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이사나가 일어난 건 저녁 식사 시간 무렵이었다. 사실 일어난 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깨운 것이다. 여행 중엔 끼니를 잘 챙겨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휴센들은 식당에 같이 들어온 우리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 중에 누가 엘이야?”
“아, 저예요.”
“아하, 그렇구나. 둘 다 후드를 쓰고 있는 데다 체형까지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테이블 위엔 이미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비프스튜와 베이컨, 갖가지 고기 조림과 과일샐러드 등, 어림잡아 십 인분은 가뿐히 넘는 양이었다. 다들 체구가 큰 데다 몸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 그만큼 식사량도 많은 것 같았다.
“여기서 잘하는 것들로 주문해 놨어.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걸로 가져가. 부족하면 또 주문하면 되니까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먹음직한 음식이라도 내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정령은 살아가기 위해 영양을 보충할 필요가 전혀 없는 존재다. 그래선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늘 적당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산해진미라도 배가 부르면 소용이 없는 법. 굳이 먹으라면 먹을 수 있지만, 부러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히 인간 세상의 음식들은 맛이 잘 느껴지지도 않아 더 그랬다.
그것은 트로웰도 마찬가지인 듯, 그의 앞엔 간단한 종류의 수프 한 접시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헤롤이 얼굴을 찌푸렸다.
“매튜, 넌 또 그것만 먹는 거야?”
“이거면 충분해요.”
“또 그런 소리. 그럼 안 돼. 자꾸 그렇게만 먹으면 키도 안 큰다? 한창 자랄 성장기에 매끼를 희멀건 수프 따위로 때워서 어쩌자는 거냐?”
그러나 그의 진지한 충고는 도중에 끼어든 이릴에 가로막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무너졌다.
“개폼 잡지 말고 너나 잘하셔. 매튜가 적게 먹어서 우리한테 피해 준 거라도 있니? 자기가 어련히 알아서 관리 잘하거든?”
“아, 아니. 난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러니까 너나 잘하라고. 지는 만날 과식해서 체하는 주제에.”
“…….”
이쯤 되면 슬슬 헤롤이 불쌍할 정도다. 할 말을 잃고 기가 죽은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대체 이릴은 왜 저렇게 헤롤을 싫어하는 걸까? 눈만 마주치면 싸울 만큼 사이가 나쁘면서도 용케 같은 용병단에서 지낸다 싶다.
“쉐리는? 아직도 안 들어온 거냐?”
때마침 이어진 휴센의 질문에 이릴이 헤롤을 놀리던 것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오기는커녕 하루 종일 연락도 없어.”
“쯧, 그 녀석…….”
“그냥 놔둬. 지금 사춘기잖아. 한창 생각이 많고 방황할 시기지. 누가 뭐라고 말해도 별로 소용없을걸? 직성이 풀리면 다시 정신 차릴 거야.”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이릴?”
“어머, 나는 무조건 작고 사랑스러운 쪽 편이야. 몰랐어, 단장?”
장난스러운 말투에 휴센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그때 마이티가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두 사람은 왜 계속 후드를 쓰고 있는 거야?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어?”
“네? 아, 아뇨. 그냥 습관이 되어서…….”
“흠, 그래?”
변명이 너무 어설픈 탓일까. 마이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쓸었다. 나는 한층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저어, 후드를 쓰면 안 되나요?”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사실 인제 와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보통은 일행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간단한 신원 조사를 거치거든. 하지만 너흰 매튜의 친구니까 딱히 그런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은 서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부턴 한동안 함께 지낼 사이잖아.”
“그래, 그러고 보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는 굉장히 좋은데 말이지.”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나와 이사나의 얼굴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헉, 어쩌지?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가 후드를 벗으면 이사나도 벗어야 할 텐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에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사나 역시 긴장한 듯 어깨를 굳힌 상태였다.
“엘의 얼굴은 안 보는 게 나을 텐데요.”
그때 불쑥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마친 트로웰이었다.
“안 보는 게 낫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매튜?”
“후회하실지도 모르거든요.”
“엥? 설마 그 정도로 못생겼단 말이야? 에이, 그럼 또 어때? 사내 녀석 얼굴이 못생길 수도 있지.”
“그래, 맞아. 오크 같은 헤롤도 이렇게 멀쩡히 잘만 돌아다니잖아.”
“아놔, 거기서 왜 또 날 걸고넘어져?”
헤롤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 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난 더욱 짙어진 그들의 시선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트로웰이 한 말이 오히려 그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엘, 괜찮으니까 후드 벗어도 돼.』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입을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는데 또렷하게 말이 전달된 것이다.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당황하자 트로웰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쓰게 웃었다.
『아아, 아직 이런 방식의 대화는 익숙지 않나? 나중에 알려 줄 테니까 일단은 내 말대로 해 봐. 반드시 계약자보다 네가 먼저 벗어야 해.』
‘……내가 먼저?’
영문을 알 수 없는 지시였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머리 뒤로 젖혔다. 그러자 안쪽에 갇혀 있던 물빛의 머리칼이 우수수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치곤 너무 긴 머리칼이다(엘뤼엔은 이것보다 더 길긴 하지만). 원래 잘라 버릴 예정이었는데 무게감이 거의 없는 탓에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조치를 해야 할 것 같다.
‘응? 근데 왠지 주위가 조용해진 듯한……?’
나는 머리칼에 팔렸던 정신을 수습하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 어딘지 모르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의심이 일 정도로 다들 하나같이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멍하니 벌어진 헤롤의 입에선 미처 삼키지 못한 음료수가 줄줄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뭐, 뭐지?’
그들의 시선은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혹시나 싶어 돌아보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왜 그러세요?”
“으응? 아, 저기, 그게…….”
나의 질문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그들은 일제히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볼 땐 언제고 이젠 아무도 나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얼굴은 어째선지 전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심지어 과묵한 휴센마저 똑같았다.
“쿨럭, 쿨럭! 으음, 엘. 저, 저기…… 미, 미안하다. 이런 오해가 있을 줄은…….”
“오해라니, 뭐가요?”
“크흠, 흠. 실은 지금까지 당연히 네가 남자라고만 생각을…….”
“저 남자 맞는데요?”
“…….”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번 것은 조금 전보다 더 길고 더 음침하게 가라앉는 느낌이다. 마치 환상에서 갑자기 현실로 떨어진 듯한 표정? 혹은 쭉쭉빵빵한 몸매를 강조하며 요염하게 설정된 만화영화의 캐릭터가 사실은 열두 살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얼굴이랄까. 아무튼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데…… 단순히 내 착각이겠지?
“그러게 후회한다고 했잖아요.”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에서 아무런 동요가 없는 건 트로웰뿐이었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듯이 중얼거린 말에 일행들은 격분했다.
“큭! 이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매튜!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 깜짝 놀랐잖아!”
“으아, 미치겠다. 매튜의 친구라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내가 남자한테 두근거리다니! 있을 수 없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여자애라도 당혹스러울 정도인데, 저 얼굴로 남자라고? 이게 무슨 희대의 사기극이야? 정말 말도 안 돼!”
“엘, 너 얼른 다시 후드 써! 얼른! 절대,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벗지 마! 알았어?”
“…….”
그래, 이제야 알겠다. 굳이 내가 먼저 후드를 벗어야 하는 이유. 내 외모와 성별의 갭에 충격을 받으면 자연히 이사나의 얼굴은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트로웰에게 슬쩍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그도 미안하긴 한지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제로 이사나가 후드를 벗으려고 하자 그들은 모두 혼비백산한 얼굴로 격렬히 만류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내가 이상한 트라우마를 형성한 것 같았다(게다가 형제라고 알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덕분에 걱정하던 일은 해결됐지만 내 가슴도 같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나 진짜 여성체인가? 남자라는 사실에 저렇게 다들 크게 충격받을 정도로?’
아무래도 조치가 시급한 것 같다. 나는 그간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일을 드디어 실행하기로 했다. 이 치렁치렁하고 거추장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자다움의 상징인 긴 머리칼을, 지금 당장 잘라 버리기로 말이다.
* * *
“엑?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내 결심을 들은 일행들은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이 근처에 이발소 같은 곳은 없나요? 저 혼자선 깔끔하게 못 자를 것 같은데.”
“음, 있긴 하지만…….”
“그래요?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충 혼자 잘라 두고 내일 가 볼까.”
“안 돼!”
그 순간 울려 퍼지는 외침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소리친 사람은 바로 이릴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기겁해서 소리쳤다.
“갑자기 머리카락을 왜 자른다는 거야? 색도 결도 이렇게 예쁘기만 한데! 절대 안 돼! 무조건 안 돼!”
“으음, 하지만 자꾸 여자라고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고…….”
“무슨 소리야? 그건 네 얼굴 문제지 머리카락 탓이 아니잖아?”
……그렇게 선뜻 남의 심장에 칼을 꽂지 말아 줄래요?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다른 사람들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사나마저도.
울컥한 나는 과감하게 단도를 꺼내 들고 머리칼에 갖다 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숨을 참는 안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내 시도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들려온 또렷한 음성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