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1화 (41/608)

제41화

“다들 수고하셨어요. 이제 필요한 건 전부 구했으니,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식당에서 나온 즉시, 나는 기사들과 함께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미 두 손마다 여기저기서 사들인 식료품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반나절 이상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모두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퀴네스 님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휴우, 그나저나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잊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니. 다시 생각해도 창피해서 얼굴에 불이 날 지경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기사들의 젊은 대장인 케이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의식을 차린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당황했다. 부상이 워낙 심해 당연히 죽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사나가 직접 나서서 그간의 상황을 전부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내 지휘에 따라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하, 잘하시던데 뭘 그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덕분에 아무도 제 말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저희가 나간 후에 딱히 별다른 일은 없으셨던 겁니까?”

“네. 전부 다 순조로웠어요. 식당 주인이 좀 이상한 제안을 하긴 했지만요.”

“이상한 제안이라니요?”

“원하면 물도 구해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수통을 채워 주겠다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마치 사다 주겠다는 말처럼 들리더라고요.”

그러자 케이를 비롯한 기사들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목 안에 껄끄러운 가시가 박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요?”

“으음, 엘퀴네스 님. 그건 아마 당신이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은 지난 십 년 가뭄 이후로 물이 귀해져 버렸거든요. 일부라도 식수를 구하려면 마법사를 초빙해서 인공우를 뿌려야 하는데, 이 작업에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일정량의 세금을 받고 물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강이나 우물은 전부 마을의 유지나 영주들을 통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저기, 잠깐만요. 그때는 몰라도 지금은 물이 풍족할 텐데요? 그런데도 여전히 사고판다는 건가요?”

이미 이 땅에는 몇 차례나 큰 비가 내렸다. 오염된 바다는 전부 정화했고, 바닥을 드러내거나 사라졌던 강과 샘도 대부분 되돌아왔다. 내가 직접 한 일이니 틀릴 리가 없었다. 어이없는 심정으로 묻는 나에게 알렉이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미 고정된 판매 수익을 놓치기 싫은 귀족들이 행패를 부리는 겁니다. 가뭄은 끝났지만 평민들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들었습니다. 몰래 물을 훔치는 자는 큰 벌을 받기 때문에 강가 근처엔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그런 자를 신고하면 후한 상금을 주다 보니 포상금을 노리고 서로 감시하는 형국입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비가 자주 내린 덕분에 미리 빗물을 받아다가 다음 비가 올 때까지 생활을 연명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말도 안 돼. 그럼 농사 같은 건 어떻게 해요? 작물을 키우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일부 수로를 지원해 주는 대가로 추수 때 수확물을 제공받는 걸로…….”

“…….”

그들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즉시 나는 가까운 냇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위를 길게 둘러싼 나무 울타리와 커다란 팻말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엔 허락 없이 울타리를 넘어가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명시한 경고문과 물의 가격이 세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무장한 병사들이 입구 앞을 지키고 서 있기까지 했다.

“하…….”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아무 말도 못 한다더니 지금 내가 딱 그랬다. 케이와 알렉들도 무섭도록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사실 저희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이런 실태를 직접 본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직접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하군요.”

“이사나도 이 사실을 알아요?”

“으음, 아마 자세하게 아시진 못할 겁니다. 수도에선 곧장 규제가 풀린 데다, 지방 영주들이 황제 폐하께 올리는 사안은 대개 간단한 형태로 기록이 되거든요.”

“그나마도 제대로 국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었죠.”

그 말에 케이가 민망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황제 폐하라도, 이번만큼은 변명해 주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녀석을 탓할 생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몰래 살피던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돌아가요. 이 일에 대해선 따로 방안을 마련해 봐야겠어요.”

“방법이 있으십니까?”

“그야…….”

그때 문득 내 시야에 특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마을의 광장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설명하려던 것을 멈추고 케이를 향해 물었다.

“저건 뭐 하는 걸까요?”

“글쎄요.”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곧 무리 앞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갑옷에 붉은 망토를 걸친 기사였다. 그 순간 케이와 알렉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마신전의 신관기사입니다.”

“신관기사?”

“대공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아무래도 좋은 용무는 아닌 것 같군요.”

신관기사는 무리의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모두의 앞에서 펼쳐 보였다. 이윽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제국을 파멸에 빠트리려 하는 사악한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 이 수배령을 보고 의심이 가는 자를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길 바란다!”

그렇게 소리친 신관기사는 자신이 들고 있던 두루마기를 뒤쪽에 있던 벽에 붙이곤 몸을 돌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리의 틈을 파고들어 벽보의 내용을 확인했다.

-공고-

죄명

미친 황제를 부추겨 제국을 파멸에 빠트리려 하고, 그를 황궁 밖으로 도피시킨 죄.

수배 목록

이름: 케이 드 세리크.

신상: 황실 친위기사단 대장. 28세. 짙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이름: 알렉 드 이르완.

신상: 황실 친위기사. 23세. 금발, 초록색 눈동자.

이름: 페리스 드 젤로

신상: 바람의 중급 정령사. 21세. 황갈색 머리, 초록색 눈동자.

이상, 전원을 수배함.

금발에 푸른 눈동자인 16세 전후의 소년과 함께하는 무리를 발견하는 자는 지체 없이 신고 바람.

신고하는 자에겐 후한 포상을 내리겠음.

교황 하이오네

“헉……. 이게 뭐야?”

설마 이렇게 대놓고 수배령을 내릴 줄이야. 게다가 이사나를 납치한 것으로 포장한 것을 보니 더욱 기가 막혔다. 마찬가지로 벽보를 본 케이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국 대공의 힘이 여기까지 미쳤군요.”

“다들 알고 있었어요?”

“물론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가는 곳마다 동일한 내용의 수배령이 붙었으니까요.”

주변을 의식한 듯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모두 벽보에 적힌 기사들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쯧쯧쯧, 황실의 친위기사라는 자들이 미친 황제를 말리지는 않고 오히려 돕다니.”

“소문에 의하면 애초에 황제를 미치게 만든 자들이 저들이라던데?”

“허어,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원. 이제 겨우 살 만해졌나 싶었는데 좀처럼 사건이 끊이질 않는군.”

“이게 다 재앙의 황제가 내린 저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벽보의 내용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들로선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겠지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입장에선 썩 듣기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 심지어 선황에 대해 언급하는 말까지 나오자 기사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진정해라, 알렉.”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듯 앞으로 몸을 내밀던 알렉을 저지한 사람은 케이였다. 그의 만류에 알렉이 억울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장! 아무리 그래도 저건…….”

“이미 우리는 신상까지 전부 공개된 상태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간 바로 발각되고 말아. 한순간의 분을 못 참아 일을 망칠 셈이냐?”

“……큭!”

알렉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문득 옆쪽에서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근데 아까 식당에서 본 용병들 말이야. 왠지 인상착의가 여기 벽보의 설명이랑 좀 비슷하지 않아?”

‘우리 얘기다!’

나와 케이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알렉과 다른 기사 역시 뻣뻣하게 굳은 채 숨을 죽였다.

“아아, 그 사람들? 나도 기억나. 하지만 갈색이나 금발 머리 같은 건 흔하잖아. 게다가 말투도 상당히 거친 게 어딜 봐도 용병이었다고.”

“하지만 일행 중에 체구가 작은 사람이 하나 있었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나이가 좀 어려 보이던데.”

“……흠, 그건 그러네. 좀 수상하긴 하군.”

“신고하는 게 나을까?”

“…….”

다행히 그들은 아직 이쪽에까진 시선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나와 기사들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조용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워낙 몰려 있던 탓인지 빠르게 흩어지는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우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요.”

으슥한 곳에 이르자마자 나와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멀찍이 떨어진 광장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벽보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숨을 필요까진 없는 건데 그랬나요? 제가 후드를 벗으면 바로 의심이 풀렸을 텐데. 벽보에 적혀 있던 건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었잖아요.”

그러자 케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 자리에선 위기를 모면했더라도 곧장 감시가 붙었을 겁니다. 마신전의 신관기사들은 집요하니까요. 그들 중에선 저희의 얼굴을 아는 자들도 있을 테니 결국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음, 하긴 그렇군요.”

“어쨌든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수배령이 떨어졌으니 저희가 은신하고 있는 동굴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대장.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때 알렉이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자각한 표정이었다. 케이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발톱을 숨기고 몸을 움츠릴 때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오직 이사나 님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 지금은 단지 그것만 생각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은 몇 번이나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그때마다 그의 어깨를 다독이던 케이가 문득 나를 향해 말했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엘퀴네스 님.”

“부탁? 저한테요?”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는 곧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런 곳까지 수배령이 떨어졌다면, 이미 제국 안은 어딜 가도 전부 대공의 힘이 미쳤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야…… 당연히 도와 드리겠지만, 대체 뭘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좀처럼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난 이미 그들을 돕기로 한 상태가 아닌가. 이제 와 새삼스럽게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케이의 얼굴엔 결연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엘퀴네스 님, 모든 것이 당신의 뜻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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