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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49화 (49/608)

제49화

트로웰이 나가자마자 이사나는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그간 쌓여 온 피로와 조금 전 그를 상대하면서 느낀 긴장들이 침대의 부드러운 감촉과 맞물리면서 한꺼번에 풀어져 그런 듯했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일 층으로 내려오니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샴페인 용병단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제국 전도를 펼쳐 놓고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의 일정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트로웰이 나를 발견하고 크게 손을 흔든 것이다.

“엘! 어서 와.”

덕분에 시선이 집중되자 나는 어색하게 묵례를 하며 다가갔다. 헤롤이 유쾌한 표정으로 반겼다.

“여― 어서 와라, 꼬마. 그런데 혼자네? 동생은?”

“라이는 자고 있어요. 죄송해요. 회의하시는 중인데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야, 방해는 무슨. 혼자서 심심했겠네. 이리 와서 앉아.”

그는 자신의 옆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릴이 두 눈을 사납게 치떴다.

“웃기시네. 누구 마음대로 네 옆이야? 매튜의 친구니까 당연히 그 옆에 앉아야지. 그러니까 이쪽!”

“뭐? 그런 게 어딨냐? 어차피 한동안 얼굴 보고 지낼 사이인데 다 같이 친하게 지내야지.”

“흥,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 말은 못 믿어. 넌 의도가 너무 불순하거든.”

“내가 뭘 어쨌다고!”

“가끔 음흉한 시선으로 매튜를 바라보잖아. 그걸 보면서 일찌감치 깨달았지. 네놈 옆에 소년을 앉히는 건 양 무리에 늑대를 풀어놓는 격이야.”

“그건 매튜 생김새 자체가……!”

“거봐. 결국 본인도 인정하는 거네.”

“누가 인정을 했다는 거야? 내가 아무리 굶주렸어도 사내놈을 넘보진 않거든?”

“변태 말을 누가 믿어?”

“아놔, 진짜!”

헤롤이 억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동안 나는 슬쩍 트로웰 옆에 앉았다. 그러자 이릴이 과일 주스를 내게 건넸다.

“이거 마실래?”

“아, 감사합니다.”

아마도 이릴은 헤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친절한 편인 것 같았다.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표정에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클모어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 부모님은?”

“부모님은 안 계세요.”

“저런,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구나. 하긴, 우리도 부모님은 다 안 계셔. 일찌감치 돌아가셨거나 가뭄 때 버려진 고아 출신들이지. 용병질하는 녀석들 과거야 다 그게 그거지만 말이야. 워낙 힘든 시기였잖아. 사실 요즘 같아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아하하, 그렇죠.”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기지 않니?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긴 가뭄이 막상 비 몇 번 오니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 꼭 자연한테 농락당한 기분이라니까.”

“…….”

유난히 회복이 빨랐던 건 정령왕들이 나섰기 때문이지만,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음료수만 마셨다. 트로웰 역시 전혀 관심 없다는 듯 화제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였다. 다행히 내가 반응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들끼리 알아서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좋아지면 뭐하냐? 그래 봤자 생활은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여전히 서민들은 가난하고 힘들기만 한걸. 주변에 물이 넘쳐 봤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래. 망할 귀족 놈들.”

“그래도 마지막 부분은 조만간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요즘 비가 규칙적으로 자주 내리잖아.”

“아아, 그 ‘삼 일의 기적’ 말이지.”

“큽! 쿨럭, 쿨럭!”

“엘, 괜찮아?”

“아, 으응.”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설마 여기서 그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덕분에 정령왕도 사레가 들린다는 진귀한 사실을 알았지만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다행히 다들 대화에 집중하느라 딱히 내 행동을 수상히 여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일까? 신탁이 거짓이라는 거 말이야.”

“그야 아직은 알 수 없지. 하지만 삼 일마다 정해진 시간에 비가 내린다는 건 확실히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아. 그걸 생각하면 맞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렇지?”

“쯧쯧, 사실 난 처음부터 알았어. 마신의 신탁이 그렇게 쉽게 내려질 리가 없잖아. 황제가 미쳤다는 것도 왠지 구린내가 나더라고.”

“아무튼 그 소문 때문에 대공 쪽에선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야. 조만간 기사들에게 붙은 현상금 금액이 더 커질 거라더군. 더불어 황제에 대한 수배령도 따로 내려진 모양이던데.”

“……!”

맙소사, 이제 하다못해 이사나에게까지 수배령을 내렸다고? 굳어 버린 나만큼이나 다른 사람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에게 수배령을?”

“쓸모 있는 정보 상인한테 들은 거니까 확실해. 이미 현상금 사냥꾼들 쪽에선 소문이 파다한 모양이더라고. 내가 보기엔 대공 쪽에서 기사들과 황제가 따로 행동한다고 판단한 것 같아. 그러니 새삼스럽게 그런 수배령을 내렸겠지. 하긴 그렇게 대놓고 벽보를 붙여 놓는데 나 같아도 떨어져서 행동하겠다.”

마이티의 설명에 휴센은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어쨌건 덕분에 검문이 더 강화될 테니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군. 가급적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 어때, 우리가 어디 보통 평범한 용병단이야? 무려 금패의 용병을 보유한 단이라고! 누가 감히 우릴 건드리겠어?”

자신만만하게 대꾸한 사람은 헤롤이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와 달리 휴센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금패가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진 않아.”

“그래도 상당수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

“……금패?”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은 것인 모양이다. 그러자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헤롤이 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 금패가 뭔지 모르나? 그건 일급 용병들만 지닐 수 있는 표식이야.”

“일급 용병이요?”

“용병은 길드에 가입할 필요가 없는 임시 용병을 제외하고 전부 길드에서 받는 실력 테스트를 통해 등급이 정해지거든. 밑 단계인 삼급에서부터 가장 높은 일급까지 딱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신분패가 달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의 신분패를 꺼내 보였다. 내가 지니고 있는 패와 똑같은 형태에 무늬도 동일했지만, 그의 것은 조금 달랐다. 재질이 나무가 아닌 새하얀 은으로 이뤄져 있었던 것이다. 훨씬 더 예쁘기도 했지만 금속이란 점에서부터 일단 정식이라는 느낌이었다.

“가장 낮은 삼급은 동, 중간이 은, 그리고 일급은 금으로 되어 있지.”

“아아, 그래서 금패라고 하는 거군요.”

이어진 헤롤의 설명에 의하면 용병은 각자 지닌 신분패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의뢰도 달라진다고 했다. 동패는 주로 좀도둑을 잡거나 마을의 순찰 의뢰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고(길드 내에서 가장 비율을 많이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등급이다), 상단의 호위라든가 몬스터 토벌 같은 수준급의 의뢰는 은패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은패 자체도 드문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금패의 용병은 상당히 희귀했다. 고위 마법사나 상급 기사의 실력을 상회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들만이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길드 내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숫자가 적고, 심지어 아무나 테스트를 받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시험이라는 것 또한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것 같았다.

그래서 금패의 용병은 어느 제국을 가도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존중받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샴페인 용병단 안에 그 희귀한 금패의 용병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휴센이었다.

“헉, 휴센 단장님이요?”

“그래, 놀랍지? 저거 샌님처럼 보여도 사실은 엄청난 괴물이라고.”

“……그 괴물한테 죽고 싶나 보군.”

낮게 깔린 휴센의 목소리에 헤롤은 그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얼른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정색하긴. 아무튼 말이지, 금의 패를 가진 용병들은 대부분 혼자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우리 단장은 좀 특이하게도 단체 생활을 더 편하게 여기지만 말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랄 만한 정보 알려 줄까? 아마 올해가 지나면 매튜도 금패를 받을지 몰라.”

“에엑? 트…… 아니, 매튜가요?”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당황하며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드물게 무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올 초에 테스트를 받았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거든. 아마 크게 일이 틀어지지 않는 한, 겨울쯤엔 무난히 금패를 받을 거야. 대단하지? 아마 길드 역사상 최연소 금패 용병일걸? 이로써 우리 샴페인 용병단에 일급 용병이 두 명이나 생기는 거라고. 으쌰! 나도 분발해야지.”

“아하하…….”

더불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샴페인 용병단은 금패인 휴센 외에도 전원이 은패를 소지한 보기 드문 용병단이었다. 보통 대부분의 용병단은 한두 명 정도만이 은패를 소지하고, 나머지는 동패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인원도 이들은 고작 여섯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른 용병단은 가장 적은 숫자가 열 명 이상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그들 일행은 일대에서 꽤 유명한 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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