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휘익― 촤악― 콰악!
솟구치는 검날에 오크들이 전부 전멸하기까지는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백 마리에 해당하던 오크들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전부 싸늘한 시체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남자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흔한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베어낸 수많은 오크 중에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있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 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잠시 무심한 표정으로 오크들의 시체를 둘러본 남자는 간단한 동작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다시 허리춤에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그만 구경하고 나오지. 이쯤이면 충분히 즐겼을 텐데?”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서 한 떼의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선두에 선 자는 어둠의 기사단 단장이자 대공의 왼팔이라 칭해지는 세트니오 백작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들 전원이 방금 남자가 보인 위용을 똑똑히 목격했다. 인간으로선 절대 할 수 없는 결과를 이루고도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잠시 두려운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 세트니오 백작이 딱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님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루키엠 드 세트니오 백작.”
남자의 서늘한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세트니오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빌어먹을 보라색 눈. 그는 예전부터 저 눈동자가 싫었다. 마치 피로 물든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그대도 잘 알 테지?”
눈동자만큼이나 서늘한 질문에 세트니오는 입술을 악물었다. 카리브디스의 입장에선 그저 확인하는 차원에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세트니오의 자긍심을 자극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못했지. 안 그런가? 그대가 황제의 흔적을 놓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대공 전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대공의 기대에 못 미친 것은 사실이니까. 세트니오 백작은 다시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쯤 유카르테 대공이 뭔가 다른 지시를 내릴 것이라는 건 이미 그의 예상에도 있던 일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설마 대륙에 다섯 명뿐인 소드 마스터이자, 대공의 오른팔인 카리브디스 공작이 직접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한참 후에나 쓸 패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당도한 이상 이제부터 모든 지휘권은 그에게 넘겨야만 했다.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일단 그에게 나쁘게 보여서 좋을 일은 없다는 판단에 백작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면목 없습니다, 공작님. 제가 부족했습니다.”
“알면 되었다, 백작. 유감이지만 이제부터 그대들을 지휘하는 것은 나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이다. 이에 이의가 있는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지당하신 결정입니다.”
정중한 대답에 카리브디스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상황은 어떻지?”
“황제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클모어 공국으로 향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미 공국에 병사들을 풀어 두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그의 친위대와 움직이고 있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황제는 자신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들로서도 황제를 보호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섣불리 떨어지진 못할 겁니다.”
“흐음, 그렇군. 각 검문소의 검문을 강화하고 병사들을 추가 배치하라.”
“알겠습니다. 카리브디스 님!”
지휘권을 양보한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긴 해도, 소드 마스터인 공작의 합류는 그들에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백작은 황제를 잡아 대공에게 바치는 자신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 오크들의 시체를 살펴보던 기사들이 뜻밖의 사실을 알려 왔다.
“백작님! 오크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모두 굉장합니다!”
“마법검은 물론이며, 미스릴로 제작된 양검도 있습니다.”
“뭐라고?”
놀란 표정으로 묻는 두 지휘관에게 기사들은 정중히 수거한 무기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대로 검집의 세공부터 시작해 칼의 벼림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검이었다.
“어쩐지 오크들의 무기가 꽤 좋아 보인다 했지. 어디 무기상점이라도 털었나?”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공작의 말을 들으며 세트니오 백작은 꿈에 부풀어 미소 지었다.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이것은 앞으로의 일이 잘될 징조가 틀림없다!’
세트니오 백작과 어둠의 기사단, 그들은 모두 이번 일이 길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카리브디스 공작만은 오크들이 고급 무기를 지니게 된 경위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 물론 그에 대한 관심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크, 크윽. 감히 나를…….”
공작과 기사들이 떠난 이후, 시체들 사이에서 한 오크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검풍에 당한 순간 기절했었던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였다.
매캐한 오물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에게 당해 기절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몸 한가운데에는 카리브디스 공작에게 당한 검풍으로 생긴 상흔이 길게 그어진 상태였다. 깊이 파인 상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울컥 새빨간 피를 토했다.
그것을 찌푸린 눈으로 노려본 메세테리우스가 악에 받친 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단지 방심했을 뿐이다. 다음에 만나면 절대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야. 그때가 네놈들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두 주먹을 움켜쥔 메세테리우스는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크들에게 나눠 주었던 상당량의 무기가 그가 잠시 기절한 사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내 무기까지 들고 튀었다 이거지?’
오크들에게 선뜻 무기를 내어주긴 했지만, 사실 드래곤 메세테리우스는 재물 욕심이 상당한 자였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무기에 추적마법을 걸어 둔 상태였다. 혹시나 잃어버리게 돼도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메세테리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물건을 가지고 간 것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어리석은 인간들아.”
한 번 맺은 원수는 두고두고 쫓아다니며 갚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복수 방법이었다.
* * *
오크 떼를 만난 이후, 일행은 별 탈 없이 무사히 첫 번째 검문소에 다다랐다.
검문소는 길게 쌓인 성탑 밖으로 작은 초소가 지어진 형식이었다. 그 안에서 담소를 나누던 병사들은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보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차 안에 있던 상단의 대표자가 얼른 자신의 신분패와 목적지가 명시된 서류를 보이자 병사들이 느긋한 표정으로 마차와 용병 일행을 쭈욱 둘러보기 시작했다.
“흠, 피닉스 상단인가? 지부에 물건을 공급하러 가는 모양이군.”
“예, 나으리들. 언제나 그렇듯이 비단과 다수의 밀가루 포대입니다.”
“이쪽들은 이번에 고용한 용병인가? 소속된 용병패와 단증을 보여라.”
그의 말에 휴센들을 비롯해서 용병들이 품 안에서 신분패를 꺼내 보였다. 다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라는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혹시 병사들이 나와 이사나가 가진 나무패에 관심을 보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들은 패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저 형식적인 절차를 밟는 느낌이었다.
“호위무사 이십 명에 계약 용병 삼십오 명이라. 짐에 비해 호위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오기 직전에 마주친 오크 떼가 백 마리가 넘었는걸요. 저희 짐을 지키려면 이 정도 용병은 고용해야 합니다.”
“흐음, 그런가?”
“부디 잘 좀 부탁드립니다, 헤헤.”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인 상인이 병사의 손에 슬그머니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그것을 본 병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흠흠, 하기야 요즘 유독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더군. 좋아, 통과를 허락한다. 어이, 성문을 열어!”
검문하던 병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성벽 안쪽에 있던 경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뭐야, 이걸로 끝이야?’
적어도 짐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호위하는 용병이나 상단 사람 중에 수상한 인간은 없는지, 그 외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방면을 통틀어 자세히 확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스러울 정도로 허무한 검문이었다. 나는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어, 검문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간단한 건가요?”
나의 질문에 헤롤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피닉스 상단이라서 그래. 이 검문소는 주기적으로 그들이 이용하는 곳이거든. 웃돈을 주고 검문 절차를 간단히 하도록 길을 터놓은 거지. 아까 손에 돈 쥐여 주는 거 못 봤어? 다 뇌물의 힘이야, 뇌물.”
“그, 그러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절대 들킬 일이 없다는 게 문제지. 저 병사들부터 그 위에 있는 귀족까지 전부 다 한통속이거든. 말이 좋아야 말이지, 황실 사정이 어지러운데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야.”
“…….”
그 말에 내 옆에서 듣던 이사나의 어깨가 굳었다. 순간 괜히 물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국의 현실을 정확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나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이 공공연한 건가요?”
“심각하지. 심지어 살인마도 돈만 내면 풀려나는 세상이야. 가뭄이 끝나면 뭐해. 가장 기본적인 법규가 죄다 엉망진창인데. 아마 이 상태가 지속하면 몇 년 안에 이 제국이 멸망한다는 데 내 전 재산도 걸 수 있다.”
“그, 그래도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사라진 황제 폐하가 돌아온다든가.”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겠어? 어차피 높으신 분들이야 다 똑같지. 자기들 잇속 챙기기 바빠 백성들 사정은 전혀 돌아보지 않잖아.”
“다를 수도 있죠. 신분이 높다고 해서 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에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존재한다고요.”
“……하긴,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선 확실히 좋은 분이긴 하셨지.”
그 순간 이사나의 호흡이 깊어졌다. 가려진 후드 속에서 겨우 드러난 입술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뭐가, 라이?”
“정말…… 선황 폐하께서 좋은 분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 저주받은 황제인데도?”
이사나의 질문에 헤롤은 눈을 크게 떴다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 난 신탁을 직접 본 적도 없고 그래선지 저주의 황제니 뭔지에 대해 떠도는 소문엔 별로 관심 없어. 내가 아는 건 그저 선황께서 힘든 가뭄의 시기에 황실의 창고를 개방하셨고, 구휼미를 굉장히 많이 풀었다는 사실뿐이거든. 그런 분이 좋은 황제가 아니라면 달리 누가 좋은 황제겠어?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꽤 많을걸?”
“…….”
“소문에 의하면 지금의 어린 황제 폐하도 선황 폐하를 많이 닮으셨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분명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야. 아직 어리신 폐하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워 놓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부디 폐하께서 이 땅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중얼거리는 말투엔 진심으로 이사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나는 헤롤에게 고마운 시선을 보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지언정, 방금 그가 한 말은 이사나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테니까.
이사나는 가슴 부근의 옷깃을 꾹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황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