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2화 (52/608)

제52화

샴페인 용병단이 호위를 맡은 피닉스 상단은 대륙에서도 세 손가락에 들 만큼 규모가 큰 상단이었다.

목적지인 클모어에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들르는데, 그때마다 본래 데리고 있는 호위무사들 외에도 용병을 추가로 고용한다고 했다. 상단의 총수가 신중한 성격이라서 무엇보다 안전한 일정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휴센들 외에도 고용한 용병단이 세 개가 넘었다.

“켁, 저 자식들 보드카 용병단 아니야?”

출발 당일, 집결 장소에 모인 헤롤은 무리 중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 건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용병 무리였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그들을 발견한 이릴과 마이티가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보드카? 윽, 정말이네. 저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있어?”

“설마 저놈들도 같이 가는 건가?”

“으아, 싫다. 갑자기 일할 맛이 확 떨어지네.”

“단장은 알고 있었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사람들의 불만 어린 시선에 휴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으면?”

“당연히 이딴 의뢰 거절하자고 했지! 저 자식들이 얼마나 질이 나쁜 놈들인 줄 몰라서 그래? 툭하면 약탈하고 여자들 강간하고, 하는 짓이 삼류 건달들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의뢰를 받은 거야?”

“보수가 좋으니까. 어딜 가도 이만한 보수는 받기 힘들다. 거슬려도 그 정도는 좀 참아.”

“난 싫어! 저놈들이랑 몇 개월이나 같이 다닐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민다고. 그냥 선금 돌려주고 파기하면 안 돼?”

“안 돼. 돌려줄 선금은커녕 이번 달은 남은 운영비도 간당간당한 상태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야.”

“뭐? 지난달에 열심히 일했잖아. 그런데 왜 벌써 운영비가 떨어져?”

“……그걸 지금 네놈이 묻는 거냐?”

서슬 푸른 시선에 헤롤이 움찔 몸을 떨었다. 휴센은 금방이라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잘난 주둥이로 떠들기 전에, 네놈이 지난 의뢰 때 파손한 기물이 몇 개인지부터 상기해 봐. 몬스터를 토벌하랬더니 방책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놔? 어디 그것뿐이냐? 바로 전 의뢰에선 의뢰주를 묵사발로 만들었지. 그때 들어간 치료비가 다 어디에서 나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그건 그 새끼가 용병을 비하하는 말을 해서…….”

“가볍게 위협만 했어도 충분했을 일이다. 그런데 넌 손목을 부러트린 것으로 모자라 다리 근육까지 전부 파열시켜 놨지. 네놈의 그 욱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우리 용병단의 재정 상태가 파탄 날 지경이야. 경고하는데, 이번에도 또 문제를 일으켰다간 단에서 제명해 버릴 테니 각오해.”

“췌엣…….”

“대답은?”

“알았어, 알았다고. 조심하면 되잖아.”

하지만 단원의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순순히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표정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일행들에게 상당히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샴페인 용병단 아니야?”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휴센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을 향했다. 한 발짝 앞에 서 있는 상대를 발견한 그들의 얼굴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일그러졌다. 바로 보드카 용병단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음흉한 시선으로 이릴과 쉐리를 잠시 훑었다. 그리곤 단장인 휴센을 향해 이죽거리듯이 물었다.

“이 용병단엔 여전히 미인이 많군. 양 옆구리에 여자들 끼고 일하면 기분이 좀 어때? 좀 더 영웅 느낌이 나나?”

“무슨 소리지?”

“아아, 별 뜻은 없어.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들 옆에 있으면 잘 보이고 싶단 생각에 열심히 일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진 않네. 여자들 따위가 전력에 보탬이 되긴 하나? 저렇게 가는 몸으론 검 하나도 제대로 못 들 것 같은데.”

“하하! 혹시 몬스터가 나타나면 꺅꺅 비명 지르면서 숨기나 하는 거 아냐?”

“말조심해. 이릴과 쉐리는 은패의 용병이다.”

“어이쿠, 실례. 내가 아는 여자들은 남자한테 빌붙어 아양밖에 부릴 줄 몰라서 말이야. 누구나 다 그런 줄 알았지.”

“저 자식이……!”

노골적인 모욕에 행동에 마이티가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움켜쥔 그가 당장에라도 그들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촤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보드카 용병단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중 선두에 선 자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찢긴 듯 깊게 파인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보라색 머리칼을 하나로 틀어 올린 채 요염하게 웃고 있는 이릴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길고 검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잠깐, 채찍이라고?’

나는 당황해서 다시 이릴의 모습을 살폈다. 다시 봐도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건 분명 채찍이었다. 그것도 군데군데 뼛조각이 박혀 있는, 작정하고 고문하기 위해 제작된 채찍임이 분명했다.

“다, 단장!”

“이년이!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다짜고짜 채찍을 휘두르다니!”

채찍을 맞은 사람은 아무래도 보드카 용병단의 단장인 모양이다. 단원들이 경악해서 소리치자 이릴은 희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네 말대로 난 여자라서 검을 들 힘이 없거든. 그래서 보다시피 다른 무기를 쓰고 있어. 그걸 보여 주려고 한 번 휘둘렀는데 설마 거기에 맞을 줄은 몰랐네. 좀 알아서 피하지 그랬어. 그렇게 굼떠서야 어디 고블린 한 마리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뭐, 뭐야?”

“거짓말하지 마! 지금 일부러 그런 거잖아!”

“어머, 정말이야. 내가 진심으로 휘둘렀으면 살아 있을 리가 없거든.”

“무슨 헛소리를……!”

“보여 줄까?”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이릴이 휘두른 채찍이 그들 바로 옆에 있던 나무를 크게 휘감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무의 몸체가 부르르 떨더니, 멀쩡하던 줄기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빠지직빠지직! 쿠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기운 나무는 곧 이등분이 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무지 채찍질 한 번으로 일어났다곤 믿기 힘든 현상이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핼쑥해졌다.

“오, 오라……?”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그녀는 천사처럼 해맑게 웃었다.

“알았으면 꺼져, 이 얼간이들아.”

화사한 얼굴만큼이나 상큼한 말투였다(비록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상큼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지만).

보드카 용병단원들은 얼굴을 굳히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눈앞에서 채찍의 위력을 확인한 만큼 감히 덤벼들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자존심을 버릴 순 없었는지 상투적인 몇 마디를 던지고 가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어, 어쨌든 앞으로 한동안 같이 다니게 됐으니 잘 지내보자고.”

“너희! 우리가 겁먹어서 물러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

마지막까지 치졸한 모습에 휴센들의 얼굴은 똑같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이릴은 바닥에 늘어트린 채찍을 가볍게 휘감아 올리며 코웃음 쳤다.

“한 놈만 제대로 걸려 봐. 아주 아작을 내줄 테니까.”

분명 내게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저절로 몸이 떨렸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오한이 이는 듯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중에서 헤롤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저 성질머리하곤. 저러니까 이제껏 시집을 못 갔지.”

내게도 들린 말이 이릴의 귀에 닿지 않을 리 없었다. 이제야 그녀가 헤롤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입이 문제인 거다. 이릴은 눈꼬리를 사납게 추켜올리며 헤롤을 쏘아보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헤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웃기시네. 내가 어때서 시집을 못 갔다고? 어디 시집 못 간 여자 손에 한번 죽어 볼래?”

촤아악!

감겼던 채찍이 다시 바닥에 늘어졌다. 헤롤은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야, 야. 그거 반칙이다. 나 지금 무기도 안 들었거든?”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니?”

나무도 통째로 절단하는 무시무시한 채찍이 거침없이 헤롤을 향해 날아갔다. 의외인 건 산만한 덩치를 지닌 헤롤의 반사 신경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굴려 가며 채찍이 닿는 범위에서 달아났다. 하지만 이릴의 공격은 집요했다. 피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얼굴과 몸엔 크고 작은 생채기가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우와악! 누가 이 마녀 좀 말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주치는 시선마다 하나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히 나서서 불똥 맞지 말라는 친절한 충고이리라.

그렇게 모두의 철저한 방관 속에서 헤롤과 이릴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은 계속되었다.

이러다 조만간 살인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이 여정의 앞날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불안한 시작과 달리 막상 이어진 여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일행들이 출발하고 나서는 소 닭 보듯 서로 임무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더불어 염려했던 보드카 용병들과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행렬이 워낙 긴 데다 각자 맡은 영역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샴페인 용병단이 맡은 것은 행렬의 후미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두에 서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후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몬스터나 산적이란 것이 항상 선두부터 공격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심하기 쉬운 뒤쪽을 일부러 노리고 들어오는 경우가 상당했다. 또한 불가피하게 탈출해야 하는 경우, 뒤따라오는 적을 처리하는 것 역시 후미의 몫이었다.

“으으, 이제 슬슬 추워지는걸.”

마이티가 입고 있는 가죽조끼를 단단히 여미며 중얼거렸다.

이미 가을로 접어든 날씨는 한국만큼이나 일교차가 컸다. 낮은 숨 막히도록 더우면서도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이 에일 듯한 추위가 닥쳤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선 벌써 감기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다행히 휴센들은 타고난 체질이 건강한 건지 아직까진 멀쩡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몇 월달이에요? 가을인 거 맞지요?”

“으음? 아아, 한낮의 정취를 즐기는 여신의 발걸음이 머물러 있는 달이지. 이 걸음이 두어 발자국 내디뎌질 때면 포악한 성자가 얼음 창을 들고 행차하실 거야.”

“…….”

이들이랑 어울리게 되면서 알게 된 건데, 이곳 사람들은 계절을 말할 때 정확히 몇 월이라고 구분 짓지 않는다. 그 대신 각각의 계절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정해져 있었는데, 예를 들면 봄은 ‘잠에서 깨어난 페어리의 하품’이라든지, 여름은 ‘푸른 물가를 달리는 정령들의 축제’, 가을은 ‘한낮의 정취를 즐기는 여신의 발걸음’, 겨울은 ‘포악한 성자의 행차’라는 식이었다.

뭐, 사람에 따라 조금씩 더 시적인 표현을 첨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르기도 한다지만 대체로 낯간지러운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선 같았다. 그 때문에 이들이 하는 말에서 날짜의 정확성을 찾아내기란 나로선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생각해 봐라.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상대가 내게 ‘잠에서 깨어나는 페어리가 드디어 눈을 깜빡일 때, 그 해가 조금이나마 기울어지는 시각에 만나세’라고 하면 대체 뭐라고 하는지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무슨 추리소설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즉시 녀석의 멱살을 틀어잡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왜?”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요. 여기서 클모어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흐음, 적어도 도착하게 되면 포악한 성자가 그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쯤일 테지. 클모어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성자의 안배가 더욱 살아 숨 쉬고 있을 거야. 두꺼운 옷을 준비해 두는 게 좋아.”

“하하, 네에.”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린데?

웃는 얼굴로 대답은 했다만 정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면 초겨울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십이월? 여신의 발걸음이 두어 걸음 이어져야 포악한 성자가 행차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달은 지나야 겨울이 온다는 소리다. 그럼 여기서 클모어까지 그 정도 걸린다는 걸까?

‘제길. 머리 나쁜 놈은 여기서 오래 살지도 못하겠군.’

“왜 그래, 엘?”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끙끙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트로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간단하게 현재의 고충을 털어놓자, 그는 특유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포악한 성자가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라고 하면 이미 초겨울은 지난 거야. 초겨울일 때는 그저 ‘행차’했다고만 말하지. 또한 한겨울일 때는 그 얼음 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해. 그러니까 헤롤이 말한 것은 초겨울과 한겨울의 중간이야.”

“그, 그래?”

“응. 정확한 표현으로 하면 일월 초를 뜻해. 그러니까 여기서 클모어까지 대충 서너 달 정도가 걸린다고 보면 돼. 한국에서는 일 년을 열두 달로 나눈다고 했지?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야. 다만 이곳 사람들이 워낙 시적인 표현을 좋아해서 ‘언어유희’를 하는 것뿐이지. 서로 애매모호한 뜻을 풀이하면서 즐기는 거야.”

으으, 나처럼 정신 고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취미다. 그냥 쉽게 말하면 될 것을 왜 일부러 비비 꽈서 굳이 해석하게 한단 말인가. 아무튼 사람만큼 자학하길 즐거워하는 생물도 없는 것 같다.

그맘때쯤 모종의 결실이 있었다. 그동안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물의 거래가 드디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삼 일에 한 번씩 내리는 큰 비로 사람들이 더 이상 물을 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황성에서도 물의 거래를 엄중히 금지한다는 공문을 각지에 내렸다. 표면적으론 가뭄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사고팔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세간에 도는 소문을 아는 이들은 누구나 그 진위를 의심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난 공문이 내려지자마자 곧장 비를 내리는 것을 중단했다. 마음껏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자주 내리는 비는 오히려 불편한 요소가 될 테니까. 동시에 짜 맞춘 듯 비가 그치게 되면 사람들이 더욱 의구심을 느낄 것이라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공문이 내려짐과 동시에 비가 그치자 사람들이 대공을 향해 더 의심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에선 대공의 추악한 행동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신이 개입한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트로웰은 질색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놈의 신. 하는 일도 없이 영광을 챙겨 가는 건 여전해.”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트로웰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때 행렬의 움직임이 멈췄다. 가장 선두에서 이동을 중단한 것이다. 아직 휴식 시간이 되려면 멀었기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무기와 짐을 재정비하려는 거야. 이제부터는 몬스터들이 나오는 길목이거든.”

“몬스터?”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다고 했었지.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트로웰에게 물었다.

“몬스터는 어떻게 생겼어? 설마 늑대나 사자 같은 것을 몬스터라고 하는 건 아니지?”

“음? 전에 살던 곳에선 없었어?”

여기서 그가 묻는 전에 살던 곳이란 한국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괴물처럼 생겼을 것 같긴 한데…….”

“대체로 그렇긴 해. 하지만 전부 흉측하기만 한 건 아니야. 평범한 것도 있고 한눈에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있지.”

이어진 그의 설명에 의하면 몬스터는 낮은 지성을 지닌 유사인종의 하나였다. 그 때문에 직립보행하는 종류도 있고, 어떤 것은 유창한 언어까지 구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격이 매우 포악한 데다 공격적이라서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숲과 들에 서식하는 적으로 남았다고 했다.

“겉모습이 아름다울수록 상급의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아. 이 근처엔 드래곤의 레어가 없으니까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응? 그것과 드래곤의 레어가 무슨 상관인데?”

설마 그 상급 몬스터라는 건 드래곤의 레어 근처에서 자주 출몰하는 족속들인가?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내 생각을 미리 읽었는지 트로웰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이 있거든. 그래서 몬스터의 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드래곤의 레어 주위엔 대체로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는 편이야.”

“헤에, 그렇구나.”

그러자 감탄하는 나를 향해 헤롤이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엘은 어디 딴 세상에서라도 왔냐? 다들 아는 얘기를 어째 하나도 몰라?”

“아하하, 그, 그게…… 실은 어릴 때부터 밖을 잘 다녀 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세상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들이 좀 많아요.”

“흠, 확실히 고이 자란 것 같이 보이긴 하는데. 혹시 신전에서 컸어?”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면서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그런 곳에서 자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도 괜찮은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헤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정말이야? 그럼 신관 지망생인 건가?”

“네? 아, 네, 뭐…….”

“호오, 그렇구나. 어쩐지 분위기가 굉장히 정순한 느낌이더라니. 어느 신을 믿는데?”

헉! 어느 신? 어느 신이냐고?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을 삼켰다.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 때문에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나를 구원해 준 건 옆에 있던 트로웰이었다.

“엘이 섬기는 신은 엘뤼엔이에요, 헤롤.”

‘……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자 헤롤이 정말이냐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 매튜 말이 맞아요.”

“헤에, 그래? 엘뤼엔이라면 형벌의 신 엘뤼엔 님을 말하는 거지?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그 신의 사제들은 무술도 잘하고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도 꽤 뛰어나다고 하던데. 엘, 너도 그럼 신성력 쓸 줄 알아?”

“네? 아, 그게…….”

“아! 하긴, 신성력을 쓸 정도면 이미 고위 신관이란 소리겠구나. 너같이 어린 녀석이 벌써 고위 신관일 리가 없지.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네.”

내가 난처해하는 걸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헤롤은 곧장 사과를 건넸다. 덕분에 고비를 넘긴 나는 속으로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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