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그래서, 황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요?”
차라리 계승권 다툼에서 밀려난 황자라고 했다면 어느 정도 납득했을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돌아봐도 옛날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잔이 벌어지는 일이 흔했으니까.
그런데 이사나는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미 제위에 오른 황제란다. 게다가 함께 있는 사람들은 황제를 지키는 황실의 직속 친위기사들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자들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야윈 흔적이 역력한 데다가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한 것이 분명한 몰골. 부상자조차 돌보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이 아닌가. 이건 누가 봐도 숨어 지내는 꼴이었다.
“그건…… 대공 때문입니다.”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한 건 알렉이었다. 생각지 못한 존재의 거론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대공이라면…….”
“마신전의 대신관이자 선황 폐하의 동생인 유카르테 대공 말입니다.”
“아아, 선황과 우애가 깊었다는 그 동생분 말이죠? 그럼 이사나에겐 숙부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그에 대해서 설명하는 순간, 나는 알렉을 포함한 모든 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광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알렉의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사나 황제 폐하를 주살하려 했습니다.”
“예? 주, 주살? 숙부가 조카를 죽이려고 했다고요?”
당황한 나를 향해 알렉은 지난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황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받은 이사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 탓에 대관식을 치르고 난 뒤에도 한동안 국정에 제대로 전념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자 그의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이 그 점을 빌미로 이사나를 비난했다. 재앙의 황제를 기리는 것은 곧 이 제국을 파멸로 이끄는 행위이니, 당장 그를 향한 애도를 중단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그것은 마신전의 대외적인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건국 때부터 황족이 죽으면 모든 백성들은 추도의 의미로 몇 개월간 검은 의복을 입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선황 폐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이유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셨지요. 그들은 선황 폐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곧 마신에 대한 배교 행위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요?”
“물론 황제께선 마신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황의 죽음은 백성들을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내린 비는 그 숭고한 정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 이미지 쇄신을 시도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삼 개월가량 애도의 기간을 정하려 하셨지요.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
“대공이 한밤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 겁니다.”
“……!”
그날도 이사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든 상태였다고 했다. 무방비했던 그는 새벽녘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습격 앞에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했다. 대공은 빠른 속도로 궁을 점거했고, 모두의 앞에서 섭정을 선포했다.
황제는 선황의 저주를 받아 미쳤다!
섭정왕의 자리에 오른 그가 세간에 공표한 이유였다.
“대공은 황제 폐하를 ‘마지막 탑’에 유폐하려 했습니다. ‘마지막 탑’은 예로부터 흉악한 죄를 짓거나, 미쳐 버린 황족을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나올 수가 없죠. 살아 있되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닌 겁니다. 그에 관해선 평소 폐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자들조차 다소 지나치다는 평이 만연했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에 나서서 반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요. 결국 저희가 폐하를 모시고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설명이 전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공에 대해서 들었을 때 받았던 인상과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무리 신탁의 내용이 그랬다 해도 자신의 형이잖아요. 심지어 우애가 깊은 형제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슬퍼하는 조카에게 그런 짓을…….”
“그건 전부 거짓이다.”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언제 돌아온 것인지 이사나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너…….”
“우애가 깊은 형제라는 건 단지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였을 뿐. 정말 형제를 위하는 사람이었다면, 신탁에 의문을 제기한 마신관들을 그렇게 죽이진 않았을 테지.”
“……신관들을 죽였다고? 같은 마신관을 말이야?”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페리스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정령왕께서도 이미 지적하셨지만 당시 신탁이 내려진 과정엔 이상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흔치 않은 신탁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려진 것도 그렇고, 신탁의 내용 또한 그러했지요.”
“신탁의 내용?”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적혀 있었으니까요.”
페리스의 말에 의하면 보통 신탁의 내용은 신어로 적혀 있거나, 그게 아니면 내용이 상당히 모호한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정확한 뜻을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처음 신탁이 공개되었을 때, 마신전 내에서조차 위조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대공의 검 앞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신이 내린 신탁을 의심했으니 배교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마신전은 배교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설령 도망친다 해도 끝까지 추격하여 죽이죠. 교리상 그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에게 선황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일말이라도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순 없었을 겁니다. 결국 그로 인해 선황 폐하를 살릴 길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으음, 확실히 좀 수상하네요. 그거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만약 정말로 신탁이 위조된 거고 범인이 대공이라면, 그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신관들을 죽인 걸 수도 있잖아요.”
“저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요?”
“반대로,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
그 순간 이어진 질문에 대답한 건 이사나였다. 잠시간 허무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감돌다 사라졌다.
“신탁이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폐하, 그건…….”
“선황께서 돌아가신 후 비가 내렸다. 우연이었다 해도 그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아니, 오히려 우연이었기에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
혹시 나와 페리스가 했던 대화를 전부 들었던 걸까? 망설임 없이 ‘우연’이란 단어를 거론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나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더불어 더 깊은 상실감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도.
이사나는 공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사실 이제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신탁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숙부가 한 일도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냐. 오히려 그는 대신관으로서, 신의 뜻을 가장 빠르게 파악하고 실행한 것뿐이다. 그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미련한 것일 뿐.”
“폐하…….”
“크흐흑!”
어느새 사방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설령 신탁이 맞는 거라고 해도, 대공이 옳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냐니. 신탁의 마지막 문구가 그거였다며. ‘오로지 죽음으로 속죄할 수 있다’고.”
내 대답에 이사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오히려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묻는 얼굴이다.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대답했다.
“으음, 그러니까…… 속죄란 건 내가 알기론 죄를 없앤다는 뜻이거든. 그러니까 신탁의 뜻대로 하면, 선황은 죽음을 맞이한 걸로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를 애도하는 것이 제국을 파멸로 이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오히려 추모하고 애도를 해야 하는 게 맞지. 그로 인해 대륙의 모든 사람이 살았으니까.”
“왜지? 그 반대가 아닌가? 애초에 아버지로 인해 이 땅에 재앙이…….”
“어쨌든 네 아버지가 죽기로 했기 때문에 그 재앙도 끝난 거잖아. 이사나, 너도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 선황의 죽음은 백성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고. 그냥 해 본 말이었던 거야?”
“그건…… 그렇지 않다.”
굳어진 대답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끝까지 흔들리지 마. 다들 죗값을 치렀다는 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왜 다른 부분은 보지 않아? 실제로 선황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죽는 것이 마땅할 만큼?”
“그, 그렇지 않아! 선황 폐하는……! 아버지께선 정말 좋은 분이셨다. 당신이 먹을 음식, 마실 물 하나도 아끼지 않고 백성들과 나누던 분이셨어.”
“거봐. 그럼 좋은 사람이라는 거잖아. 신탁이 말하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흉악한 범죄자가 되는 거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앙의 원인이 된 거라면 오히려 가엾게 여겨야지.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처형대에 오른 사람을 애도하는 게 왜 잘못이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공이란 사람이 너무한 거야.”
“…….”
이사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킨 건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가 마치 무언가에 크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도의적인 관점에서 봐도 말이지. 아버지를 여의고 울고 있는 어린 조카를 위로하진 못할망정, 미쳤다고 모함하는 숙부는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애초에 신탁에 의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신관들마저 베어 버릴 정도로 비정한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따를 필요는 없지. 넌 하나도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하지 않았다고…….”
“당연하지. 지금 상황만 봐도 넌 충분히 피해자야. 네가 억지로 이 불합리한 상황을 납득하려고 할 필요 없어.”
그건, 과거 친구였던 태진이 내게 자주 해 주던 말이었다. 동시에 그 시절의 날 유일하게 버티게 해 주던 말이기도 했다.
“네가 피해자야, 강지훈! 그러니까 울든지 화를 내든지 뭐라도 해! 병신같이 참고만 있지 말라고!”
늘 항상 듣기만 했던 말을 이제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러고 있으니 마치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사나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곧게 직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그때의 나처럼 결연한 빛을 품고 있었다.
“처음이다. 이런 말을 들은 건.”
“앗! 미안, 내가 남의 일에 너무 나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돼서 그만…….”
“아니, 그렇지 않다. 덕분에 확실히 정리가 되었으니까.”
“무슨 정리?”
“나의 입장.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
이사나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곤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지금까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미래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에 불과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일백에 가깝던 황실 친위기사단이 나를 지키다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지금 이곳에 있는 십여 명의 인원이 고작이지. 모두를 희생하여 이곳까지 왔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줄곧 고민했다.”
“폐, 폐하!”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것이 사실이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대들도 내가 그다지 좋은 황제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조하듯 웃으며 중얼거린 말에 기사들은 잠시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그전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선황의 죽음 이후 이사나가 국정을 돌보지 않은 건 단지 부친을 향한 애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상당히 많이 방황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홀로 방에 틀어박혀 울거나, 그렇지 않으면 술에 취해 고함을 치고 사람들을 향해 난동을 부렸다. 선황에 대해서 조금만 거론하는 말을 들으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기도 했다.
어린 황제의 방종한 행동은 황성 안의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기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훗날 대공이 미쳤다고 주장한 말에 가장 큰 힘을 싣기도 했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사나보다는 대공의 섭정을 지지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가. 백성들을 위하고 사랑했던 황제조차 버린 백성들을 과연 끌어안아야 하는가. 그렇게 해서 무슨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직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만 가득했다. 비단 숙부가 아니었어도 나는 같은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자 얼굴이 새파래진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그때는 그저 너무 혼란스러우셨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저희 모두가 폐하의 태자 시절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변했다 말씀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장이 쓰러졌을 때, 그를 버리지 않고 곧장 끌어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선황 폐하의 따스한 심성과 지혜로움을 그대로 이어받은, 저희의 하나뿐인 폐하시라는 것을요!”
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동굴 가득히 울려 퍼졌다. 나는 먹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사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렇다는데? 너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불민한 황제였다. 그때의 내겐 아무런 목적도, 살아갈 의미도 없었다. 만약 그대로 죽는다면 그걸로 상관없다고 여겼지.”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조금 전에 가야 할 길을 찾았다고 했잖아. 지금은 어떤데? 아직도 예전과 같은 생각이야?”
내 질문에 이사나는 조금 망설이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지금은…… 다르다. 이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모두 그대 덕분이다.”
“어? 나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
“아니. 그대는 선황 폐하의 죽음이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 자신도 그렇게 믿어 왔지만, 지금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확신하진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내 자리를 되찾을 거야. 되찾아서, 선황 폐하께서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그들을 지켜낼 거다. 결코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어.”
“폐, 폐하!”
“폐하!”
그 순간 모든 기사가 감격에 차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이사나는 후련해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모두. 지금까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여정은 지금까지보다 더 고되고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를 믿고 따라와 주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이 알렉!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그 길을 끝까지 따르며 지키겠나이다!”
마치 폭포수까지 쏟아지는 외침에 귀가 다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