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0화 (40/608)

제40화

문득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칠고 무식한 세 용병 역’ 중 하나를 맡았던 알렉이 이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자 그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머쓱하고 쑥스러운 기색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젠 아주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 얼굴을 보니 문득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이 떠올랐다.

“어? 황성으로 가는 게 아니었어?”

이사나를 돕기로 한 이후, 우리는 곧장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했다. 곧장 황성에 다시 돌아갈 거라고 예상한 나와 달리 이사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곳은 대공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데다, 추격자가 붙었기 때문에 섣불리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카웰 형님을 찾아갈 생각이야.”

“형님이라니?”

그러자 기사들이 입을 열었다.

“카웰 님이라면…… 폐하의 사촌이신 카웰 드 클모어 공작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륙의 다섯 번째 소드 마스터이자 철혈의 기사로 알려지신 그분 말입니다.”

“헤에, 소드 마스터라고?”

소드 마스터란 이곳 세상에서 검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모든 기사의 꿈이자,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호기심을 비치는 날 향해 이사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가 쪽의 사촌이야. 선대 가주였던 그의 부친은 선황의 가장 충실한 신하로, 과거 선황 폐하의 뜻을 받들어 몇 번이나 위험한 전장에 나섰던 인물이지. 그 아들인 카웰 형님 또한 부친과 똑같은 성정으로, 굉장히 우직한 데다 황실에 충성하는 사람이야. 선황 폐하께서 늘 믿어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

“그렇구나. 그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지?”

“응. 지금은 무엇보다 내 지지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카웰 형님이 다스리는 클모어 공국은 우리 스왈트 제국에 존재하는 공국 중에서 가장 크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곳이야. 게다가 그 개인적으로는 다른 제국의 황족들과 상당히 막역한 관계지. 특히 알폰프 제국의 현 황제와는 같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동기생이라고 들었어. 그가 내 편이 되어 주면 귀족원에서도 상당수가 회유될 거야.”

자랑스러운 사촌 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기쁜지 이사나는 잔뜩 들뜬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기사들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폐하……. 카웰 공작님은 벌써 몇 년간 공국 안에서 칩거 중인 상태가 아니십니까? 선황 폐하께 그러한 일이 있을 때조차 단 한 번도 기별이 없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칩거 기간이 너무 길어 이미 공국 안에선 그분의 병환이 깊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돈다고 들었습니다. 찾아가신다 해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클모어 공국은 몇 달 안에 닿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먼 데다, 가는 길목에 험한 지형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혹여 몸이라도 상하시면…….”

한마디씩 이어지는 말들엔 모두 이번 결정을 우려하는 내용뿐이었다. 그러나 이사나는 단번에 그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대들의 말도 틀리진 않다. 하지만 어차피 간단한 각오로 시작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지금 이 제국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예로부터 황실에 충실해 왔던 가문조차 설득할 수 없다면, 황성의 어느 귀족이 과연 나를 돌아보겠는가?”

“…….”

기사들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또한 그 점만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황궁 내에 이사나의 편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지금 현재 상황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인 그가 성을 탈출해 이곳에 이르기까지, 그를 도운 귀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될 때까지 기반을 잃은 이사나를 가여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깊숙이 황성을 장악한 대공을 대단하다 여겨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바로 눈앞에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작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은 벌써 며칠째 굶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 먹을 식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령인 나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엄연히 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인간이 아니던가.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그제야 이사나와 기사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아, 그렇지. 그럼 일단 가까운 마을에서 식량을 구해야…….”

“식량을 살 돈은 있어?”

“…….”

“게다가 설마 지금 그 차림으로 마을을 내려갈 생각은 아니겠지. 이 근처는 죄다 작은 민가뿐이거든? 수상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누군가 신고하지 않을까?”

“…….”

예상대로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몸에 바짝 달라붙는 단순한 형식의 면 옷이다. 본래는 갑옷 안에 받쳐 입는 것으로, 일종의 속옷 차림인 셈이었다. 기존에 착용하고 있던 갑옷들은 추격을 피하려고 오는 길에 전부 버렸다고 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선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상당히 남세스러운 행색이었다.

그나마 이사나와 정령사인 페리스의 차림은 평범했으나, 그런 두 사람도 딱히 팔아서 마련할 만한 장신구 같은 건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하게 도망쳤다고 하더니 미처 그런 부분들에까진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 고심 끝에 나는 이전에 수집해 둔 비장의 컬렉션(?)을 풀기로 결심했다. 에바스 에덴에서 채집한 보석 꽃을 개봉한 것이다.

“자, 받아.”

“……!”

“이, 이게 뭡니까, 엘퀴네스 님?”

내가 이사나에게 건넨 건 붉은 루비로 된 장미 한 송이였다. 반짝거리는 보석을 본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그것을 직접 건네받은 이사나는 아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상태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경비로 쓰기에 충분할까요?”

“추, 충분하다마다입니까. 제 생전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걸 설마 저희에게?”

“특별히 빌려 드리는 거예요. 하지만 부담은 갖지 마세요. 나중에 이사나한테 다 받아낼 생각이니까.”

“엘퀴네스 님…….”

기사들은 하나같이 감동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이 보석은 가치가 얼마 정도 될까요? 실은 전 이곳의 물가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거든요.”

“그, 글쎄요. 저희도 거기까지는…….”

“굉장히 귀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페리스가 냉큼 다가와 물었다. 그는 보석을 받아 들자마자 감탄한 얼굴로 연방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건 정말 훌륭한 보석이군요. 이렇게 선명한 광채와 정교한 장미꽃 모양이라니……. 이건 혹시 그 유명한 브리아의 보석이 아닙니까?”

“브리아의 보석이요?”

“예? 모르십니까? ‘브리아의 보석’은 여신의 전설을 지닌 보물입니다. 빛의 여신 브리아가 꽃을 따서 바구니에 넣고 가는 중에 실수로 바닥에 쏟았는데, 그것이 인간 세상에 떨어져서 보석이 되었다는 전설이죠. 그래서인지 지금 이것처럼 꽃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게다가 마치 살아 있는 꽃처럼 같은 종류라도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군요. 몹시 희귀해서 구하기 쉽지 않은 보석으로, 부호 중엔 브리아의 보석만 따로 수집하는 자들도 있을 정돕니다.”

음, 그거 아무래도 에바스 에덴의 꽃들인 것 같은데?

나는 내 짐작을 확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보석이 또 있을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처럼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령계에서 흘러 나간 꽃들이 사람들 사이에 그런 식으로 알려진 것이 분명했다.

“모조품은 몇 번 봤지만, 진품을 본 건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꽃이 보석으로 변한 것 같군요. 과연 그런 전설이 붙을 만도 하네요.”

‘그야 당연하지. 진짜 꽃이니까.’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이런 사실까진 알리진 않았다. 페리스나 기사들도 그저 전설의 보석을 직접 보게 된 기쁨만 누릴 뿐, 내가 그것을 지니게 된 경위까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령왕이니까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희귀하다면 가격도 꽤 비싸겠네요?”

“예, 물론입니다. 오히려 너무 비싸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변방 지역에서 현금으로 사들일 만한 부호가 있을지…….”

“그럼 가격을 많이 낮춰서 팔면 되죠. 그렇게 유명한 보석이라면 누구든 사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요?”

“으음, 그렇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처분하기엔 좀 아까워서 말입니다. 도시에 가면 적어도 백 골드 이상은 받을 수 있는 보석인데.”

페리스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래 봤자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난 그저 의아해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기사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배, 백 골드?”

“믿을 수가 없군요. 그 작은 보석 하나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그게 얼마인데요?”

황제의 직속 친위기사라면 어느 정도 화려한 생활에 익숙한 자들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짐작대로 이어진 페리스의 대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백 골드면 도시에서 작은 저택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돈입니다.”

“헉! 저, 저택을 산다구요?”

“예. 하지만 그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됩니다. 기본 가격이 백 골드이고, 경매가 붙으면 그보다 더 오르기도 하니까요. 브리아의 보석은 귀족 여성들이나 수집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높거든요. 특히 크기가 크고 특이한 꽃 모양일수록 가격이 비싼 편이지요. 어떤 것은 십만 골드에 거래가 될 정도입니다.”

“……!”

예상 수치를 가볍게 뛰어넘는 거액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도 보석은 고액의 물건이었다. 특히 다이아몬드 같은 건 크기와 종류에 따라 수십, 수백억을 호가하기도 했으니까.

여신의 보석으로 알려진 거라면 그보다 더한 가치를 지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꽃은 가급적 손대지 말자. 심장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속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그 뒤 잠시간의 의논 끝에 페리스가 마을에 내려가 보석을 처분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다른 사람들보다 물정에 밝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차림이 가장 멀쩡했기 때문이다.

혹여 비싼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것에 의심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페리스는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다. 브리아의 보석은 세공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대 문명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석을 습득하는 경위도 전부 천차만별이었다. 보물이 숨겨진 던전 안에서 구하기도 했고 밭을 갈다 흙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기도 했다. 오히려 행색이 초라한 만큼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으로 치부하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의 말대로 보석은 아무런 문제없이 수월하게 처분되었다. 비록 받은 금액은 본래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당분간 사용할 경비로는 충분했으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기사들이 갈아입을 여벌을 함께 준비해 왔고, 다음 날부터 우리는 본격적인 식량 구입 작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명의 인원을 뽑아 팀을 만든 뒤, 여행객인 것처럼 위장하여 여러 마을을 순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이사나는 동굴에 그대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풋내기 도련님 의뢰주와 세 명의 자유 용병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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