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4화 (44/608)

제44화

“……저기요, 물을 사려면 돈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저희가 가난해서 돈이 없거든요. 물을 길으러 갈 순 있는데 이대로 가면 분명 쫓겨날 거예요.”

“쯧, 세트니오 백작님이 시켜서 왔다고 해.”

“하지만 안 믿어 주시면 어떡해요.”

“허어, 이거 꽤 당돌한 녀석이네. 자, 옜다.”

병사는 품을 뒤적이더니 반짝이는 무언가를 내게 던졌다. 구리로 된 동전이었는데 양면에 각각 제국의 문양과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일 실링?”

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이 제국에서 구리는 가장 낮은 가치의 주화를 만들 때 쓰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폐를 실링이라고 부르는데, 오백 실링의 가치가 일 실버에 겨우 해당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일 실링은 푼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인 것이다. 물의 거래가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뭐야, 돈 줬잖아. 이제 불만 없지?”

“하지만 이걸로는…….”

“그래서 가기 싫다는 거냐?”

“아, 아뇨! 갈게요!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라이!”

나는 병사의 눈빛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얼른 이사나를 잡아끌었다. 얼결에 따라오면서도 이사나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가득했다. 녀석은 병사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 왜 그랬어? 굳이 돈은 안 받아도 되잖아?”

“물이 꽤 비싸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순순히 가면 의심할지도 모르잖아.”

“아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사나는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쑥스러운 느낌에 나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냇가까지 다녀와 볼까? 실태도 확인해 볼 겸.”

“실태?”

“지난번엔 대충 봐서 자세히 살펴보질 못했거든.”

잠시 후 도착한 냇가 앞에는 때마침 물을 길으러 온 행렬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줄을 서는 대신 가격이 적힌 팻말부터 확인했다. 그 안에 적힌 글자는 나를 경악하게 하기 충분했다.

식수 1동이당―20실링

허드렛물 1동이당―5실링

(단, 허드렛물은 최소 10동이부터 구입 가능)]

‘……헐, 똑같은 물인데 용도에 따라 가격이 다르단 말이야?’

심지어 용도를 속이고 싸게 구입해 갈 것을 우려했는지 허드렛물은 구입양이 정해져 있기까지 했다. 이사나 역시 놀랐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팻말 앞에선 무장한 병사들이 서서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간혹 몇몇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물을 긷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빨래 더미를 가져와 마음껏 냇가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제지를 가해야 할 병사들은 마치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물을 사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가의 하인들이야.”

그때 이사나가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확신을 담은 그의 어조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복장을 보면 알 수 있어. 직업과 신분에 따라 정해진 옷차림이 있거든. 저들의 차림은 귀족가에 고용된 하인들이 입는 옷이야.”

‘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것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도 옛날엔 옷차림으로 직업과 신분을 구분했다고 들었다. 현대처럼 다양한 직종이 없는 시대이니 특히 구별하기가 더 쉬울 터였다.

설명을 마친 이사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서는 돈을 받으면서 정작 부유한 그들에겐 무료로 쓰게 하다니……. 대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거지?”

“씁쓸하지만 이런 게 현실이지. 권력자라는 게 다 그렇잖아. 세상은 원래 다 강자를 위주로 돌아가니까.”

“하지만 아버지께서 바라시고 만들어 가던 세상은 이런 게 아니었어. 어떡하지, 엘? 난…… 내가 용서가 안 돼. 내가 그때 그렇게 한심한 생활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떨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된 거 아냐? 이제부터 고쳐 나가면 되지.”

“하지만…….”

“좋게 생각해. 오히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실태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기합이나 단단히 넣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니까.”

내 말에 이사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때 갑자기 냇가 쪽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돌아본 나는 병사들이 누군가와 승강이를 벌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대는 유아를 업고 있는 허름한 행색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간곡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으리,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죽고 이 어린 것 하나 키우며 혼자 사는 여자가 무슨 힘으로 하루아침에 이십 실링이나 하는 금액을 마련하겠습니까. 모쪼록 자비를 베푸셔서 물 좀 마시게 해 주세요.”

“글쎄, 몇 번을 말해도 안 된다니까! 물을 마시고 싶다면 돈을 가져와! 그전엔 절대 내줄 수 없다!”

아마도 물을 구하러 온 여인이 돈을 내지 못하자 병사들이 내쫓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발, 나으리! 한 모금이라도 좋습니다. 벌써 삼 일이나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만이라도 제발…….”

여인은 비쩍 마른 손으로 병사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병사가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더니, 거친 동작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아악!”

“빌어먹을! 어디서 거지 년이 찾아와 행패야? 애새끼와 함께 당장 세상 하직하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네년의 더러운 입을 적셔 줄 자비로운 물 따윈 없으니까!”

쥐고 있던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을 점령한 분노에 두 눈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에, 엘?”

“잠깐 여기서 기다려, 이사나.”

나는 당황한 이사나를 내버려 둔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쓰러진 여인은 병사에게 걷어차인 충격으로 연방 기침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등 뒤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급히 앞으로 안아 들었다.

아이는 울 힘도 없는지 색색거리며 작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데, 급기야 풀썩 고개를 뒤로 꺾더니 눈동자를 하얗게 뒤집었다. 아이의 상태가 이상해지자 여인이 다시 남자의 바지춤을 붙잡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이 불쌍한 어린 것을 봐서라도 제발! 제발, 나으리!”

“아니, 이년이 그래도?”

병사는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거라 예상했는지 여인은 아이를 끌어안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 즉시 나는 냇가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잔잔하던 시냇물은 나의 의지에 따라 거대한 장벽처럼 물결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현상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헉! 저, 저게 뭐야?”

“으아악! 모두 피해!”

물결은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덮쳤다. 행렬이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어느새 물바다가 된 상태였다. 그중 몇 사람은 냇가로 휩쓸려 갔지만 애초에 수위가 깊지 않으니 죽진 않을 것이다.

나는 모두가 정신이 없는 상황을 틈타 여인과 아이를 구해낸 다음, 이사나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볍게 이동했다.

멀찍이서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한 이사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 방금…….”

“아아― 경치 좋다. 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그치?”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 말에 멍하니 있던 이사나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진짜 멋있었어. 최고야, 엘.”

“헤헤, 그래?”

나는 품 안에 있는 여인과 아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들에 그녀는 잔뜩 겁먹은 기색이었다.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경계하는 모습을 본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누, 누구신가요? 저를 왜…….”

“무서워하지 마세요. 도와 드리려는 것뿐이니까요.”

그때 다른 쪽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소식을 듣고 책임자가 달려온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기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대, 대장! 갑자기 물이…….”

“빅터와 웨인이 물에 빠졌습니다!”

“이 바보 자식들! 무슨 일을 이렇게 해? 당장 물에 휩쓸린 놈들부터 찾아! 어서!”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부지한 사람들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물통을 채우기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이사나와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여인을 향해 말했다.

“일단 다른 곳으로 피하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 * *

우리가 이동한 곳은 마을 뒤편에 있는 허름한 공터였다. 그때까지도 여인은 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이사나와 시선을 교류했다. 구해 온 것까진 좋았는데 여인 쪽의 경계심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조차 난감했다. 하긴 방금 병사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뻔한 데다, 지금은 낯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왔으니 겁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아, 그렇지. 일단 물부터 줘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 이사나가 나무통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트니오 백작의 병사가 물을 길어 오라며 던져 줬던 바로 그 나무통이었다. 나는 그 안에 물을 채운 다음 여인을 향해 내밀었다.

“자, 여기요.”

“……예?”

“아까 물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여인은 내가 내민 통 안에 담긴 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 이걸 제게……?”

“네, 부족하면 더 드릴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제야 여인은 앞으로 다가와 통 속의 물을 허겁지겁 마시기 시작했다.

“천천히 드세요. 물도 잘못 마시면 체한다구요.”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급하게 물을 들이켜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갈증이 심했으면 이렇게까지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목을 축였는지 여인은 이번엔 안고 있던 아이에게 물을 떠 넣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만큼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입안에 들어간 물은 대부분 삼켜지지 못하고 밖으로 다시 흘러나왔다. 아이가 좀처럼 물을 받아 마시지 못하자 다급해진 여인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레이, 이것 좀 마셔 보거라. 물이야. 우리 레이, 물이 마시고 싶다고 했었지? 물이야, 물! 자 보렴, 이렇게나 많아. 제발…… 아가야? 제발 한 모금만이라도…… 흑흑, 아가야…….”

나는 여인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아이를 살폈다.

이제 겨우 세 살 정도 되었을까? 보통 이 또래의 아이는 젖살이 올라 통통해야 정상인데, 레이란 아이는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배만은 비정상적으로 불룩했다. 흔히 기아지경에 처한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복수가 찬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찬 다음 아이의 불룩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울던 여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괜찮아질 거예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치료술을 시전했다. 그러자 나의 손에서부터 새하얀 물안개가 일어나 아이의 전신을 뒤덮었다.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아이를 떨어트리거나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물안개는 일어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전후의 광경은 분명히 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해 있던 복부는 보통의 평범한 아이들 정도로 수축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여인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 어떻게…….”

“엄마…….”

그때 의식을 차린 듯 아이의 두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은 여인은 거의 넋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레이! 오, 아가! 세상에! 내 아기, 레이! 정신이 드니? 엄마 알아보겠어?”

“엄마, 나 물…….”

“응, 그래! 엄마가 지금 바로 물을 줄게!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으음, 이게 바로 신에게 공로를 뺏기는 경우인가…….’

언젠가 트로웰이 투덜거렸던 것이 떠올라 나는 속으로 실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디에서 유희를 보내고 있는 걸까? 모습을 보지 못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소환된 이후론 다시 정령계에 가 보질 못했으니, 아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