 사라진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더 화가 났다. 대체 무슨 수로 비가 내릴 것을 미리 알아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대공 쪽의 패배였다. 그는 다시금 입술을 악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살심을 점점 더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는 무심코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법의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았다. 평온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훗,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그분이 내 편을 들어 주셨다. 이미 이 제국은 나의 것이야. 유카르테 란느 스왈트 황제! 그것이 나의 이름이란 말이다!”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아직 버젓한 황제 이사나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섭정왕인 그를 향해 ‘황제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반역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르는 이는 진심을 다해 그렇게 불렀고, 듣는 이 또한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당연했다. 누구도 아닌 바로 ‘그분’이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언젠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향해 ‘폐하’라고 부를 날이 오게 될 터였다. 유카르테 대공은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다. 이미 모든 일이 거의 다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까지 가련한 조카의 부질없는 발악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리라.
“어디 마음대로 해 보거라, 이사나. 이 숙부의 손에 그 가는 목이 비틀어질 순간까지 말이다. 하하하하!”
마치 그 순간을 상상한 듯 대공은 자신의 움켜진 주먹을 바라보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가녀린 목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부러질 것이다. 그의 형이 아무런 대책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처럼.
그때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깨진 유리 조각을 전부 다 주워 든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물려 나왔지만 그의 미간은 살짝 접혀 있었다.
소년이 보기에 대공은 바보 같은 남자였다. 그는 이미 의식했으면서도 스스로 내뱉은 자신의 말을 간과했다.
삼 일에 한 번씩 비가 내렸다.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비가 그쳤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
‘그런데도 끝까지 우연의 일치라 여긴단 말이지. 멍청한 놈.’
한 제국의 지배자를 향한 것치곤 불손한 생각이었으나 소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 대륙에 일정한 양의 물이 규칙적으로 공급되었다. 소년이 알기로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소년은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그렸다.
‘너구나, 엘퀴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