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6화 (36/608)

제36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잔뜩 끓어오른 분위기가 소강 된 것은 뒤쪽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음성 덕분이었다. 돌아본 시야 끝엔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앉아 있는 이사나의 모습이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인지 녀석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손으로 눈을 비비는 중이었다.

그 순간 이어지는 사람들의 외침에 나는 깜짝 놀랐다.

“주군!”

‘헉? 주군?’

설마 저 작은 꼬마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주군이라고?

저들이 보이는 극진한 태도에서 이미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솔직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만한 호칭으로 불리려면 적어도 어느 한 마을의 영주이거나, 지휘관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부르는 쪽 역시 그저 평범한 신분일 리는 없었다. 대충 조사한 바로는 이 세계에서 주군을 모시는 사람은 주로 기사이거나 그에 준하는 계급의 사람들뿐이었다. 즉, 귀족의 신분인 것이다. 몸태에서 격식이 느껴진 이유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경하드립니다, 주군!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역시 하늘은 주군의 편이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경하라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 이사나는 곧 주변을 돌아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떻게 이곳에 돌아와 있는 것인가? 게다가 설마 지금…… 아침? 혹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건가?”

“어제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밤이 깊었을 때 샘을 찾아갔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페리스가 알려 준 정령 소환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였지. 가르쳐 준 주문을 외웠는데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눈을 떠보니 이곳이군.”

“달리 더 기억하시는 건 없으십니까? 가령 의식의 성공 여부라든가…….”

페리스의 질문에 이사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대로 쓰러진 것을 보면 아마도 소환은 실패한 모양이지.”

뭐야, 역시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군.

혹시나 싶긴 했지만 저렇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때와는 말투도 억양도 확연히 다르다. 아마 날 다그쳤을 때 쓰던 말투가 본래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 둔 것인가? 미안하다. 특히 페리스 그대에겐 정말 면목이 없구나. 미리 주의까지 들었으면서도 멋대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이사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페리스가 급히 그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아닙니다, 주군! 주군께선 의식에 성공하셨습니다!”

“뭣?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성공했다니?”

“주군께서 정령사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경하드립니다, 주군! 이 페리스, 지금 이 벅찬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 말도 안 된다, 페리스. 그대는 내가 소환하려고 한 존재가 누군지나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의 외침에 페리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정령왕의 소환을 시도하셨지요.”

“그, 그걸 어떻게……. 그런데도 내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살아 있는 증거가 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증거?”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페리스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시선을 보낸 이사나가 그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두 눈을 멀거니 깜빡거렸다.

“누……구?”

혹시 날 보면 뭔가 떠올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진짜 하나도 기억을 못 하네. 나 모르겠어?”

“……모르겠다. 그대는 누구지? 누구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며 내게 하대를 하는 건가? 무례한 자로군.”

“헐,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초면에 먼저 나한테 말 놓은 건 너거든?”

“내가?”

“그래. 다짜고짜 내 멱살을 휘어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데.”

그 말에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이사나를 응시했다. 그에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 무슨 소리를! 난 그대를 지금 처음 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는 건가?”

“지금 처음 보기는. 이미 만났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뿐이잖아. 생각이 안 난다고 그렇게 함부로 단언하면 되겠어? 게다가 너 나랑 계약까지 한 사이거든?”

“계약? 아까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혹시 그대가 무언가 착각을 하는 게 아닌가?”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 그냥 계약 파기하고 돌아가 버린다. 그래도 괜찮겠어?”

“헉! 아, 안 됩니다, 엘퀴네스 님!”

“고정하십시오!”

소리친 것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페리스와 기사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말한 나도 정말 파기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창백해진 사람들을 보니 내심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엘……퀴네스?”

고개를 든 녀석은 어딘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이제야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그대가…… 엘퀴네스라고? 설마 내가 소환에 성공했다는 것이…….”

“예! 주군! 여기 계신 분이 엘퀴네스 님이십니다. 주군께서 소환하신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 말입니다! 정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페리스가 애가 탄 얼굴로 물었지만 이사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조용히 굳어 있었을 뿐.

“저기, 이사나?”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녀석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설마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건 아니겠지? 불안한 기분에 나는 슬쩍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녀석이 불쑥 뜻 모를 이야기를 내뱉었다.

“꿈을 꿨었다.”

“어어? 꿈?”

다행히 이번엔 정신이 온전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둡고 캄캄한 밤이었다. 나는 온몸이 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 생전 처음 겪는 지독한 갈증이었다. 마침내 죽음을 예감했을 때, 누군가 갑자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목의 갈증이 가라앉았어. 난 상대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견한 건 아름다운 여신이었지. 그녀는 물빛의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신비로운 물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 바로 지금 그대처럼.”

“……그거 꿈 아니야. 그리고 나 여자 아니거든?”

“헉!”

“여자가 아니라고?”

어이, 왜 다들 거기서 놀라는 건데? 내가 노려보자 술렁임은 금세 잦아들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 만연했다.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그들을 한 번 더 노려봐 준 다음, 이사나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현실임을 깨닫고 나면 좀 더 사태를 명확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녀석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게 꿈이 아니라고…….”

“그래, 꿈 아니야. 내가 네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을 때, 넌 온몸의 마나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어. 조금만 방치했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지. 그래서 내가 서둘러 마나를 불어넣었거든. 아마 넌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 거야.”

그 말에 이사나가 홀로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눈앞에 떨어진 구명줄을 바라보듯, 절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만약, 만약 그대가 물의 정령왕이고, 내가 그대와 계약한 것이 사실이라면…….”

“만약이 아니라 전부 사실이라니까.”

“……그런가.”

이제야 현실을 직시할 마음이 생긴 걸까. 녀석은 희미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딘지 허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초연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사나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음의 정리를 한 듯, 그 어느 때보다 눈빛이 또렷하고 맑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이어진 그의 말은 주위를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유감이지만, 난 이 계약을 파기하겠다.”

“……!”

“주, 주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두가 경악성을 터뜨리는 가운데, 나는 그저 가만히 침묵했다.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왠지 생각만큼 이런 상황이 놀랍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 전부터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색이 영 꺼림칙하던 참이었다.

날이 선 칼처럼 바짝 도드라진 거친 기운.

그것은 분명 적의(敵意)였다.

‘……뭐야, 결국 또 그거냐.’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어젯밤 소환되었을 때도 녀석은 사나운 기세로 나를 몰아붙였다.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아마도 지금 또한 그때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일관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사나는 날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거참…….’

어차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뤄진 계약이고, 정이 들 만큼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니다. 어렵게 만난 계약자를 잃는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나 싫다는 녀석과 계속 계약을 유지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저 수긍하고 돌아가기엔 내심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싫다면 왜 굳이 나를 불러냈단 말인가? 정령왕이라면 나 말고도 다른 녀석들도 있는데 말이다.

“……뭐, 좋아. 계약을 파기하는 건 파기하는 거지. 하지만 그전에 이유나 먼저 들어 보자. 대체 왜 파기하려는 건데?”

“이유? 지금 그걸 그대가 내게 묻는 건가?”

“그럼 나한테 원인이 있다고?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렇겠지. 어차피 그대 같은 정령왕에겐 우리 인간들 따위는 발에 치일 정도로 하찮은 존재일 테니…….”

“뭐? 이, 이봐, 이사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입술을 악문 녀석은 그대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망한 심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미 빠르게 걸어간 뒷모습은 벌써 동굴 밖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그에 당황한 기사 몇 명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주군! 기다려 주십시오! 주군!”

“이렇게 홀로 움직이시면……!”

동굴 밖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아마도 화가 난 이사나를 달래기 위해 기사들이 진을 빼는 듯했다.

“뭐야, 저 녀석…….”

전후 사정 설명 없이 무작정 저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말투만 어른스러웠지, 행동은 처음 내 멱살을 붙들고 마구잡이로 윽박지르던 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대체 왜 저렇게 날 싫어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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