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상단 일행은 성안에서 하루 동안 쉬어 가기로 했다. 떨어진 식량도 보충하고 무기를 재정비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늘 같은 노선, 같은 일정으로 움직이다 보니 이미 정기적으로 묵는 여관도 정해져 있었다.
“요즘 여관에선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온다며? 전에 잠깐 들른 마을에서 만난 아가씨가 그러던데.”
“우와, 그게 정말이야? 그럼 어릴 때처럼 뜨거운 물에서 마음껏 목욕할 수도 있는 건가? 그거 정말 기대되는군.”
“가뭄이 정말 끝나긴 끝난 모양이야.”
지루하고 고단한 행군에 지쳐 있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맞는 편안한 잠자리에 잔뜩 들떠 있었다. 본격적인 휴식을 취하기에 앞서, 휴센은 각자 쓸 방을 배분했다.
“쉐리와 이릴은 이 인실, 나머지는 전부 삼 인실이다. 나와 헤롤, 마이티가 한방, 매튜와 엘, 그리고 라이가 한방을 쓰도록 하지. 다들 이 결정에 불만 없겠지?”
“뭐? 그런 게 어딨어! 난 반대야!”
소리친 사람은 헤롤이었다. 휴센은 열쇠를 건네주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반대하는 이유는?”
“그야 위험하니까 그렇지! 요즘은 남자애들도 예쁘장하게 생기면 변태의 표적이 된다고. 애들끼리 있다가 밤중에 누가 들어와서 덮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닥쳐. 네놈의 사상이 여기서 가장 불순해.”
“뭣? 살아 있는 공중도덕의 표본 같은 내가 불순하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면 공중에서 뜀박질을 하게 해 주지.”
그제야 헤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에게 한동안 살벌한 눈빛을 보내던 휴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선 나도 동감하고 있다. 이곳엔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있으니까. 그들과 얽혀서 좋을 것은 없겠지. 이릴과 쉐리, 너희는 일행 중 유일한 여자들이니까 더 각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어.”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건 이릴밖에 없었다. 휴센은 샐쭉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쉐리를 바라보았다.
“쉐리, 너는 왜 아무 말이 없지?”
“뭐가?”
“이릴과 너는 여자니까 특히 주의하라고 말했을 텐데?”
“글쎄, 그다지 신경 쓸 필요를 못 느끼겠는걸? 솔직히 나는 누가 덮치러 와도 상관없거든.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꼬셔 볼까 생각하던 참이라서 말이야.”
진지하지 않은 그녀의 대답에 휴센은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렸다.
“……쉐리, 참고 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더 이상 장난치지 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럼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여기는 태도가 진심이라는 거냐?”
“그래! 진심이야! 그게 어때서?”
“쉐리!”
분위기가 갑자기 살벌해지자 방금까지 웃고 있던 일행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행 중에서 가장 서글서글한 성격의 헤롤이 조심스럽게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저, 이봐, 쉐리. 단장은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런 거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대답할 것까지야…….”
“흥! 그게 바로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거야. 단에 피해만 돌아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야?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대체 무슨 상관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리고 또다시 팽배하게 이어지는 긴장감. 이미 대강의 사정을 눈치챈 상황이긴 했지만, 한배를 탄 일행끼리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그것이 애정 문제와 관련된 경우라 더욱 그랬다.
“난 틀린 말 한 적 없어. 누가 뭐라고 하건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아무렴 무슨 짓을 하건 어때? 어차피 아무리 애써도 정작 내가 가장 원하는 사람은 절대 날 봐 주지 않는데!”
그 순간 휴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껏 만들어낸 듯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드러난 동요의 감정이었다.
쉐리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알겠어? 날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너야, 휴센.”
“…….”
쉐리는 굳어 있는 그의 옆을 어깨로 강하게 밀치며 지나갔다. 한바탕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난 기분이었다.
망연하게 서 있는 휴센을 본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말이야, 휴센. 두 사람의 일이니까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쉐리한테만 너무 딱딱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조금은 부드럽게 말해도 되잖아. 저래 봬도 쉐리는 의외로 단순한 성격이라 휴센이 조금만 잘해 줘도 정말 기뻐할 거야. 자꾸 엄격하게 선을 그으려고 하니까 더 엇나가는 거라고.”
“난 그저 단장으로서…….”
“쉐리가 휴센에게 바라는 모습은 그게 아니잖아. 그건 누구보다 휴센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
이번에도 휴센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릴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있지, 휴센.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관계 같은 건 없어. 혼자 아득바득 버티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고. 쉐리도 이제 더 이상 마냥 어린애가 아니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어른이야. 싫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거절을 해. 단순히 피하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그저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지.”
“……네 이야기는 잘 알았다, 이릴.”
휴센은 한숨과 함께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행들을 돌아보는 그는 다시 단장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이제 쉬러들 가지. 내일부터 다시 강행군이 시작될 테니 그때까지 다들 푹 쉬어 둬.”
“정말 알아듣긴 한 거야?”
돌아선 그의 등을 향해 이릴이 찌푸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에 잠시 멈칫한 휴센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여튼 고집불통!”
“내버려 둬, 이릴. 단장도 생각이 복잡하겠지.”
“내가 불편하니까 그렇지! 대체 언제까지 저 꼴을 보고 살아야 해?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이릴이 투덜거리는 동안 나는 멀찍이 사라져 가는 휴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꽤 당황했다고 생각했는데 차분하게 일행들에게 당부하는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마 저런 모습 때문에 쉐리가 더 애가 타는 게 아닌가 싶다.
“휴센은 쉐리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걸까?”
“글쎄…….”
“어? 트로웰, 너도 몰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생각을 투시할 수 있는 그가 그렇게 대답하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놀라서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 중엔 되도록 사람들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하거든. 전부 다 알고 있으면 재미없잖아.”
“으음, 하긴.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읽지 않으려고 하면 안 들리는 건가?”
“응, 대부분 조절할 수 있어. 하지만 엘 네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읽어 봐 줄 순 있는데.”
“어어? 아, 아니, 괜찮아.”
“궁금한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굳이 일부러 알아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휴센도 감추고 싶은 감정이 있을 텐데, 맘대로 읽어 버리면 좀 미안할 것 같거든. 아, 아니, 그렇다고 트로웰 널 탓하는 건 아니고……. 본인이 직접 투시하는 거랑 부탁해서 알아내는 것엔 무죄와 유죄라는 엄청난 장벽이 있달까, 뭐랄까…….”
당황해서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에 트로웰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알아. 그의 마음을 존중해 주고 싶다는 거지? 이해해. 엘은 상냥하니까.”
“으음, 상냥한 건 너지, 트로웰.”
“내가?”
“툭하면 답답하게 구는데도 화내지 않잖아. 물어보는 것마다 전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그 말에 트로웰은 두 눈을 가만히 깜빡이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엘은 아직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는구나. 뭐, 그것도 매력이긴 하지.”
……저기, 트로웰? 아무래도 나에 대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그는 어색하게 굳어진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롤이 바짝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 매튜가 저렇게 웃어?”
“아, 별 이야기 아니었어요. 하하…….”
“그래? 거참, 매번 볼 때마다 놀랍다니까. 매번 무표정한 얼굴이라 실은 웃게 하는 중추신경이 망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했었거든. 그런데 너한테는 항상 아무렇지 않게 웃는단 말이지.”
그 말에 나는 처음 이곳에서 만났을 때의 트로웰, 아니 ‘매튜’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때 그는 유독 표정이 없는 얼굴로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 그때의 그 모습이 휴센들이 알고 있는 그인 것 같았다.
“대체 비결이 뭐야?”
“그, 글쎄요. 비결이라곤 해도 저는 처음부터 매튜의 웃는 모습밖에 보지 못해서…….”
“으음, 소꿉친구의 위력인가. 하긴, 이해는 간다. 넌 왠지 대하기가 상당히 편하거든.”
“그런가요?”
“응. 말투나 억양도 그렇긴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 자체에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 후드를 벗으면 비현실적인 외모 때문에 좀 가려지긴 하지만.”
“아하하…….”
“아무튼 매튜 옆에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매튜랑 잘 지내 줘라.”
진지하게 당부하는 말에서 트로웰을 아끼는 마음이 전해졌다. 매사에 짓궂고 시끄럽긴 하지만 태생이 선한 사람이다. 트로웰이 이들과 어울리기로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그날 저녁 쉐리는 정말로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저녁 식사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한 남자와 팔짱을 끼고 나타난 것이다.
“큽! 쿨럭, 쿨럭! 쉐, 쉐리?”
마침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마이티가 그 모습을 목격하자마자 사레들려 기침을 내뱉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와 그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쉐리와 함께 나타난 남자는 일정 첫날 휴센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보드카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쉐리의 가는 허리에 팔을 두른 채, 한껏 과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어, 식사를 방해했나 보군.”
“다, 당신 뭐야? 왜 쉐리한테 친한 척이야? 당장 허리에서 그 손 떼지 못해? 쉐리, 너도 어서 떨어져!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게다가 그런 차림으로!”
그녀는 자신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몸매를 한껏 드러낸 과감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귀까지 붉어져 소리치는 마이티를 향해 쉐리는 가볍게 대답했다.
“숀이랑 사귀기로 했거든. 지금부터 데이트 나갈 거야.”
“뭐어? 지, 진심이야?”
“당연하지.”
“미쳤어? 저 자식은 서른이 넘었다구! 네 나이가 몇인데 저런 아저씨랑!”
“어머,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난 원래 아저씨 좋아해. 몰랐어?”
“맙소사…….”
이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줄곧 휴센에게 향해 있었다. 마치 그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분했는지 입술을 깨물더니 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긴 너무 답답해. 빨리 나가자, 숀. 밤바람 쐬고 싶어.”
“아아, 그러지. 그럼 모두 반가웠어. 수고들 하라구.”
숀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유로운 한 팔을 흔들었다. 그 탓에 마이티는 완전히 핀트가 나가 버린 듯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들고 곧장 시위를 당겼다.
“마이티!”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식당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근처에 있던 보드카 용병단원들이 무기를 꺼내 드는 것을 시작으로, 주위는 전투 직전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일행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해진 주변을 경계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걸음을 멈춘 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엔 비틀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설마 그걸로 날 쏘려는 건 아니겠지?”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시험해 보고 싶으면 어디 한번 움직여 보든가!”
마이티는 도발하듯 시위를 더욱 당겼다. 그제야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숀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시에 헤롤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마이티! 너 미쳤어? 당장 그 활 내려놔!”
“싫어!”
“야, 인마!”
“그럼 두 눈 멀쩡히 뜨고 쉐리가 저런 새끼랑 나가는 걸 지켜보란 말이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면 행복을 빌어 주려고 했어! 하지만 그 대상이 여자들이나 강간하고 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저런 새끼한테 내주려고 지금까지 양보한 게 아니라고!”
일행들은 갑갑한 얼굴로 서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치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린 쉐리가 한숨을 내쉬고 나선 것이다.
“그만둬, 마이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쉐, 쉐리! 난 그저 널 생각해서……!”
“누가 내 일 신경 써 달랬어? 이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제발 내 일에 참견하지 마. 자꾸 이러면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게 될 거야.”
“……!”
설마 단에서 탈퇴하겠다는 뜻까지 보일 줄은 몰랐는지 휴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변은 잠시간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마이티는 힘없이 활을 내렸다. 그 모습에 쉐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끝내 고집스럽게 숀의 팔을 다시 이끌었다.
“……가자.”
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따라 나가면서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휴센들을 돌아보았다. 보드카 용병들 사이에선 노골적으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헤롤이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이번엔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밖으로 사라지자 일행은 허탈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마이티는 입맛이 없다며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이릴은 목이 타는지 잔에 한가득 담겨 있던 맥주를 단번에 꿀꺽꿀꺽 삼켰다.
“못된 계집애. 기껏 걱정해 준 사람한테 꼭 저렇게 말해야 해?”
“냅 둬. 저러다 큰코다쳐 봐야 정신 차리지.”
“뭐야? 쉐리가 다쳐야 좋겠다는 거야, 지금?”
“누가 그렇대?”
“근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야,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냐?”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몰라?”
헤롤과 이릴이 서로 다투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휴센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한구석에서 묵묵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분노를 삭이기 위해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 듯, 다른 때였다면 한마디 핀잔이라도 건넸을 일행들이 지금은 그에게 시선조차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보드카 용병단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단장은 좋겠다. 아까 그년 몸매 완전 죽여주던데.”
“쉐리라고 했지? 그 계집애는 나도 노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근데 은패의 용병이라며?”
“뭐? 말도 안 돼. 그렇게 가늘고 작은 체구로 은패를 받았다고?”
“길드 원로한테 몸이라도 팔았나 보지. 남자랑 노는 게 꽤 익숙해 보이던데 말이야. 샴페인 용병단 남자들은 좋겠어? 다들 한 번씩 즐겨 봤을 것 아냐.”
“큭큭, 나도 같이 즐기자고 해 볼까?”
일부러 자극하려는 목적인 것처럼 그들은 전혀 말소리를 낮추지 않은 채 더러운 음담패설을 떠들었다. 결국 모욕을 참다못한 일행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콰아앙!
요란한 소음과 함께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방금까지 비열하게 웃고 있던 보드카 용병단원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그들의 시선은 자신들 바로 앞에 있는 벽을 향해 있었다. 벽면의 한가운데엔 맥주잔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 봐.”
“…….”
방금 전 맥주잔을 집어 던진 휴센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무감한 얼굴만큼이나 아무런 감흥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잠시간 벽에 박힌 맥주잔과 휴센을 번갈아 바라보던 용병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더니 하나둘씩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휴센은 그들의 행동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말없이 새 맥주잔에 술을 채웠다. 그 옆에서 일행들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식들, 겨우 저 정도에 얼어붙을 담력으로 헛소리하긴.”
“흥, 다음에 또 걸리기만 해 봐. 그땐 아주 뼈를 발라 놓을 테니까.”
그것을 기점으로 조용했던 식당 안은 다시금 본래의 평온한 공기를 되찾았다. 워낙 용병들이 거칠다 보니 싸움이 잦아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진귀한 구경을 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식당 주인은 벽에 박힌 맥주잔을 기념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