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그거, 안 잘려.』
“…….”
『정령은 타고난 모습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거든. 머리카락도 네 육체의 일부분이라 잘리지도 않고, 설령 잘린다 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게다가 상처 난 것으로 인식할 테니 웬만하면 시도도 안 하는 편이 좋을걸? 네가 다치면 네 계약자도 다치니까.』
“…….”
뭐야, 그럼 난 죽을 때까지 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엘?”
망연해진 내 표정에 일행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시선엔 당장에라도 머리카락을 잘라낼 기세였던 내가 갑자기 멍하니 굳은 것으로 보였을 테니 당연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단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 안 잘라?”
“……후우, 그만둘래요.”
“어머, 정말? 호호, 잘 생각했어. 너도 좀 아까웠던 거지? 하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예쁜 머리카락이야. 색도 어쩜 이렇게 이쁘지? 이런 건 두고두고 관리하며 보존해 줘야 한다니까.”
비참한 내 심정을 알 리가 없는 이릴은 마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리더니 여관 출입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요정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던 것이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가느다란 체구, 버터를 녹여 만든 것 같은 샛노란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에서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동자는 한봄의 새순을 닮은 예쁜 초록색이었다.
그러자 그녀를 본 일행들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쉐리!”
헉! 저 소녀가 쉐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내가 소리 없이 굳어지는 사이, 성큼성큼 걸어 나온 휴센이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는 거냐?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인상의 그가 정색을 하고 물으니 더 살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쉐리라 불린 소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디를 다녀오는지 일일이 보고해야 해?”
“뭐?”
“어차피 출발은 내일모레잖아. 그때까진 자유 시간 아니었어?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상관할 거 없잖아.”
“……그래도 넌 일단 단에 소속된 용병이다. 일행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건 가장 기본적인 것 아닌가?”
“걱정씩이나 했던 거야? 휴센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지는 미처 몰랐네.”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대답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는 느낌이었다. 휴센은 화를 꾹 참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너…….”
“늦게 돌아온 건 미안해. 클렉이 좀처럼 놔주질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 모레부터 한동안 만날 수 없다고 했더니 몸이 잔뜩 달아서 말이야. 이래 봬도 떼어 놓고 오느라 고생했다고.”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건 마이티였다. 그는 튕기듯 쉐리의 앞으로 튀어 나가며 그녀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크, 클렉이라니? 쉐리! 네가 만난다는 자식이 설마 클렉이야?”
“그래, 왜?”
“왜라니! 그 자식이 얼마나 소문이 지저분한 놈인 줄 알아? 사방팔방 안 건드리고 다닌 여자가 없어서 오죽하면 종마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 하고많은 놈 중에 왜 하필 그런 녀석이랑……!”
“뭐 어때.”
“쉐, 쉐리?”
“종마든 뭐든 즐기는 데 아무런 상관없잖아. 오히려 너저분하게 매달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그 말에 놀란 것은 마이티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쉐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트로웰만은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지금 저 말을 내뱉은 사람이 쉐리 맞냐? 쉐리는 조신과 일편단심의 표본 아니었어?”
“글쎄다. 어느 망할 인간이 사람을 계속 돌 보듯 하니 애가 맛이 갔나 보지. 듣고 있어, 단장? 이젠 나도 몰라. 둘이서 마음대로 하라고.”
“……!”
이릴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겨우 짐작했다. 설마 쉐리라는 소녀가 휴센을……? 아니나 다를까. 툭툭 거침없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쉐리의 시선은 휴센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 끝에 그가 내뱉은 말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클모어까지 함께 갈 일행이 늘었다. 인사해라.”
“…….”
그 말에 일행들은 머리를 짚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뜨거울 정도로 강렬하던 소녀의 눈빛도 한순간에 식었다. 씁쓸하게 가라앉은 얼굴에 떠오른 빛은 명백한 체념의 빛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쉐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할 정도로 매섭게 변했다.
“……또야?”
“에?”
“보나 마나 휴센이 데려왔겠지. 어린애들한테 약한 건 여전하네. 비겁해. 정작 중요할 때는 그 약한 모습도 허용하지 않는 주제에.”
대체 뭐가?
나로선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상대에게 왜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쉐리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충고 하나 할게. 행여 저 사람의 행동에 착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휴센은 아무리 예뻐도 어린애한텐 관심 없거든.”
“…….”
한순간 차디찬 바람이 내 등 뒤를 스쳤다. 분명 두 귀로 제대로 들었건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 이 소녀가 휴센을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단 말이지. 그런데 뜬금없이 나를 노려보곤 착각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젠 휴센이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마…….’
머리부터 점차 차갑게 굳어 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지만, 이 상황에서 내려지는 판단은 단 하나. 지금 이 소녀가 날 연적으로 판단한 건가?
……그런 건가?
쉐리는 얼어붙은 내 반응을 즐기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찔리나 보지?”
“푸핫!”
그러자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듯 뒤쪽에서 커다란 폭소가 들렸다. 동시에 일행들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누가 나 좀 살려 줘!”
“크큽! 맙소사, 쉐리. 너 그냥 극단에 서도 되겠다. 휴센이 누구한테 관심이 있다고? 푸흐흐흡!”
“크하하하하! 아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긴 한데…… 킥킥킥! 어, 어떻게 그렇다고 휴센하고 연결을…… 크하하학…… 으아, 웃겨 죽을 것 같다. 헥헥! ”
“뭐, 뭐야? 왜들 그러는 거야?”
“…….”
이 상황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당사자인 나와 쉐리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휴센조차 뒤로 돌아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쉐리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 가슴에 끌어당겼다.
“뭐, 뭐하는? 꺄, 꺄악!”
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쉐리는 가슴에 손이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나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향했다.
“나, 남자?”
“이제 뭘 오해했는지 알겠어?”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그에 비해 다른 일행들(특히 마이티와 헤롤)은 왠지 실망한 기색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뻔했기에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자 트로웰이 가벼운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더불어 엘은 제 고향 친구예요, 쉐리. 더는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매, 매튜의?”
“휴센이 데려온 건 맞지만 동행을 제안한 사람은 저예요. 엘이 착해서 그렇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냈을 겁니다.”
“미,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예상과는 달리 쉐리는 순순히 사과했다. 대뜸 시비부터 걸어오기에 상당히 도도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한 실수를 바로 인정하는 걸 보면 본성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만 가득 차 있으니 그런 실수를 하는 거다.”
쩔쩔매는 그녀를 향해 휴센이 냉정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잠시간 입술을 악문 쉐리는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정말 미안해. 이번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고? 이름이 뭐야? 나이는?”
“아, 열일곱이야. 엘이라고 해.”
“그래? 동갑이네. 난 쉐리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조금 전의 실수는 잊어 줘.”
“아니, 괜찮아. 이미 잊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
웃고 있지만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나와 간단히 악수를 한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내 방에 올라가 있을게. 피곤해서 쉬어야겠어.”
“어? 쉐리, 식사는?”
“생각 없어.”
간단한 대꾸와 함께 쉐리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밟아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일행들은 일제히 힐난이 담긴 시선으로 휴센을 노려보았다.
“단장,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굳이 단장이 할 말도 아니었어. 쉐리가 누구 때문에 저러는지는 단장이 제일 잘 알잖아.”
“그래서 내가 무조건 봐줘야 한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표출 방식이 잘못됐어. 무단 외박에 잦은 외출은 그렇다 치고, 용병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체력 관리조차 소홀히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는 거르지 말라고 했는데.”
“…….”
일행들은 갑갑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보았다.
그때 이릴이 접시에 몇 가지 음식을 담아 휴센 앞에 내밀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듯 휴센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는 막무가내로 들이밀어 억지로 받도록 했다.
“가지고 따라가 봐.”
“이릴…….”
“말은 그렇게 하면서 결국 쉐리가 굶는 게 걱정되는 거잖아. 게다가 이런 일을 단장이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겨? 잔말 말고 얼른 올라가.”
한숨을 내쉰 휴센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접시를 들고 계단을 밟았다.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뒷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일행들이 끌끌 혀를 찼다.
“하여튼 둘 다 똑같다니까. 솔직하지 못해선.”
“그보다 쉐리 말이야. 저쯤 되면 증상이 좀 심각한 것 아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휴센을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좀 봐. 여기에 남자 일행이 그 혼자뿐인 것도 아닌데 말이지.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다 휴센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헤롤의 말에 이릴은 바로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위아래로 빤히 훑어 내리는 그녀의 행동에 헤롤은 불쾌해하면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뭘 그렇게 보는데?”
“아니,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병인 것 같아서. 세상의 모든 여자가 휴센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멀쩡한 시각을 가진 여자라면 너나 마이티를 좋아하진 않으리라는 거.”
“뭐, 뭐야?”
“야, 이릴! 왜 나까지 걸고넘어지고 그래?”
발끈한 두 남자로 인해 주변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씩씩거리는 마이티를 향해 이릴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가 잘생겼다고?”
“누, 누가 그렇대?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어디 가서 못생겼단 말은 안 들어 봤거든? 그리고 사내자식이 얼굴이 빼어나서 뭐하냐? 요즘은 터프한 남자가 매력인 거 몰라? 너무 예쁘게 생겨서 여자로 오해받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훨씬……! 흠흠, 엘, 이건 너한테 한 말은 아니다. 정말이야.”
“…….”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지금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정령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