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7화 (47/608)

제47화

휴센은 우리가 따라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간략하게 자신이 이끄는 용병단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우리 용병단의 인원은 전부 여섯이다. 남자 네 명에 여자가 두 명이지. 그들 중 두 명은 너희 또래다. 하지만 어리다고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일 인당 열 명은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괴물들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미리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다들 너희에게 상냥할 테니까.”

“저, 저기요. 마음을 써 주시는 건 감사한데 정말 저희로도 괜찮거든요.”

“너희는 운이 좋은 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용병단은 상당히 실력이 있거든. 가는 길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

전혀 듣고 있지 않군. 대꾸해 줄 가치조차 없다 이건가?

유유상종이라더니 휴센도 제크란 남자만큼이나 제멋대로인 성향이 다분한 것 같다. 나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제대로 거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나무샘의 쉼터’라는 간판이 걸린 여관 앞이었다. 휴센은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들을 불러올 생각인 듯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나와 이사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주 보았다.

“하아, 일이 완전 꼬였네. 미안, 이사나. 전부 내 탓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말을 걸어도 그냥 무시하는 건데.”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래도 나쁜 사람인 것 같진 않은데? 애들끼리 여행한다고 챙기는 걸 보면. 사실 좀 감탄했어. 저런 용병들도 있구나. 용병은 전부 돈에 관계된 일에만 움직이는 줄 알았거든.”

“그래? 난 용병에 대해선 잘 몰라서. 아무튼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지금 우리 처지엔 너무 위험한 제안이야. 다시 나오면 잘 거절해 보자. 이대로 진짜 용병단에 들어갈 순 없잖아.”

내 말에 이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우리에게 장시간의 단체 생활은 걸맞지 않았다. 사소한 대화는 물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능력을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할 텐데, 일부러 그런 불편을 자처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후드를 쓰고 있다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얼굴을 계속 가리는 것도 힘들 것이다.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이사나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 앞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휴센이 동료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하암― 단장, 누굴 데리고 간다고?”

“우씨, 대체 무슨 일이기에 집합 명령이야? 한창 잘 자고 있었구만.”

그와 함께 나온 사람들은 흐트러진 차림을 한 세 명의 남녀였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지만, 그들은 전원 이제 막 침대에서 일어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휴센이 강제로 깨워서 데리고 나온 것 같았다. 그래선지 표정이며 분위기가 죄다 음침했다.

“와 보면 안다고 했지. 어제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처잤으면 충분히 잔 거다. 인제 그만 좀 징징거려.”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향해 휴센은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키가 크고 우람한 덩치를 지닌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라니, 지금이 대체 몇 신데?”

“조금 전에 막 점심시간이 지났다.”

“헐, 그게 정말이야? 으아, 어쩐지 아까부터 속이 엄청 출출하다 했지. 용건이 뭐라고, 단장? 얼른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다.”

“헤롤, 너…….”

휴센이 기막히다는 듯 바라보자 헤롤이라 불린 남자는 오히려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왜, 뭐가 어때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다. 어떻게 된 게 네놈의 관심은 오직 자는 거 아니면 먹는 것뿐이냐?”

“거참, 당연한 생리적 욕구 가지고 너무 뭐라 그러지 맙시다. 밥 좀 먹자는 게 그렇게 대순가? 어차피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수. 그나저나 오늘 점심 메뉴는 뭐지? 어이, 이릴! 너 뭔지 알아?”

그가 돌아본 사람은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인 보라색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분명 여성 멤버가 두 명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한 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품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버럭 짜증을 냈다.

“내가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이니?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왜 화를 내고 그래? 쳇, 하여튼 계집애가 한 번도 사근사근하게 대꾸하는 법이 없지.”

“뭐? 계집애? 너 죽을래?”

“너희! 조용히 좀 하지 못해?”

‘굉장히 산만한 사람들이네.’

한적하던 주위는 어느새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휴센이 몇 번이나 조용히 하라며 윽박질렀지만, 오히려 그 외침마저 소란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런 걸 보면 실력이 뛰어난 용병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팀워크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특히 헤롤이라 불린 덩치 큰 남자와 이릴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몹시 사이가 나빠 보였다.

그 순간 요란한 틈을 가르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릴, 헤롤. 또 싸우는 건가요? 일어나자마자 기운도 좋네요.”

들려온 음성은 아직 채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의 음색에 가까웠다. 그러자 으르렁거리고 있던 두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물러섰다.

“어머, 매튜. 아니야, 싸우긴. 그저 이 멍청이가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기에 한마디 해 준 것뿐이야.”

“절대 오해야, 매튜! 난 그저 식단 메뉴를 물어본 것뿐이었다고. 근데 이 마녀가 다짜고짜 신경질을 낸 거지.”

‘매튜?’

나는 그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물 안쪽 계단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가는 체형을 지닌 소년이었다. 막 씻고 나온 참인지 그의 머리칼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

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바보같이 멍하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었기 때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 조금 마른 듯한 느낌이면서도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체구.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볼 듯 선명하게 발하는 황금색 눈동자.

그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트로웰……?”

* * *

그랬다. 아무리 봐도 그는 트로웰이었다. 피부색이며 눈동자 색은 물론이고, 키와 체형 모든 것이 그와 닮아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특유의 묘한 분위기까지 똑같았다. 아니,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설마 그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혼자 입안으로 삼킨 소리가 그에게 들린 모양이다. 문득 나를 돌아본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놀란 표정이 스쳤다. 분명 날 알아본 눈빛이었다.

‘뭐, 뭐야. 설마 진짜 트로웰이야?’

머릿속의 생각과는 달리 난 이번에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나를 주시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 덤덤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덤덤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도무지 아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또한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트로웰의 모습과도 거리가 좀 멀었다. 평소에는 늘 부드럽게 웃고 다정다감한 인상인 것에 비해 지금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니까.

조금 전 놀랐다고 느낀 건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나?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속으로 머뭇거렸다. 그때 그가 무심한 얼굴로 휴센을 향해 물었다.

“단장, 이 사람들은?”

그러자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깨달은 듯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도 이채가 서렸다. 앞다투어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뭐야, 단장이 데려온 애들이야?”

“누군데?”

“혹시 단장의 숨겨진 자식들?”

“그럴 리가 있냐!”

휴센은 버럭 소리 지르곤 짧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곤 이번에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인사해라. 이번 의뢰 여정에 우리와 함께할 심부름꾼들이다.”

“에? 심부름꾼?”

그들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휴센을 응시했다.

“갑자기 누굴 데려간다는 건가 했더니 심부름꾼이었어? 단장이 웬일이야? 그런 거 귀찮아하면서.”

“맞아, 전엔 데려가자고 해도 싫다고 했잖아?”

“……사정이 있었다.”

“사정이라니?”

그러자 일행 중 머리에 까치집을 얹은 붉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작게 키득거렸다.

“빤하지 뭐. 척 보니까 아직 어린애들인 것 같은데 딱한 사정을 듣고 마음이 끌린 것 아니겠어? 우리 휴센 씨는 생긴 거랑 달리 애들한테 약하니까.”

“닥쳐, 마이티!”

“저 봐, 저 봐. 얼굴 붉어진 거. 내 말이 맞지?”

“쯧쯧, 한동안 잠잠하더니만. 그 버릇 언제 또 발동하나 했다. 근데 저 애들한테 의사는 제대로 확인한 거야? 설마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온 건 아니지?”

“그야……!”

소리치던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우리가 승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그 행동에서 모든 정황을 파악한 듯, 사람들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우와! 정말이야, 단장?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건 납치라고!”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보나 마나 또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했겠지!”

“이봐, 정말 미안하다. 우리 단장이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나는 허둥지둥 사과를 건네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하, 괜찮아요. 확실하게 거절하지 못한 저희 탓도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 우리가 저 인간을 아는데, 제대로 거절했어도 무시하고 끌고 왔을걸?”

“아무렴,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 애초에 매튜도 그렇게 해서 우리 단원이 된 거잖아. 나 참, 저 또래의 애들이 다 쉐리처럼 보여서 걱정이 된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말이야. 그만두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내 저러다 언젠가 신고 당하는 날이 오지 싶다.”

‘매튜라면…….’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트로웰(이라 추정되는 소년)을 바라봤다.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그가 불쑥 질문을 건네 왔다.

“이름은?”

“……어?”

“네 이름.”

당황하는 나를 향해 그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동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매튜? 네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다 보이고.”

“그러게. 이름을 묻는 일도 거의 없잖아?”

“혹시 아는 애야?”

쏟아지는 질문들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더욱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속으로 더 긴장했다.

“아, 저기…… 나는, 엘……이라고 하는데……?”

그 순간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그의 입술이 뚜렷한 호선을 그렸다. 그것만으로 그의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메마른 땅에서 만개한 꽃이 피어오른 느낌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어?”

그와 동시에 나는 일순 몸의 균형을 잃었다. 갑자기 무언가 날 잡아당긴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가 내 몸을 덥석 끌어안은 상태였다.

“오랜만이야, 엘. 보고 싶었어.”

“……!”

‘역시! 트로웰이 맞았잖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릅뜬 눈으로 굳어진 내게 소년, 아니 트로웰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야 내가 알던 그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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