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7화 (37/608)

제37화

“저어, 저희가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본 곳에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페리스와 알렉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저 녀석이 왜 저러는 건지 알아요?”

“으음, 안다고 해야 할까요. 부디 청하건대 정령왕께선 저분의 행동에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당부를 드렸는데도, 여전히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일이라니요?”

내가 의아해져서 묻자, 페리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대륙엔 세 개의 제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법제국으로 알려진 카터스와 검과 무위를 상징하는 알폰프 제국, 그리고 마신을 섬기는 신성제국 스왈트이지요. 지금 저희가 있는 이곳이 바로 마지막에 말씀드린 스왈트 제국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스왈트 제국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네요.”

“그러실 겁니다. 혹, 이사나 님의 정식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야 물론이죠. ‘이사나 란느 스왈트’ 였…… 에? 스왈트?”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자 페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께서 짐작하시는 그대롭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소수의 귀족만이 이름 뒤에 성을 붙일 수 있지요. 그중에서도 제국명을 성으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황실의 직계 혈통뿐입니다.”

“그, 그렇군요.”

귀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황족일 줄이야. 게다가 직계 혈통이라면 그중에서도 황자라는 소리일 것이다.

이제야 나이에 맞지 않게 과장된 이사나의 말투도, 그를 극진하게 모시는 사람들도 이해가 됐다. 기껏해야 가출한 도련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상당히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황자가 대체 왜 이런 동굴 속에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아니면 황위 다툼 같은 것에 휘말렸다거나.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이곳 스왈트 제국에서 일어난 일화입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계시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고 있으니까요. 마신을 섬기는 신성의 땅 스왈트 제국, 그리고 그곳에 존재한 비운의 황제에 대하여…….”

“비운의 황제?”

페리스는 먼 곳을 응시하듯 눈빛을 흐렸다.

왕정국가인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신성제국 스왈트는 교권과 황권이 분리된 체제로, 때때로 교황의 권력이 황제를 앞설 때가 많은 나라였다.

더구나 그들이 섬기는 마신 카노스는 사랑과 자비보다는 전투와 정복을 상징하는 존재. 제국의 실제적인 군사력이 대부분 교황의 휘하에 놓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황실에선 태어난 황손 중 한 명을 무조건 신전에 보내어 그곳에서 자라도록 했다. 그렇게 보내진 황손은 훗날 신전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는 인물로 성장했고, 때때로 교황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덕분에 신전과 황실은 오래도록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십 년 전, 그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

“재앙……이라면…….”

“정령왕께서도 아실 겁니다. 대륙에 십 년간 비가 내리지 않았던, 그 지독한 가뭄 말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었으니까.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간 살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페리스가 다시 회상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때는 재앙이 시작된 지 칠 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때쯤 이미 대륙은 어디를 가도 멀쩡한 작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샘과 강물은 모조리 바닥을 드러냈고, 마을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내던져졌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공공연히 제 자식을 버리거나 거리에 내다 팔았다. 심지어 서로 잡아먹는 일도 빈번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이사나의 아버지, 스왈트 제국의 황제 ‘카일 란느 스왈트’는 그 누구보다 마음 깊이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었다. 계속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지켜보다 못한 그는 친히 마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청했다. 현 재앙의 원인과 그 해결 방식을 그들이 믿는 신에게 구한 것이다.

지극히 신성제국다운 방식이었고, 아무도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신탁을 받는 의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종의 기우제 같은 행사였던 셈이다.

의식을 주관한 자는 황제의 친동생이자, 마신전의 대신관인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두 형제는 신탁을 받기 위해 일주일간 몸을 정갈히 하고 똑같이 금식했다. 평소 우애가 두텁기로 알려졌던 형제인 만큼, 그 자체만으로 백성들은 그들의 정성에 탄복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꽤나 엄청난 이야기를 페리스는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뒤이어 이어지는 설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다들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습니다. 신탁은 내리는 일이 정말 드물거든요. 평생을 마신에게 헌신하기로 한 대신관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골방에서 기도를 해도, 단 한 번 받기가 힘들 만큼 희박한 확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게다가 모두가 보는 눈앞에서 내려진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요.”

“기적이 일어난 거네요.”

“예, 그때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두 기뻐했지요. 드디어 기나긴 가뭄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페리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딘지 잔뜩 비틀리고 뒤엉킨 웃음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신탁이 무슨 내용이었기에…….”

“궁금하십니까?”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전부 물의 정령왕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 적혀 있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사나가 저렇게 날 싫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긴장한 나를 향해, 페리스는 그가 듣고 보았다는 신탁의 전문을 읊었다.

타오르는 열기의 눈물이 어둠의 지배자를 책망하도다.

수많은 재앙을 등에 업고 밟은 땅이 저주의 말을 내뱉도다.

백성의 피가 양식이 되어 더러운 숨을 이어 가나니.

오로지 죽음으로 속죄할 수 있으리라.

“……어둠의 지배자?”

“신탁은 대부분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관해선 여러 가지 해석으로 갈릴 수 있긴 합니다만, 보통 그 호칭이 가리키는 존재는 단 하나입니다.”

“그게 누구죠?”

“마신의 땅, 신성제국 스왈트의 황제를 은유적으로 부르는 호칭이지요.”

“……!”

뭐야, 그게. 그럼 설마 황제의 업보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뜻이야?

비단 나만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보아도 신탁의 내용은 노골적이었으니까.

짐작대로 그 자리에서 신탁의 내용을 보았던 수많은 사람이 모두 나와 동일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이 직접 저주를 받았다 지칭했다. 백성의 피를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가리킨 존재였다. 사람이 하나씩 죽어 갈 때마다 백성들은 서슴없이 황제를 원망했다. 마신전에서는 대대적으로 황제를 악귀라 칭하며, 앞으로 황실과 다른 길을 걸어 나갈 것을 선포했다.

심지어 타국에서조차 시비를 걸어오는 일이 잦았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전 대륙이 똑같이 겪은 재앙이었다. 이때에 내려진 신탁의 내용은 다른 제국에서도 주목하기 충분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왈트 제국은 점차 전 대륙의 공적이 되어 갔다.

전 대륙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소리쳤다. 스왈트 제국의 황제가 바로 이 끔찍한 재앙의 불씨였노라고!

백성을 위해 행했던 의식이, 황제 그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자, 잠깐만요. 그 신탁이란 것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왜 다들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내용을 받아들인 거죠? 진실이 아니면 어쩌려고요.”

“신탁이니까요. 신이 직접 내려 주시는 것인데 어찌 그 내용을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조작한 걸 수도 있잖아요?”

“저 역시 그 점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밝혀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게다가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재앙을 끝내야 한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뭄으로 고통을 당한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으로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거지요. 설령 부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그들에겐 그 모든 상황을 원망하고 탓할 장소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크흑!”

그러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했는지 페리스의 옆에 있던 알렉이 입술을 악물었다. 꽉 쥔 그의 손등은 이미 시퍼렇게 핏줄이 일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황제는 어떻게 됐어요?”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신탁에선 황제가 죽어야 이 모든 재앙이 끝난다고 되어 있었다. 결말이 뻔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페리스는 쓰게 웃음 지었다.

“……오래지 않아 시민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닥치는 대로 귀족들과 근위병들을 죽이고, 심지어 무고한 민가까지 습격했지요. 폭도들이 요구한 건 단 하나였습니다. 재앙의 근원인 황제를 처형하라는 거였죠. 그 조건을 이루지 않으면 황실 일가를 전부 몰살시키겠다고요.”

“그런…….”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신전에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더군요. 결국 폐하께선 모든 책임을 떠안으시고 스스로 형장에 서셨습니다.”

“……!”

형의 집행 방식은 교수형이었다. 이 또한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한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황제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밧줄 하나에 매달렸다. 그 모습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광기에 차 있는 상태였다.

당시의 과정을 설명하는 페리스의 두 눈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희는 모두 신탁의 내용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만은 다르셨지요. 그분은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끝날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던 분이셨으니, 그들의 분노와 원망을 감당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결국 어느 누구도 그분의 결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시던 황비 전하마저도 부군의 뒤를 따라 자결하셨지요.”

“……그게 대체 언제 일어난 일이죠?”

“불과 육 개월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

맙소사, 육 개월? 그럼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잖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일찍 태어났다면 사태가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번지진 않았을 것이다. 몇 년, 하다못해 몇 개월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하지만 그것은 달리 설명하면 결국 신탁이 이루어졌단 소리기도 했다. 황제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으니까.

아마 신탁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가 죽은 뒤 생긴 변화를 보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단 건 그 신탁이 진짜일 확률이 높다는 건데…….

‘……설마 마신은 내가 이맘때쯤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나? 대체 어떻게? 아니면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뿐인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나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페리스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정령왕께선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셨습니까?”

“……몰랐어요. 알았다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저희가 지금까지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해라니요?”

내 질문에 페리스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대륙의 자연을 관장하는 건 정령왕들의 일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전 이번 가뭄이 엘퀴네스 님께서 주관하셨거나, 적어도 당신의 동의하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에? 말도 안 돼요! 저희가 자연을 관장하는 건 맞지만 일부러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아요. 심지어 단 한 사람의 업보 때문이라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요? 게다가 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물의 정령들도 무사하지 못한다고요.”

“그럼 어째서 그토록 기나긴 가뭄이 이어졌던 겁니까? 게다가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비가 내린 건…….”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자세히 알려 드리긴 힘들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만 말씀드릴게요. 비를 내린 시기는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고요.”

“그럼, 신탁이 맞았다는 거군요.”

씁쓸한 페리스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에 관해선 나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늦게 태어난 것은 우연히 벌어진 사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저주에 의한 것이었다면?

‘으으, 진짜 모르겠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려 애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마신을 만나서 이번 일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이상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으음, 아무튼 제가 한 일은 아니에요. 그 점은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아니라고 하시니 안심했습니다.”

“당연하죠. 저 진짜 그런 정령 아니거든요. 어라? 잠깐만요! 그럼 혹시 이사나가 제게 적의를 보이는 것도?”

“아하하…….”

페리스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소환하던 당시, 이사나가 나를 붙들고 다그쳤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도.

왜 그랬어? 왜! 너 때문에 내가……! 우리 아버지가! 대체 왜!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그때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녀석의 얼굴에 서린 지독한 슬픔은 미처 읽어내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를 불러낸 이유였을 것이다. 책임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계를…… 아크아돈의 자연을 망가트린 이유를.

황제를 죽음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마신의 신탁이었지만, 애초에 그 모든 것은 가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내가 태어난 시기조차 그런 식으로 공교롭게 어긋나 버린 것인지.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로선 모든 것이 우연에 불과했지만, 그로 인해 부친을 잃은 이사나의 입장에선 내게 원망하는 마음이 쌓이는 것이 당연했다.

“저어, 정령왕이시여. 모쪼록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페리스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두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댄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페, 페리스?”

“부디 이사나 님과의 계약을 해지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

“감히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사나 님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십니다. 정령왕께서 일부러 재앙을 일으키신 게 아니란 걸 알게 되면 그분도 필히 생각을 달리하게 되실 겁니다. 제발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지금 그분께는 당신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고개를 든 페리스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러자 알렉과 다른 사람들 역시 덩달아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긍정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말리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이사나에게 쌓였던 불만은 이미 거의 사라진 상태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런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마냥 꽁한 마음을 품을 순 없지 않은가. 어쨌건 나 때문에 일어난 가뭄이었으니, 내 탓인 것이 맞기도 하고.

“으음, 알았어요. 일단은 이사나와 다시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볼게요.”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그러니까 다들 그만 일어나세요. 계속 그렇게 계시면 저도 좀 부담스럽거든요?”

그 말에 사람들은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하게 밝아진 그들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문득 궁금해진 점을 물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죠? 비운의 황제라곤 해도 어쨌건 그의 아들이라면 이사나도 꽤 높은 신분이란 거잖아요. 설마 사람들이 그에게까지 해코지를 한 건가요?”

“예? 아아, 그에 관해서도 물론 드릴 말씀이 많지만, 그전에 정령왕께서 한 가지 오해하신 것이 있습니다. 비운의 황제란 호칭은 돌아가신 폐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아니라고요?”

내 반문에 사람들은 서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설명을 잇는 걸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모두를 대표해서 알렉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애통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신탁이 이루어진 탓에 아직 선황께선 재앙의 불씨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불명예스럽게도 세간에선 재앙의 황제라 불리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그럼 비운의 황제란 건……?”

“그것은…… 이런 불의한 일로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신 현 황제 폐하께 붙여진 호칭입니다. 바로 저희의 주군이신, 이사나 님께 말이지요.”

“……에?”

자, 잠깐 기다려. 이사나가 뭐라고?

분명 두 귀로 들었건만 무엇 하나 제대로 매치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굳어 버린 나를 본 페리스가 얼굴 가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는 것이 늦었군요. 실은 이사나 님은 돌아가신 선황 폐하의 유일한 적자임과 동시에 첫 번째 계승권을 가진 태자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명실공히 스왈트 제국을 다스리는 군왕이시지요.”

“……!”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황자가 아니라 황제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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