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5화 (45/608)

제45화

내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물을 다 마신 아이는 곤한 얼굴로 잠에 빠져들었다. 여인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옆에 눕히곤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물을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 아들을 치료까지 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네? 사제요? 아, 네에…… 아하하.”

아이를 치료했기 때문일까. 여인은 나를 사제로 오해한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정령왕이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어색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이름이 귓가에 들려왔다.

“설마 이런 곳에서 엘뤼엔 님의 사제를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이걸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예? 엘뤼엔이요?”

설마 내가 아는 그 엘뤼엔을 말하는 건가?

친숙한 이름이 반갑긴 했지만 한편으론 황당한 심정이었다.

사제라고 생각하는 건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이곳에서 특이한 능력으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신관이나 마법사들뿐이니깐. 하지만 왜 그게 하필이면 그게 엘뤼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치료와는 전혀 상관없는 형벌의 신이 아닌가.

그런데 이 의문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결되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사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형벌의 신 엘뤼엔의 사제들이 치료 순례를 다닌다고 했었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이사나는 여인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엘뤼엔은 비교적 최근에 신도수가 늘어가고 있는 신이야. 처음 신전이 세워진 게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각지에서 그를 섬기는 신도들이 무서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지. 그 이유에 매년 그의 사제들이 치료 순례를 돌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그래서 날 엘뤼엔의 사제로?”

“응, 치료능력을 지닌 사제들이 흔하지 않은 데다, 무료로 고쳐 주는 곳도 거의 없거든. 일단 저 여인에겐 그렇게 알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여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연방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저기, 그만 일어나세요. 감사 인사는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나는 여인의 몸을 억지로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가늘고 야윈 몸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여인 또한 오래도록 굶주린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아이의 몸은 나았지만 그들에겐 앞으로가 더 문제일 것이다. 지금처럼 굶주리는 상태가 계속되면 오히려 고통만 이어질 뿐이니까.

“남편이 없다고 하셨죠? 살고 계신 곳은 어디세요? 아이와 함께 몸을 의탁할 곳은?”

“그, 그건…….”

“아무것도 없나요?”

내 말에 여인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아이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구걸해서 먹고사는 형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주머니 안에서 금으로 된 조약돌을 몇 개 꺼내어 여인에게 내밀었다. 사실 보석 꽃을 건넬까 했지만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오히려 이 모자에게 화가 될까 봐 나름 자중한 것이었다.

“이것, 드릴게요.”

“……예, 예에?”

“아이 이름이 레이라고 했죠? 어쩌면 작은 집 정도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은 돈은 아껴 두셨다가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도 사 주시고 깨끗한 옷도 입히세요.”

금을 본 여인은 아연실색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치료해 주신 것만으로도 평생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런 귀한 걸 받을 수는……!”

“괜찮아요. 그냥 받으세요. 모처럼 나았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또 병들잖아요.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머물 만한 곳도 찾으셔야죠.”

“하,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나는 극구 거부하는 여인의 손에 억지로 금덩이들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손안에 들린 금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북받친 것 같았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여인은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듬었다. 그리곤 내게 깊숙이 절하며 말했다.

“오늘 저희 모자에게 내려 주신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제게 은인의 성함을 알려 주십시오. 훗날 아이가 자라면 반드시 은인을 찾아가 갚게 하겠습니다. 아직 마르고 볼품없지만, 부친이 살아생전 뼈대 굵은 용병이었습니다. 장성하면 어지간한 성인 몫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아,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히 이 은혜를 받을 면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정말 괜찮은데……. 저는 한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게 될 거라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희 모자를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하는 몹쓸 사람들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름을 알려 주는 거야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애칭을 알려 주면 되니까), 아이에게 훗날 은혜를 갚게 한다니 섣불리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저 여인의 기세를 보니 정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있지도 않은 사제를 찾겠답시고 전국을 돌아다니게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본명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미치겠네, 이걸 어쩌지?’

그때였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사나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동그란 메달이 달린 체인 목걸이였다. 이사나는 그것을 잠든 아이의 목에 걸어 주며 말했다.

“훗날 아이가 장성하면 수도로 가게 하세요. 이 목걸이를 알아보는 자들이 아이가 찾아갈 곳을 일러 줄 겁니다.”

“그, 그곳으로 가면 뵐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어머니의 인품을 보니 아이의 장래를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장차 훌륭하게 장성해서 찾아올 아이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목걸이를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선 안 됩니다. 이 점을 미리 약조해 주십시오.”

“야, 약조하겠습니다, 나으리! 결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필사적인 대답에 이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연줄을 잡았는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귀중한 목걸이다. 황제 본인이나, 적어도 황실을 뜻하는 물건임이 분명했다.

저런 물건을 들고 나타난 사람을 황성에서 홀대할 리도 없지만,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이사나가 소일거리를 내줄 리도 없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황성에서 일하는 것이니 아이의 입장에선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 황성이란 말 그대로 꿈의 직장일 테니까. 한마디로 출세로 가는 보증수표인 셈이었다.

그렇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 스쳤다. 혹시 중간에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황제인 이사나가 지니던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목걸이는 그냥 보기에도 무척 값비싸 보였다. 아무리 조심히 보관해도 누군가 작정하고 훔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만약 장물이 되어 뒷세계에 돌아다니게 되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내 기분이 정령들에게도 전달이 된 모양이다. 문득 주변을 맴돌던 나이아스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왕이시여, 제가 목걸이 안에 들어가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어? 목걸이에?”

―예! 제가 때가 이를 때까지 이 목걸이를 지키겠어요!

대답하는 나이아스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물론 귀여운 얼굴 때문에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이었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도.

정령이 깃든 물건은 스스로 의지를 지닌다. 즉, 잃어버리거나 도난을 당해도 본래의 소유주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지난번 페리스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지식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흐음, 그래. 그거 괜찮네.”

“응? 엘,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 별거 아니야.”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사나에게 생글 웃어 준 다음, 잠든 아이를 살피는 척하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 틈에 나이아스가 그 안에 깃들도록 했다.

“잘 부탁해.”

―맡겨 주세요! 따개비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목걸이 안에서 나이아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는 곤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으면 이 아이는 훗날 정령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령이 깃든 물건을 소지하면 친화력 쌓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목걸이에 깃든 나이아스가 아이에게 계약을 청하게 될 것이다.

‘좋아, 완벽해.’

나는 속으로 마음껏 자화자찬하며 뿌듯해했다.

아직 먼 미래였지만, 말쑥이 성장한 아이가 정령사가 되어 이사나를 찾아올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들떴다.

* * *

여인과 헤어진 후 나와 이사나는 다시 새 물을 채워 병사에게 돌아갔다. 사실 그냥 무시하고 가 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혹시 후환이 생길지 모르니 마지막 선심을 쓰기로 한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나무통을 건네받는 병사의 표정은 무척 험악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그래 봤자 후드 때문에 잘 보이진 않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지금 냇가 쪽이 난리가 났는데.”

“난리라니?”

“갑자기 냇가에서 파도가 일어나서 사람들을 덮쳤지 뭐예요? 그래서 줄이고 뭐고 전부 엉망이 됐어요.”

내 말에 병사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말이 돼? 바다도 아니고 고작 시냇가에서 무슨 파도가 일어나? 게다가 그게 사람을 덮쳐? 너 이 자식, 어디서 농땡이 치고 와선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꾸며냈겠죠.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겠어요?”

“……그럼 정말이라고?”

“못 미더우시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면 되잖아요.”

병사는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곤 이사나와 함께 멀찍이 물러섰다.

이미 병사는 우리에게서 관심이 떠난 듯 통을 들고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꿀꺽꿀꺽 목울대를 울려 가며 물을 삼킨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뗐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우와, 여기 물맛 굉장한데? 엄청 시원하고 비린내도 없어.”

“그래?”

“응, 한번 마셔 봐.”

정령왕인 내가 직접 채운 물이니 맛이 좋은 것은 당연했다. 물통을 넘겨받은 동료 병사는 망설임 없이 물을 마셨다. 그리고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어, 진짜네. 무슨 냇물이 깊은 산 속에서 먹는 계곡물보다 더 청량하지?”

“그 정도야? 나도 줘.”

“나도, 나도.”

삽시간에 그의 주위는 동료 병사들로 가득해졌다. 저래서야 가득 채운 물이 동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지체했다간 또 붙잡힐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얼른 이사나를 재촉했다.

“얼른 여길 떠나자.”

“응.”

이윽고 동구 밖을 벗어날 때까지 우리를 붙잡거나 불러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나에 비해 이사나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왜 그래, 이사나?”

“으응. 그냥 좀 답답해져서.”

“답답하다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여인처럼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무슨 고민을 하는 건가 했더니 계속 그 부분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친인 선황이 백성을 굉장히 위했다더니, 이사나도 그대로 닮은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이런 성격이니 기사들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사나를 구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이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

“음, 그거 말이야. 안 그래도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해결 방안이 있다는 거야?”

흥분을 담은 목소리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모든 일은 수요가 있어야 공급할 수 있는 법이거든. 케이들이 그러는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비가 내릴 때를 기다렸다가 빗물을 받아 생활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비를 자주 내려 주면 되지 않을까? 비가 잦으면 그만큼 물을 살 필요를 못 느낄 테고, 그럼 귀족들 역시 더 이상 판매를 고수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게다가 우리가 모든 마을을 다 돌아볼 순 없잖아.”

“하하,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돼. 그냥 여기서도 전국에 비를 내릴 수 있거든.”

“뭐? 정말?”

“당연하지. 난 정령왕이잖아. 전국이 아니라 전 대륙에 내리는 것도 가능한데?”

이사나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어때? 괜찮은 방법 같지 않아?”

“으응! 난 찬성이야. 하지만 비가 자주 내리면 그것도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 강이 범람한다든가…….”

“그렇게 안 되도록 조절하면 되니까 괜찮아. 아, 그래. 아예 기간을 정해 두고 비를 내릴까? 삼사일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에 아주 짧게 폭우를 퍼붓는 거야. 그럼 사람들이 물을 받아 두기도 더 편하겠지. 강이 범람할 일도 없고.”

“그, 그래도 돼? 똑같은 시간에 비가 내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라고 하는 거야.”

“뭐?”

당황한 이사나를 향해 나는 씩 웃어 주며 대답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꾸준히 정해진 기간, 정해진 시간에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생각해 봐. 당연히 누군가 의도적으로 벌이는 일이라는 걸 깨닫지 않겠어? 더불어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엄청난 존재라고 생각하겠지. 그럼 지금까지 자기들 맘대로 물을 팔던 녀석들이 겁을 먹게 될 거고, 좀 더 빨리 독점 행위를 중단하게 될지도 몰라.”

“와아, 굉장해, 엘.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사나는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저기, 엘. 케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을까?”

“기사들에게?”

“응, 우리가 세운 계획이니까 그들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긴…… 흠. 그럼 네 힘 좀 잠깐 빌려도 돼, 이사나? 조금 어지러울지도 몰라.”

“응, 괜찮아. 근데 뭘 하려고?”

나는 대답 대신 이사나의 마나를 끌어와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를 소환했다. 그러자 주위를 맴돌고 있던 자연체의 나이아스 중 한 마리가 퐁 하고 내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기운의 소모에 휘청거리면서도 이사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에? 뭐, 뭐야? 정령?”

“응,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라고 해. 귀엽지? 방금 네 마나를 빌어서 소환했어.”

“헤에, 그렇구나.”

그는 한참 동안 나이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기도 하거니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테니 신기한 것이 당연했다.

“자아, 나이아스. 부탁한다.”

나의 의지를 읽은 나이아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아마 녀석은 기사들 앞에 도착하자마자 물로 된 편지를 펼쳐 보일 것이다. 갑자기 허공을 수놓는 글귀에 기사들이 놀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사나는 돌연 정령이 사라진 것이 그저 아쉬운 표정이었다.

“방금 뭘 한 거야, 엘?”

“나이아스 편으로 소식을 전달했어. 이제 기사들도 우리 계획을 알게 될 거야.”

“와아, 정말? 정령으로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처음 알았어.”

나는 감탄하는 이사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정령은 시큐엘이었다. 중하급의 정령과는 달리 상급은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이사나의 마나로는 시큐엘은커녕 중급 정령인 운디네조차 소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주제에 정령왕인 날 소환하다니.

억수로 운이 좋다는 건 이사나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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