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이봐, 큰일이야. 대장의 열이 더 심해졌어.”
“뭐? 젠장, 큰일이군. 약도 없는데…….”
언제부터 잠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깬 것은 누군가가 두런두런 떠드는 음성 때문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긴박한, 긴장이 고조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무거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자,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듯 주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꽤 시간이 흐른 것인지 바깥에서부터 어슴푸레한 빛이 지척까지 밀려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동굴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아직 새벽인가…….’
그런데 이런 이른 시각부터 대체 무슨 소란이지?
나는 불편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그러자 한구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다급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한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심지어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조차 온통 그쪽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뭐야, 누가 아픈 건가? 당황한 나는 내 앞에 있는 감시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왜들 저러고 있는 거죠?”
“시끄럽다, 꼬마.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깨어났으면 참견하지 말고 그저 조용히 있어.”
“하지만…….”
그때 무리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젠장! 대장, 정신 차려! 이봐, 누가 물 좀 새로 가져다줘. 수통의 물이 전부 비었어.”
“잠시만 기다려. 내가 떠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알렉이었다. 급히 수통을 챙겨 뛰어나가려는 그에게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알렉! 잠깐만 기다려요!”
“뭐지?”
이름을 불린 것에 당황했는지, 그는 움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 사이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몸을 결박하고 있던 것을 가볍게 끊어냈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밧줄의 잔재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헉!”
“무, 무슨!”
여기저기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와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어리고 체구도 가는 내가 두꺼운 밧줄을 이불솜 뜯듯 잘라 버리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중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든 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곧장 사람들이 모여진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당황한 사람들은 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니 누워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밝은 금색의 머리칼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이십 대 중후반 가량의 남자였다.
어디서 크게 다친 건지 그의 온몸은 붕대로 단단히 감겨 있었다. 하지만 위생 상태까진 신경 쓰지 않은 건지, 기껏 감겨 있는 붕대는 그에게서 배어 나온 진물과 핏물, 그 밖의 자질구레한 오물로 몹시 지저분한 상태였다. 이대로는 병균에 먼저 감염되어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살짝 혀를 찬 다음 밧줄을 끊어낼 때와 같은 방식으로 붕대를 말끔히 잘라냈다. 그러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옆에 있던 자들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봐! 이게 대체 무슨 짓……!”
“가만히 있어 봐요. 상처를 보려는 거잖아요.”
“뭐, 뭐?”
너무 당당한 내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그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기세가 주춤한 틈을 타 빠르게 남자의 환부를 살폈다. 그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날카로운 것에 찢기고 베인 상처는 물론, 멍이 들고 깨진 곳이 여럿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그의 등 뒤를 문신처럼 뒤덮고 있는 화상의 잔해였다. 단순히 데인 것만이 아니라 터지고 움푹 파인 자국도 함께했는데, 그 안으로 곪아 터진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언가 몸 위에서 폭발이라도 한 걸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다.
“언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상처가 얼마나 됐죠?”
내 질문에 사람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찜찜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로 이틀째다.”
“헐, 이틀이나 됐어요?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왜 바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거죠? 게다가 응급처치조차 거의 해 두지 않고.”
“그건…….”
“아니,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게다가 이런 부상이면 딱히 데려가도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그보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 진통제는 먹였어요?”
“해열에 좋은 약초라면 조금…….”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온몸에 들끓는 열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아무튼 이대로 계속 놔두면 죽을 것 같으니까 지금 바로 치료할게요. 별로 이의 없으시죠?”
“뭐? 설마 치료할 수 있다는 거냐?”
“그야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하죠.”
“하,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곳엔 약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데…….”
“보시면 알아요.”
대답과 동시에 나는 회복의 기운을 끌어모아 환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 행위에 경악한 사람들이 급히 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붙잡는 것보다 내가 남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빨랐다.
“회복!”
순식간에 새하얀 물안개가 일어나 남자의 몸을 뒤덮었다. 그 모습에 내게 다가서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주위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치료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곳이 인간 세상이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기운의 소모가 더 컸다. 그런데도 회복 속도는 본래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체감 속도일 뿐, 실제로 그 정도까지 약해지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 증거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다시 손을 뗐을 땐, 남자의 환부는 약간 분홍빛의 자국만 남긴 채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됐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냐! 대체 케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이 사람 이름이 케이예요? 으음, 우선 상처는 치료하긴 했는데, 워낙 심각한 상태였으니 당장 무리하게 움직이는 건 안 돼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체력을 회복하게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치료? 방금 그게 치료를 한 거라고?”
아니, 그럼 내가 치료했다고 그러지 치질 걸렸다고 그랬겠냐? 웬 인간들이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거야!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곧장 케이의 몸을 가리켰다. 설마 멀쩡히 나은 것을 보고도 딴말을 하랴 싶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말끔히 아문 상처를 발견하고 한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한참 만에야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혹시 넌 신관인가?”
“하지만 그 밧줄을 끊어낸 괴력은 도대체…….”
괴력이라니! 그건 그저 물의 기운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동해서 사용한 것뿐이라고! 아니, 그보다 할 말이 그런 것밖에 없는 거냐!
초반에 날 범죄자 취급한 건 나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도 내 등장은 오해를 살 만한 여지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것 아닌가?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도리어 추궁하는 시선이나 보내다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가슴속에서 무언가 억울한 기분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런 불만을 그들에게 토로할 수도 없었다. 때마침 의식을 차린 케이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무, 물…….”
“……!”
“세, 세상에! 대장! 정신이 드는 거야?”
“신이시여! 어이, 이봐! 여길 봐! 대장이 살았어! 깨어났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주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대장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아마 케이라는 이 사람이 이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인가 보다. 게다가 상당히 신뢰받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서로 얼싸안고 감격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니 괜히 울분에 차 씩씩거리고 있던 나만 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참자, 참아.’
“무, 무울…….”
그 사이에도 케이는 달싹이는 입술로 연방 물을 찾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미처 그의 상태까진 신경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쉰 다음 손끝에 물을 모아 한입 크기로 삼킬 만한 물방울을 만들었다. 그런 후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케이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그는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허겁지겁 물을 삼켰다. 하기야 땀을 그렇게 많이 흘렸으니 갈증이 일만도 했다.
그런데 착각일까. 왠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경직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동작 그대로 멈춘 채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뭐, 뭐야. 왜 또 저렇게 보는 거지? 이번엔 그냥 평범하게 물을 준 것밖에 없는데? 설마 이젠 이런 것 가지고도 뭐라 하려는 건가?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보니 이젠 선행을 베풀어도 당당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또 어디서 꼬투리를 잡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챙강!
그때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검을 떨어트린 장본인조차 다시 주워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본인이 검을 놓쳤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보이는 광경에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알렉이 천천히 두 무릎을 땅에 꿇는 것이 아닌가!
“너는……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새삼스러운 경어는 웬 말이며, 사람들의 얼굴마다 떠오른 두려운 빛은 또 뭐란 말인가? 마치 인간이 아닌 것을 보는 듯한…… 어? 인간이 아닌 것?
‘헉! 그,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런 건 인간은 할 수 없는 거잖아.’
그제야 나는 주위의 반응을 납득했다. 순식간에 사람을 치료한 것도 놀라운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물을 만들어 먹였으니 내가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밖에.
그동안 정령계에서 살았답시고 이런 희한한 능력의 사용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게 된 모양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이었던 주제에.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활에 적응이 돼 버린 걸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으음…….”
이쯤에서 그냥 정체를 밝히는 게 나을까?
아직 이사나는 깨어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좀 민망했다. 게다가 능력까지 다 선보인 마당에 이제 와 숨긴다 해서 믿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다음, 여전히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숨겨서 미안해요. 전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라고 합니다.”
“……에?”
“엘……퀴네스?”
“무, 물의 정령왕?”
파장은 순식간에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나같이 경직된 얼굴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새파랗게 질린 것은 정령사 페리스였다. 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하던 입에서 간신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 어째서 정령왕께서 이곳에…….”
“부름을 받았거든요.”
“부, 부름이라 하시면…….”
“당신이라면 눈치챌 줄 알았는데요.”
“서, 설마!”
경악한 그의 시선이 곧장 어느 한 곳을 향했다. 물론 그곳에 있는 건 당연히 이사나였다.
“지금 이사나 님은 극도의 탈진 상태로 몸 안의 마나가 거의 고갈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정령을 소환하다가 실패한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본인이 했던 말이니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눈치챈 듯, 알렉이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그는 거의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이른 곳을 알아챈 사람들도 모두 일시에 호흡을 멈췄다. 이 안에서 동요가 없는 것은 이런 소란 속에서도 용케 깨지 않은 채 곤하게 잠들어 있는 이사나, 그 녀석뿐이었다.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장본인인 녀석은 깨어나지도 않다니. 마치 주인공이 빠진 연극을 지휘하는 기분이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사나 란느 스왈트. 그가 저를 이 땅에 소환하였고, 물의 정령왕과 계약한 첫 번째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쿠웅!
그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차례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광경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몸을 굽히는 모습은 상당히 장엄했지만, 지켜보는 나로선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 큰 사내들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은 여러 가지로 충격이었다.
마찬가지로 눈물범벅이 된 알렉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땅에 영광 있으라! 신은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커다란 함성. 어림잡아 겨우 십여 명이 간신히 넘는 인원이었음에도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동굴 전체가 다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과의 계약이란 게 물론 대단하게 여겨지긴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감격에 겨워할 일이던가?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어느새 주변은 완연히 떠오른 해로 새하얗게 밝아져 있었다.
완연한 아침,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