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트로웰, 이사나와 함께 배정받은 삼 인실은 벽면에 붙은 이 층 침대와 바닥에 깔린 담요 하나가 전부인 비교적 단출한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물론 딱딱한 흙바닥 생활에 익숙해진 내겐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침실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셋이서만 따로 시간을 갖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그러고 보니 클모어에 도착하면 뭘 할지 구상은 해 둔 거야?”
“음, 글쎄. 사실은 아직 별로 계획은 없어. 일단 이사나의 사촌 형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 정하지 않을까 싶은데.”
“네가 정령왕이란 사실은 밝히지 않는 거지?”
“응. 이사나가 나랑 계약한 사실이 알려지면 삼 일의 기적이 트릭이란 것도 전부 드러날 거 아냐. 언젠가는 밝혀야 하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옆에 있던 이사나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적당히 위장 신분을 만드는 게 어때?”
“위장 신분?”
“출신지나 직업 같은 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여행을 다닐 땐 미리 정해 둬서 나쁠 것 없어. 누군가 물어보면 둘러대기도 편하고.”
“음, 직업이라……. 그럼 나도 용병이나 할까?”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자유 용병이 아니고선 별로 추천하지 않아. 길드에 등록되면 사사건건 간섭을 받거든. 하지만 자유 용병은 지금 지니고 있는 임시 용병패밖에 못 받아.”
“으음, 그럼 어떡하지?”
내가 고심하는 것을 본 트로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있지. 이 말 듣고 화내면 안 된다?”
“응? 뭔데, 트로웰?”
“사제가 되는 건 어때? 엘뤼엔의 사제 말이야.”
“엥?”
나더러 사제가 되라고? 그것도 엘뤼엔의 사제?
뜻밖의 제안에 내가 당황하자 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관은 어디를 가도 어느 정도 대우를 받거든. 게다가 엘뤼엔의 사제들은 홀로 수행을 다니는 편이라 네가 호위 없이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야.”
“그, 그치만 그래도 괜찮나? 신관이면 신성력을 써야 하잖아.”
“그러니까 더 간단하지. 엘 너는 치료술을 쓸 수 있잖아. 일반인들은 그게 신성력인지 정령의 기운인지 구분도 하지 못할걸?”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일전에 쇠약해진 아이를 치료했을 때, 그 모친이 나를 스스럼없이 사제라고 생각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이었다.
“문제는 신관 고유의 ‘낙인’인데…….”
“낙인?”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내게 트로웰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은 주로 신의 사랑을 받는 자만이 지니는 것이라 반드시 그 증거가 몸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낙인처럼 특이한 그림이 저절로 나타나는데, 섬기는 신에 따라 형태와 모양이 전부 다르다고 했다.
“아, 그거 혹시 신의 문양인가? 그게 몸에 드러난다고?”
“응, 맞아. 우리가 계약할 때 이마에 인장을 찍어 주는 거랑 같은 이치지. 다만 우리 인장은 정령에게만 보이지만, 신의 낙인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어. 바로 그래서 문제야. 수행을 다닐 수 있는 건 고위 신관들뿐인데, 이들은 모두 낙인을 지니고 있거든. 신분패도 낙인으로 대체한다고 들었어.”
“윽! 그럼 난 안 되겠네. 내 몸엔 신의 낙인 같은 건 없는걸.”
“그래서 화내지 말라고 한 거야. 엘뤼엔에게 직접 부탁해 보면 안 될까?”
“……엘뤼엔에게?”
“응, 아마 부탁하면 선뜻 도와줄 것 같은데. 그에게 문장을 받게 되면 아무 문제도 없잖아.”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 쪽에서 그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오지 못한다고 들었으니 아마 정령계에서 기다려도 만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트로웰이 이런 나의 고민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마침 클모어에 엘뤼엔의 신전이 있거든. 그곳에 가서 기도하면 아마 바로 전달될 거야.”
“헉, 정말?”
“응, 나도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신에게 기도를 하면 천사들이 수거해서 전해 준다고 들었어.”
“그, 그럼 엄청 많지 않을까?”
아무리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전이라고 해도, 전 차원에 있는 엘뤼엔의 신전을 모두 합한다면 그 수가 상당할 것이다. 그곳에서 매일매일 전달되는 기도들만 모아도 하루에 몇백 개는 간단히 넘을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엘 너는 그의 아들이잖아. 아마 기도하면 단번에 알아챌걸?”
“아하하. 저, 정말 그럴까?”
“그야 당연하지.”
“음, 그럼 그렇게 해 볼까. 넌 어떻게 생각해, 이사나?”
하지만 그를 돌아본 순간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사나가 앉은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꿈나라에 빠진 듯했다.
“하하, 많이 피곤했나 보네. 하긴 오늘도 종일 걸었으니 힘들었겠지.”
“응, 간간이 체력을 회복시켜 주고 있긴 한데 그래도 아직 벅찬 모양이야. 그래서 틈틈이 근력 운동을 병행하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
“흠, 그보다 정령을 다루는 수련부터 하는 게 낫지 않아? 아직도 친화력이 하위 수준인 것 같은데.”
“으음, 그런가.”
“계약자의 마나가 늘어나면 엘 너에게도 좋을 거야. 그만큼 힘의 제약이 더 풀리거든. 평소에도 틈틈이 수련하게 해 봐.”
“응, 알았어. 내일 일어나면 말해 볼게.”
나는 잠든 이사나를 들어다 침대에 눕혔다. 그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트로웰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이번 계약을 해지했으면 좋겠어.”
“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트로웰?”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다른 인간들의 미래는 훤히 보이는데 네 계약자의 미래는 중간 중간 끊어지는 게 많아. 그만큼 복잡하고, 위험한 자들의 개입이 많다는 뜻이야. 아마 앞으로의 일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거야.”
“으음, 괜찮아. 그런 거야 처음부터 각오했었고…….”
“각오만으론 안 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어.”
“……!”
트로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역시…… 같은 정령왕을 상대로는 혜안이 그리 선명하게 통하지 않아. 하지만 뭔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 그것도 굉장히 섬뜩하고 불쾌한 느낌이야.”
“……불온한 움직임?”
트로웰의 혜안이란 능력이 종종 상대방의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멍하니 되묻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네 계약자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앞으로 이 대륙의 많은 이들이 상처입고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게 될 거야. 그리고 넌 그 모든 것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겠지.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너무 정을 주지 마. 인간을 동정하는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이 종래엔 너의 심장을 갉아먹게 될 거야.”
굳어 있는 나를 향해 트로웰은 당부하듯이 덧붙였다.
“명심해, 엘. 이건 어디까지나 유희에 불과해. 꿈에 너무 취한 나머지 현실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곤란해.”
* * *
그날도 쉐리의 의도는 평소와 같았다. 적당히 아무 남자나 유혹해서 데리고 나온 다음 중간에서 따돌려 버리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아무리 뒷소문이 나쁜 자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환영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해야 휴센을 자극하기에 더 유리할 테니까.
어차피 모든 것은 그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한 연극일 뿐, 실제로 그녀는 아무 남자나 만나서 어울릴 만큼 문란하지도 분별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이번 남자는 이전까지의 상대들처럼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쉐리는 거친 동작으로 남자의 팔을 쳐내며 소리쳤다.
“글쎄, 오늘은 싫다니까?”
“이거 왜 이래? 먼저 유혹해 온 건 너잖아? 남자를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아가씨.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을 것 아냐.”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오늘은 피곤하다고. 그럴 기분이 아니란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면 대개 보통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서며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하지만 숀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는 쉐리의 가는 팔뚝을 붙잡으며 이죽거렸다.
“하하, 누굴 바보로 알아? 그런 식으로 말해서 도망친 다음 단원들 사이로 숨으려는 속셈이잖아.”
“뭐, 뭐?”
“벌써 유명하다고, 너. 샴페인 용병단의 쉐리가 어떤 식으로 남자를 골리는지 말이야.”
“…….”
전부 알고 있었다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쉐리의 얼굴은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반대로 숀의 얼굴은 점점 즐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를 가지고 노는 앙큼한 여우는 벌을 받아야지. 내가 오늘 친히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려 줄 테니 각오하라고.”
“이익! 이거 놔!”
당황한 쉐리는 팔을 뿌리친 다음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위협을 해서라도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숀은 그럴 것이라 예상한 듯, 간단하게 그녀의 손목을 제압해서 뒤로 꺾었다.
“악!”
“킥킥, 도망치면 섭섭하지.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해 놨으니 네 동료들도 여기까지 찾으러 오진 않겠지. 다치기 전에 얌전히 굴어.”
“다…… 당신,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일이면 다들 알아챌 거야! 그땐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후훗, 상관없어. 내 친구 중에 마법사가 있는데 말이야, 녀석이 최면마법에 능통해서 한 사람 기억 지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거든.”
“……!”
그 순간 숀의 뒤편에서 두 명의 남자들이 키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보드카 용병단의 일원이었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건가. 쉐리의 얼굴은 점차 경직하기 시작했다. 뿌리치려 했지만 그 역시 같은 은패의 용병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될 것 같지 않자 쉐리는 얼른 몸을 돌려 발차기를 시도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파악―
“어딜!”
그는 바로 검을 들어 대응했지만, 쉐리 쪽의 일격이 더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휴센에게 착실하게 수련 받아 온 그녀의 검술이 매끄럽게 숀의 몸을 파고들었다.
촤악―
옷이 찢긴 자리에 가는 상흔이 생겼다.
“크윽……!”
숀이 허리를 굽히는 사이, 쉐리는 두 남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방심하고 있던 그들은 손쉽게 걸려들어 바닥을 굴렀다.
그 틈을 타 쉐리는 곧장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은패의 용병을 한꺼번에 세 명이나 상대하긴 힘들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먼저였다.
‘일단 일행에게 돌아가자. 그러고 나면 저들도 함부로 행동하기 어렵겠지.’
그러나 상대편 남자들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포획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쉐리의 뒤를 쫓았다.
“잡아! 놓치면 안 돼!”
“제기랄! 어서 마법을 준비해!”
험악하게 소리치는 숀의 말에 그들 중 마법사인 남자가 얼른 수인을 맺었다. 그 순간 쉐리는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밧줄에라도 묶인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숀이 달려가 우악스럽게 쉐리의 머리채를 틀어잡았다.
“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반항하려는 몸부림이 이어졌지만 두 남자의 힘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평소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담담하던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고 입술을 악물었다. 어깨와 팔은 한껏 뒤틀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것 놔! 이것 놓으라고! 이 자식들아!”
퍼억―
신고 있던 부츠의 높은 굽으로 무릎을 걷어차자 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쉐리의 고개를 강제로 들게 하곤 뺨을 때렸다.
“악!”
“가만히 못 있어? 시X, 부드럽게 대해 주려고 했더니 이게 아주 매를 버는구만.”
“검부터 뺏어. 저래 봬도 은패를 가진 용병이라고.”
“알고 있어.”
그 말과 함께 숀이 쉐리의 손에 들린 검을 빼앗았다. 쉐리는 다시 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소리 지를 거야! 사람을 부를 거라고!”
“후후, 소용없어. 이미 침묵마법이 발동되어 있으니까 소리 질러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들리지 않는단 말씀. 못 믿겠으면 한번 질러 보든지?”
“뭐, 뭐라고?”
자신만만한 마법사의 모습에 쉐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지금은 밤이었고, 작은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시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크게 소란이 일어났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처음부터 마법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어떡하지? 너무 방심했어. 이젠 어떻게 하면 좋아?’
이젠 누군가가 알아채 주지 않는 이상,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없었다. 쉐리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상황이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휴센!’
질끈 감은 그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