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3화 (53/608)

제53화

내가 ‘몬스터’라는 생물을 실제로 본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햇볕이 따가운 날의 오후였다. 그날은 마침 클모어로 가기 직전에 거쳐야 하는 세 개의 검문소 중 첫 번째 검문소에 거의 다다른 날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서 마주친 몬스터라는 생물은 황당하게도 사람의 몸체에 돼지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입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길게 솟아올라 있었다. 들고 있는 무기는 대부분 낡은 창이나 짧고 투박한 모양의 도끼였다.

“오크다.”

일부러 행렬을 노리고 나타난 듯, 순식간에 길목을 점거한 몬스터들은 사방을 넓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언뜻 세어 봐도 그 숫자가 일백은 넘었다.

“오크? 저게 혹시 몬스터야?”

“응, 맞아. 단체로 몰려다닌다는 것만 빼면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하위급 몬스터야. 겁을 줘도 잘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좀 귀찮긴 하지만.”

“헤에, 그렇구나.”

말로만 듣던 몬스터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단체 빼곤 별 볼 일 없는 하위급 몬스터라더니, 수많은 적 앞에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나만큼이나 몬스터를 접할 기회가 없던 이사나만은 잔뜩 굳은 채였다.

“취이익! 취이이익!”

오크들이 내뱉는 숨소리는 마치 쇠가 긁히는 것처럼 거칠었다. 털이나 몸에서 고약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때 무리 중의 한 오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취익, 인간! 짐만 내리고 가면 죽이지 않겠다, 취익! 얌전히 물건을 내놔라, 취익!”

“숫자도 취익, 우리가 더 많다, 취익!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말고, 취익! 물건을 내놓아라!”

‘우와! 정말로 말을 하잖아?’

하체가 인간이긴 했지만 돼지 머리를 달고서 사람 말을 하니 신기했다. 마치 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트로웰이 눈짓을 보내왔다.

“엘, 옆으로 피해 있어.”

“응?”

대체 뭘 하려고?

내가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녀석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으니 처리해야지. 보기에 조금 거북한 장면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라이랑 같이 눈 가리고 있어.”

“거북한 장면?”

“……금방 끝날 거야.”

그는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왠지 모르게 난처한 표정이다.

“쯧, 첫 타자는 고작 오크 떼인가.”

그때 목을 좌우로 크게 돌린 헤롤이 등에 매단 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빠른 속도로 조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눈을 몇 번 깜빡이는 동안 완성된 그것은 거대한 도끼 창이였다. 얼마나 큰지 어지간한 사람은 두 손으로 쥐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는 그것을 한 손에 움켜쥐고 호기롭게 오크들을 향해 외쳤다.

“어이, 돼지 머리들. 이 형님들이 지금 몹시 바쁘다. 이쯤에서 그냥 얌전히 도망가 주면 죽이지 않으마. 응? 어떻게 할래?”

“와하하하!”

동시에 여기저기서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도 그 점만은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취익! 건방진 인간들이다, 취익!”

“공격해라, 취익! 모두 다 죽여라!”

기분이 상한 오크들은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과의 전투로 이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창에 의해 오크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터진 뇌수와 붉은 선혈이 지면을 온통 적셔 들어가기 시작했다.

“윽!”

내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켜만 보는 건데도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트로웰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랄까? 멋모르고 전투를 지켜보던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육 장면에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정령이라 다행이지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오늘 아침에 먹은 것을 확인했을지도 몰랐다(그래 봤자 수프겠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오크들은 무참히 토막 나고 있었다.

“크하하하! 바로 이 맛이야! 그동안 이동만 하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는데! 니들이 나를 돕는구나! 푸하하하!”

“헤롤! 도망가는 놈들까지 다 죽여야 해! 이놈들은 내버려 두면 더 많은 놈을 데리고 돌아온단 말이야!”

“알고 있어! 맡겨 두라고!”

쉐리의 외침에 헤롤이 광소하며 대답했다. 그는 도끼 하나만 짊어진 채 오크 무리 사이를 종횡무진 움직이고 있었다. 부웅! 묵직한 파공음과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세 마리의 오크들 머리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또다시 터져 나오는 피 분수. 으윽! 역시 괜히 봤다.

“이 빌어먹을 놈아! 애들 보는 것도 생각하란 말이야! 좀 얌전하게 죽일 순 없어? 트롤도 아닌데 뭐하러 멱을 따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마녀야! 채찍의 강도 좀 조절하라고! 네 눈엔 저 반으로 갈라진 몸통이 보이지도 않냐?”

“시끄럿! 터진 머리통보다야 훨씬 나아!”

“웃기지 마! 흘러내린 내장들보다야 동강 난 머리통이 낫다고!”

“뭐가 어째??”

으아아, 이건 정신 고문이야! 시선을 피하고 있어도 친절하게 이어지는 헤롤과 이릴의 생중계(?) 때문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사나의 얼굴 역시 급격히 창백해진 상태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살짝 찌푸린 트로웰이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지시켰다.

“헤롤, 이릴! 말다툼할 시간 있으면 싸움이나 빨리 끝내요. 이러다 날이 저물겠어요.”

“앗! 미, 미안, 매튜.”

“쳇, 너 매튜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하지만 이후로도 둘의 말다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더 이상 몬스터를 죽이는 방식을 가지고 떠들어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저렇게 여유 만만한 모습이라니. 이런 일들이 그들에겐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인 것 같았다.

퍼억!

그 순간 바로 옆에서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트로웰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오크를 향해 돌려차기를 날린 것이다. 그의 발을 맞고 나가떨어진 오크는 게거품을 물더니 그대로 바닥에 추욱 늘어졌다. 단 한 방의 발차기에 절명한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공중으로 가볍게 도약해서 자신을 향해 뻗어진 오크들의 도끼에 살짝 내려앉은 뒤, 빠른 속도로 일격을 가했다. 피가 튀지도 않고 끔찍한 잔해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처리 방식이었다.

휴센 역시 그 못지않게 깔끔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몬스터의 급소만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치 칼바람에 맞은 낙엽처럼 오크들의 시체가 쌓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그들의 동작은 하나하나 전부 아름다웠다. 한창 싸우기 바빠야 할 다른 용병단 사람들까지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이사나 또한 동경 어린 눈으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

“으응, 굉장해.”

눈 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몬스터가 처리되었다.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어 가자 트로웰은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수많은 오크를 상대했으면서도 얼굴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상태였다.

그가 물러서자 다른 샴페인 용병단원들도 돌아섰고, 남아 있던 몇 마리의 오크들은 다른 용병단원들로 인해 그 최후의 생을 마감했다. 비릿한 피 냄새와 널려진 시체들 때문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긴 했지만, 큰 활약을 이루고 돌아오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대단해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많은 몬스터를 처리하다니.”

“후훗. 이 정도야 우리한테는 식후 디저트나 다름없지. 어때? 나 괜찮았어?”

“네, 정말 멋졌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우리는 괜찮아. 저쪽 인간들은 좀 다친 모양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마이티가 가리킨 것은 선두에 있던 보드카 용병단이었다. 그들 또한 휴센들처럼 은패를 다수 보유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피해가 큰 것 같았다. 어깨와 다리, 머리 부근에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소란스러운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까. 마차 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 안의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자연히 모두의 시선은 그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 것은 새하얀 로브를 입은 흑발의 남자였다. 그는 부상자들에게 다가가 환부에 손을 얹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흰빛이 새어 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 상처가 아물었다. 그것을 본 일행들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헉, 설마 신관?”

“헤에, 그러게. 역시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상단답네. 고작 짐마차 일정에 저 비싼 신관을 동행하고 가다니. 돈이 썩어 넘쳐나는 모양이지?”

치유 능력을 지닌 신관은 진귀한 만큼 몸값이 매우 비싸다. 신전을 찾아가서 한 번 치료를 받는 데 드는 금액만 해도 어지간한 평민들의 한 달 생활비를 상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기간의 여행에 동행할 정도라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이 들어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관이 빠르게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본 마이티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다칠 걸 그랬나? 나도 태어나서 한 번쯤은 신관한테 치료받아 보고 싶었는데.”

“미친놈. 신관의 신성력이 전지전능한 줄 알아? 저거 겉으로만 나은 것처럼 보일 뿐이지 치료받은 이후에도 한동안은 안정해야 하고, 이전의 몸 상태로 돌아오려면 한참 지나야 한다고. 나 같으면 그냥 안 다치고 만다.”

“체, 나도 그냥 해 본 말이거든?”

그들이 다투는 동안 치료를 마친 신관은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멀찍이서 뒷모습을 본 것뿐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존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