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이사나와 기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훤칠한 체구의 청년들이 저보다 한 자는 작은 소년에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이사나는 그런 기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어루만지며 다독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위화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그저 내 또래로만 보이던 그가 처음으로 황제라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때 문득 이사나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을 하면서도 그는 애써 의연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엘퀴네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탁?”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사나가 그에 관한 말을 먼저 꺼낼 줄은 몰랐으니까.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 가득 놀람과 감격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민망해진 듯 이사나는 뻣뻣해진 얼굴로 허둥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나는 일부러 더 생글생글 웃었다.
“헤에, 언제는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더니?”
“그, 그건……. 전부 내가 잘못했다. 내가 그대를 오해했다. 지금은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다.”
“흐음― 정말일까?”
“진심이다. 부디 날 용서해 주지 않겠나?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염치없는 행동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대가 필요하다. 내게 그대의 힘을 빌려 다오.”
“……으음, 좋아. 알았어.”
어차피 계약을 해지할 생각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더구나 상대 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볍게 승낙했다. 그에 이사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인가? 나를 용서해 주는 건가?”
“단, 내게도 조건이 있어.”
“조건?”
“우선 그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그만둘 것.”
“……아?”
내가 내세운 조건이 상당히 뜻밖이었는지 이사나는 당황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허를 찔린 듯 주춤하는 기색에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말투 일부러 쓰는 거지? 억지로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어울려.”
“뭐, 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는…….”
“변명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넌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지만, 처음 날 소환했을 땐 분명 그 말투가 아니었거든.”
이사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기사들도 연방 헛기침을 하는 것이, 그들 또한 녀석의 본래의 말투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제라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는데, 적어도 내 앞에선 그만둬라. 아까부터 계속 참아 보려고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더는 못 들어 주겠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그게 무슨 말이지?”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뜻이야. 아무튼 난 인간도 아니고, 네가 위엄이나 체면을 차릴 대상은 더더욱 아니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 편하게.”
“으음…….”
“왜? 싫어?”
“아, 아니. 알겠다. 그렇게 하지.”
“하지?”
“아, 알았어…….”
이사나는 급하게 더듬거리며 대답을 수정했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은 금방에라도 재가 되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 노골적인 순진한 반응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귀여운 녀석이네.’
한때는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역시 계약을 하길 잘했다 싶다. 왠지 녀석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쿠웅!
거대한 나무 잔이 테이블 위에 거칠게 떨어져 내렸다. 이미 안에 가득 차 있던 맥주는 약간의 거품을 남긴 채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동시에 방금 전 쓰디쓴 맥주를 단숨에 마셔 버린 남자가 거칠게 입술을 훔치며 소리쳤다.
“크아아! 이게 며칠 만의 포식이냐! 이제야 살 것 같다!”
그 앞에는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미 음식이라고 하기엔 잔해에 더 가까운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입과 탁자를 오가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 완전 좋아. 이거 다 먹고 배 터져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
“킥킥, 미친놈. 닥치고 더 먹기나 해. 한동안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테니까.”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아, 그건 내가 찍어 둔 거야! 손대지 마!”
“지랄!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지 이게 어디서 감히 선점질이야, 선점질이? 죽고 싶냐?”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은 새로 나온 요리를 마구 잡고 허겁지겁 삼켰다. 누가 보면 열흘은 족히 굶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선지 아까 전부터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 그러니까 내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뒤덮은 후드를 다시 고쳐 만졌다.
“싸우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이고, 의뢰주님. 저야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저 새끼가 성질을 자꾸 건드리네요. 의뢰주님은 저 자식이 얼마나 인간말종인지 모르실 겁니다. 언제고 한 번 두들겨 놔야 정신을 차릴걸요.”
“뭐가 어째, 이 새끼야? 니 방금 뭐라고 씨부렸냐?”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이게 끝까지 잘났다고 큰소리지!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덤벼!”
“해보자면 누가 겁날 줄 아냐?”
그들은 삼류 건달 같은 대사를 날리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투박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다른 손님들의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둡고 좁은 가게였지만, 한창 점심때였던지라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약간의 소란으로도 충분히 대형 사고로 번질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마침내 사색이 된 주인이 달려와 곤란한 표정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저어, 여러분. 다른 손님들께 피해가 갑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뭐야? 끼어들지 마, 주인장!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말이야! 이 검 하나로 대륙을 횡단한 검객이라고! 그 위험한 여인 부족국가 아마데우스에 들어가서도 당당히 살아 나온 사내다, 이 말이야!”
호기롭게 외친 남자의 말에 식당 주인이 겁을 먹은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던 다른 쪽의 남자는 오히려 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흥, 그래 봤자 미천한 삼류 용병밖에 더 되냐? 의뢰주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굶어 죽었을 판국이었으면서 허풍은.”
“아니, 그래도 이 자식이!”
아아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한 꼴인가? 본격적으로 가속된 다툼에 식당 주인의 시선이 냉큼 나를 향했다. 얼른 말리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네네, 이럴 땐 의뢰주인 제가 나서야지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부러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의뢰고 뭐고 다 그만둬 버릴 거예요. 그래도 멈추지 않을 건가요?”
과연 내 한마디의 타격이 컸는지 그들은 곧장 싸움을 멈췄다. 그리곤 투덜거리면서 얌전히 제자리에 착석했다.
“……쳇! 너 말이야. 의뢰인 때문에 산 줄 알아! 원 재수가 없으려니!”
“누가 할 소리! 닥치고 밥이나 마저 처먹어!”
그들은 다시 경쟁하듯 음식을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층 조용해지자 식당 주인이 내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난 즉시 그들을 먼저 밖에 나가 있게 한 후, 식당 주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친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 계산해 드릴까요?”
“예, 전부 계산해 주세요. 그리고 아까는 죄송했어요. 많이 시끄러우셨죠?”
“아닙니다. 오히려 손님께서 그분들을 진정시켜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행자이신 모양이죠? 아까 그분들은 용병들이신 것 같던데.”
“네, 자유 용병이라고 하더라고요. 먼 도시에 들를 일이 생겼는데 저 혼자선 불안해서 고용한 사람들이에요.”
그 말에 식당 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가끔 손님처럼 용병을 고용해서 여행하시는 분들을 뵙곤 하거든요. 그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용병들이란 하나같이 어쩜 저리 성정이 거친지. 그래도 손님의 일행분들은 생김새만 보면 꽤나 말끔하던데 말입니다.”
“아하하. 그, 그런가요? 뭐, 그래 봤자 용병이 어디 가겠어요.”
“허허, 그건 손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행동이며 말투는 딱 용병 그 자체더군요. 그나저나 여행에 필요한 것들은 좀 넉넉히 챙기셨습니까? 먼 도시에 가시는 거라면 식량도 많이 필요하실 텐데요. 저분들 식성을 보니 식비가 한두 푼 드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음, 사실은 그다지 구비를 하지 못했어요. 필요할 때마다 민가에 들러서 사들일 예정이었는데, 이 마을엔 적당한 상가가 존재하지 않더라구요.”
“저런, 이 근처는 죄다 작은 마을들뿐이라 상가를 찾기는 힘드실 겁니다.”
“윽, 그렇군요. 이걸 어쩌지. 여분 식량은 이제 거의 바닥났는데…….”
당황한 내 말투에 식당 주인은 안됐다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여행길을 나선, 사회 초년생을 보는 시선이다.
“그거 정말 난처하시겠군요. 괜찮다면 제가 좀 마련해 드릴까요? 마침 내일 장이 들어서는 날이라 여유가 있거든요.”
“어? 정말요? 살았다. 그럼 이왕 부탁드리는 김에 좀 많이 부탁드려도 돼요? 다섯 명이 일주일을 먹어도 될 수 있을 정도로요.”
“다섯 명이요?”
“일전에 인원수에 딱 맞춰 준비했더니 금방 바닥나 버렸거든요. 값은 넉넉히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식당 주인의 손에 슬쩍 금화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곳에서 금화 하나는 한 달 생활비를 거뜬히 상회하는 가치였다. 그것을 본 주인의 눈은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실은 조리에 필요한 기구들과 향신료도 좀 필요하거든요. 그것들도 같이 준비해 주시면 지금 이것과 같은 걸 하나 더 드릴게요.”
“어, 어이쿠! 다, 당연합지요. 지금 당장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 밖에 따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원하시면 물도 구해다 드릴 수 있습니다만.”
“네? 물이요? 아니요, 그건 괜찮아요. 지금 말씀드린 것만 부탁드릴게요.”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렁차게 대답한 주인은 빠르게 주방 저편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 그가 사라지는 즉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가…….’
다행히 역할대로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자 도련님’으로 보이는 것엔 성공한 것 같다. 처음엔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조금은 여유 있게 대화를 받아치게 되었다.
그래도 설마 물까지 얻어다 주겠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그 정도로 내가 어수룩해 보였나? 이렇게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니, 놀랄 노 자다.
‘뭐, 그래도 연기 대상 감으로 치면 저 사람들 정도까진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