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엘퀴네스와 단둘이 떠나라니?”
가늘게 벌어진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사나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케이와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전국에 저희의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저희와 함께 행동하시면 그만큼 폐하께서 발각되실 위험이 큽니다. 저희는 폐하를 지키기 위한 친위기사단. 폐하를 위험에 노출할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저희의 뜻을 알아주십시오.”
“아니,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계획은 예정대로, 모두 함께 떠난다.”
“폐하!”
“듣기 싫다! 아무리 위험해진다 해도 내가 그대들을 버릴 것 같은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대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이곳에 남는다 해서 저희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저희는 수도로 가서, 그곳에서 폐하께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그 말을 믿는다 하더냐! 지금 그대들이 수도에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것이 자결한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단 말이냐!”
“폐하! 어째서 알아주시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폐하께서 무사히 제위를 되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클모어 공국으로 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바로 황제 폐하가 아니십니까? 저희에게 내려진 수배령은 그곳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위험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저희는 결코 폐하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십시오!”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
“듣기 싫다고 말했다!”
단호한 음성에 기사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사나가 아무런 동요가 없자 이번엔 애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은 없어도 그 의미야 뻔하다. 나더러 이 녀석을 설득해 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앞서 케이가 내게 부탁한 부분이기도 했다.
‘……으음, 이런 상황에서 나서긴 싫은데.’
하지만 모른 척하기엔 그들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다. 결국 망설임 끝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기, 이사나.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기사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건 기사들에게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일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수배지에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16세가량의 어린 소년이 동행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어. 즉, 네가 있음으로 해서 역으로 기사들이 발각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그런……. 내가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거야. 수배지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네 또래의 소년이 있는지부터 확인할 테니까. 몰려다니는 거야 용병이든 뭐든 위장할 수 있지만 네 존재까진 감추지 못하잖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희가 떨어져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기사들도 괜찮을 거라고 하는데, 한번 믿어 보는 건 어때?”
“나, 나는…….”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때까지 단호하기만 하던 이사나의 음성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의 우렁찬 외침이 다시 이어졌다.
“통촉해 주십시오, 폐하!”
“폐하!”
“…….”
결국 한참을 밀고 당기던 지루한 감정싸움은 이사나의 패배로 끝났다. 기사들이 워낙 강경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이사나가 현실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녀석이라고 흩어지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들과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다. 나는 너무나 약한 황제구나. 나를 위하는 자들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주군이다. 이런 내가 그대들의 주군이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모든 기사의 염원이자 꿈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저희 염려는 하지 마시고, 부디 무사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미 한참 전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이사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녀석은 자신의 앞에 있던 케이를 와락 끌어안고 흐느꼈다.
“흐윽! 약속한다. 반드시…… 반드시 황성에 있는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 그러니 너희도 약속해라,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돌아오는 나를 환송하는 자리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크흡! 약속드리겠습니다, 폐하! 결코 다치지도, 죽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케이 드 세리크!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부디 다시 뵈올 날까지 강녕하십시오.”
“흐윽, 흑! 으흐흐흑!”
주변은 곡과 울먹임을 삼키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사나와 기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각각의 안전과 안위를 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돌연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상황.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내쫓기고 목숨을 잃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세계.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로 존재할 수 없는 나라.
그것은 지금껏 한국이라는 안정된 체제에만 익숙해져 있던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상황을 굉장히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저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승낙했던 이번 여정이 사실은 상당히 많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 걸린 목숨이 비단 이사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 *
그날은 새벽 무렵이 될 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않았다. 당장 내일 아침에 짐을 꾸려서 떠나야 했지만, 그렇다 보니 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사나와 기사들이 회상에 빠져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동굴 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밤하늘을 구경했다.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은 그 자체로 정취가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 나는 홀로 서서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런 내가 꽤 심각해 보였던지, 평소라면 득달같이 몰려들었을 나이아스들도 지금은 그저 관망하는 중이었다.
“엘퀴네스 님? 왜 이런 곳에 나와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웠다. 동굴 밖을 나온 페리스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아, 페리스. 으음,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간단한 자기혐오 중이랄까.”
“네? 자기혐오요?”
“아하하,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러는 페리스는요?”
“아, 저는 수통을 채우려고 나왔습니다. 내일 길을 떠나려면 지금 충분히 새 물을 보급해 둬야 하니까요. 엘퀴네스 님이 계실 때야 물이 부족할 일이 없겠지만, 이제부턴 알아서 해결해야 하잖습니까? 하하.”
그는 자신의 품 안에 들린 가죽으로 된 물 주머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두 개가 아니 걸 보면 본인 것만이 아니라 기사들 것까지 전부 챙겨 나온 모양이다.
“그 많은 걸 가져가서 혼자 어떻게 다 들고 돌아오려고요? 그냥 저한테 주세요. 제가 여기서 채워 드릴게요.”
“정말이십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페리스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수통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나한테 말을 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막상 받아 든 가죽 주머니의 크기가 생각보다 더 컸다. 적어도 이십 리터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본래는 술을 담글 때 쓰는 부대인데, 수통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 마을에 내려갔을 때 구입해 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부대가 다섯 개가 넘는다는 점이다. 거기에 개별용의 작은 수통들을 또 따로 구비하고 다닐 생각인 것 같았다. 하루 세끼를 물로만 때울 생각인가? 줄줄이 이어지는 수통의 행렬에 나는 조금 질린 기분으로 물었다.
“잠깐만요, 페리스. 이걸 전부 다 들고 다니려고요? 식량의 무게만도 상당할 텐데 짐이 이렇게 많으면 무겁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식수가 떨어질 때마다 보급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호수나 개울가 쪽은 감시망이 더 철저할 테고, 이런 산 속에선 물을 찾기도 쉽지 않으니 여유가 있을 때 많이 채워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무식한 짓을…….’
페리스는 진중한 학자 같은 타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무모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찬 다음 수통을 채우던 것을 멈췄다. 그러자 페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퀴네스 님?”
“으음, 저기요. 이럴 게 아니라 그냥 페리스가 물의 정령과 계약할 생각은 없어요? 일일이 물을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야 그게 편하잖아요.”
“예에? 물의 정령과 계약을요? 하지만 저는 바람의 정령사인데요.”
“바람과 물은 그다지 거스르지 않은 속성이라서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엔 페리스는 충분히 자질이 있거든요.”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놀란 페리스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처음 볼 때부터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다는 뜻이다.
하긴 지난 십 년 재앙 동안 모든 정령의 힘이 크게 축소된 상황에서도 바람의 중급 정령인 슈리엘을 소환해낼 정도니까, 자질적인 면으로만 따지면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상급 정령사가 됐어야 했다. 그리고 아마 상당히 가까운 시일 내에 그렇게 될 것이다. 딱히 누군가 알려 준 것은 아니지만, 난 자연스레 그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게 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보통 상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의 친화력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정도면 본인의 의지와 노력 여부에 따라 다른 속성(물론 상극이 아니란 전제하에)의 정령들도 소환할 수 있다는 것까지.
배우지도 않은 지식들이 속속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령왕으로서 점차 자각해 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아무튼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군요. 노력만 하면 된다니……. 그래도 어지간한 노력으론 어림도 없겠지요?”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페리스는 지금 당장도 가능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령왕인 제가 바로 옆에 있잖아요. 제가 당신의 몸에서 물에 대한 친화력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
이것 또한 저절로 터득한 사실이다.
그 순간 페리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말이네요. 실은 다른 속성의 정령들과도 계약해 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정령사들이 한 속성의 정령밖에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내심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해 보겠어요? 다만 바람의 정령을 다룰 때보다는 힘이 좀 들 거예요. 상성이 비슷하긴 해도 아주 똑같은 건 아니라서 약간 저항이 생기거든요.”
“상관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엘퀴네스 님!”
“좋아요, 그럼 이왕 해 보는 김에 시큐엘을 불러 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서 물의 친화력을 끌어 올릴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페리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예? 자, 잠깐만요, 엘퀴네스 님! 시큐엘이라면 상급 정령이잖습니까?”
“맞아요. 왜요?”
“왜, 왜냐니요. 저는 지금 바람의 정령도 중급밖에 다루질 못합니다만?”
“괜찮아요. 곧 그것도 상급이 될 테니까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질이 있다고 했잖아요. 괜찮으니까 어쨌든 절 믿고 소환주문을 외워 봐요.”
잠시간 주저하던 페리스는 곧 결심을 굳혔는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해 보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소환 의식을 여기서 하는 겁니까? 이곳엔 매개체로 할 만한 물이 없는데요. 게다가 시큐엘이라면 바다로 가야 하는 건 아닌지…….”
“바다는 왜요?”
“그, 그야 매개체가 커야 그만큼 의식에 집중하기가 쉬울 테니까요. 상급 정령일수록, 불러내기 위해선 온전히 그 정령의 속성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전 이사나 님이 그 작은 샘에서 엘퀴네스 님을 소환한 것도 이상하다고 여겼거든요.”
“하하, 그 녀석이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에요. 원래 이사나의 친화력으론 나이아스도 간신히 불러낼 수준인걸요.”
“예? 그런데 어떻게…….”
“특별한 기연이 닿았나 보죠. 아무튼 매개체라면 걱정할 것 없어요. 바다보다 더 효과가 좋은 환경이 바로 눈앞에 있잖아요.”
“에? 눈앞이요?”
“물의 정령왕인 저 말이에요. 제가 직접 도와주는데 이보다 훌륭한 매개체가 어딨어요?”
그제야 그 사실을 자각한 듯 페리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준비됐으면 이제 시작해 봐요.”
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하길 기다린 다음, 닿은 피부를 통해 천천히 물의 기운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흡!”
“집중해요, 페리스.”
내 말에 그는 눈을 더 질끈 감았다. 하지만 부들부들 흔들리는 몸의 떨림만은 멈추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굴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마도 그는 지금 바닷속 깊은 해저에 빠진 기분일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그의 몸을 감싼 물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기를 기다렸다. 그때 페리스의 몸 주변으로 찰랑거리는 물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소환 틀이 갖춰진 것이다.
“지금이에요.”
나는 곧장 신호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페리스가 입술을 벌리고 소리쳤다.
“태초의 지배자께 허락을 구하노니. 여기 이곳 자격을 갖춘 이가 물의 유지를 이어 가길 감히 바라나이다. 그대 바다의 시큐엘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쏴아아―!
그 순간 그의 주변을 맴돌던 물의 파동들이 분수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랐는지 페리스가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급격한 마나의 소모로 인해 그의 얼굴은 탈색한 듯이 창백해져 있었다.
한곳에 뭉쳐진 물덩이는 이윽고 풍성한 갈기를 휘날리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다. 시큐엘이 소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