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2화 (32/608)

제32화

“마음을 강건하게 가지십시오, 주군! 분명 모든 것이 좋아질 겁니다.”

“하늘이 이런 식으로 스왈트의 피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절대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기사들의 외침에 어린 군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페리스가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주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근처에서 샘을 찾았습니다.”

“차, 찾았다고? 하지만 그대는 아까부터 계속 이곳에 있었지 않은가?”

“따라와 보시겠습니까?”

페리스의 말에 어린 군주와 기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동굴을 벗어나 숲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머지않은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그 앞엔 작지만 맑은 옹달샘이 존재했다.

“무, 물이다!”

“정말 샘이 있었다니!”

“어떻게 한 겁니까, 페리스?”

놀라서 탄성을 터뜨린 기사들의 질문에 페리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실프들에게 주변 수색을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성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우와아, 그렇군요. 아무튼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겠군요.”

반색한 기사들은 서둘러 지니고 있던 수통에 물을 채웠다. 어린 군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페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프라면…… 바람의 정령이던가?”

“예. 바람의 하급 정령입니다, 주군.”

“그럼 조금 전의 그 말의 형상을 한 것은? 그것도 정령이겠지?”

“예, 맞습니다. 바람의 중급 정령인 슈리엘이지요. 부끄럽지만, 제가 소환할 수 있는 최고위 정령입니다.”

“부끄럽다니,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대의 정령은 정말 강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동조했다.

“맞습니다, 페리스. 정말 대단했습니다. 돌풍이 불 때마다 한꺼번에 적들이 우수수 시체가 되는데, 우와― 정말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근처에 있는 샘물까지 찾아내고. 정령이란 게 이렇게 멋진 존재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하긴 제대로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아, 그건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최근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륙에는 정령사의 등장이 거의 없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정령사들도 거의 일제히 계약이 끊기거나 단계가 내려가는 등, 형편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도, 그에 대해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스스로 살아가는 것조차 벅찬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령의 존재는 점차 대륙에서 옛말이 되어 가고 있었다. 페리스는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흔치 않은 중급 정령사로, 평민이지만 그 재능을 인정받아 자작의 작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본래 무(武)를 숭배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검을 들지 않는 마법사나 정령사를 배척하는 일이 빈번하다. 더구나 대부분 순수 혈통의 귀족들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평민 출신인 페리스와는 소원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들은 정령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위기의 순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페리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물의 정령사였다면 이렇게 찾으러 나올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선한 물을 공급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호오, 물의 정령은 그런 것도 가능하군요. 그럼 물의 정령사는 아무 때나 물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예. 그냥 얻다 뿐입니까? 상급의 정령사는 마을 단위로 비를 내릴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와! 그거 정말 굉장하군요.”

“지난 가뭄 때 물의 정령사들이 있었다면…….”

“…….”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분위기는 금방 숙연해졌다. 지난 십 년은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지금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도 그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울해진 기사들의 모습에 페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다독였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어서 물을 떠서 돌아갑시다. 부상자들도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이럴 때가 아니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서둘러 수통을 채우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모두가 분주히 이동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미동도 없는 자가 있었다. 바로 어린 소년 군주였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굳어 있는 그의 모습에 페리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주군, 주군께서도 이만 들어가셔야…….”

“페리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주군.”

“그대는 물의 정령을 소환하지는 못하는 건가? 정령사인데도?”

그의 질문에 페리스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령사라고 해도 모든 정령을 소환할 수는 없습니다. 각기 잘 맞는 속성과 어울리는 상성이 있거든요. 게다가 물의 정령은 다른 정령들보다 더 많은 마나와 자연 친화력이 필요합니다. 저도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소년 군주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물의 정령이 보고 싶었던 걸까. 난처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리스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알고 계십니까, 주군? 주군의 초대 선조께서 유희를 하던 블루 드래곤이라는 가설이 돌던데 말입니다.”

“그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초대 선조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힘을 구사했다고 하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주군께선 어쩌면 물의 정령을 소환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블루 드래곤은 물의 상성을 지닌 존재니까요. 그 피가 흐르는 주군이라면 아무리 희석이 된 상태라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되시면 소환주문을 외워 보시죠. 지금처럼 물이 충분한 시기엔 하급 정령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소환주문이 어떻게 되지?”

눈빛을 빛내며 바라보는 소년의 질문에 페리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가 알려준 것은 간단한 소환마법의 주문과 소환하는 방식 등이었다.

“소환을 하려면 반드시 각 정령의 속성이 되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즉, 물의 정령을 부르려면 샘물이나 강가에서 하셔야 하지요. 물의 하급 정령은 나이아스, 중급은 운디네, 상급은 시큐엘이라고 합니다.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면 그 휘하의 정령들은 자연스럽게 주군께 복속이 될 겁니다.”

“정령왕은? 정령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은 정령왕이 아닌가?”

“아아, 그렇죠. 물의 정령왕의 이름은 엘퀴네스입니다.”

“엘퀴네스…….”

소년은 되새김질하듯 입안으로 몇 번 발음을 굴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빛을 품었다.

“소환하는 방식은 그도 동일한가?”

“예? 아아, 그렇긴 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주군.”

“어째서?”

“정령왕의 소환엔 엄청난 마나와 생기가 소모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 해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엘퀴네스의 소환에 성공한 정령사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도하는 즉시 온몸의 마나가 바닥나 죽고 말 겁니다.”

“그렇구나.”

“아시겠습니까, 주군? 절대 정령왕은 소환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소년 군주는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귓속에는 오로지 ‘엘퀴네스’라는 이름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 * *

바스락.

깊은 밤, 작은 형체가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방금 잠든 일행들 틈을 몰래 빠져나온 소년 군주였다. 그가 도착한 곳엔 페리스가 발견한 옹달샘이 있었다.

‘물의 정령을 소환하려면 물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

달빛을 비추고 있는 옹달샘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곧 심호흡을 내뱉고 맑은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령을 소환하겠어. ……그중에서 엘퀴네스를.’

페리스가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못을 박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여기서 죽으나 언젠가 추격대에 잡혀 죽으나,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모한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나았다.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앞에 있는 샘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난 몇 달간 대륙에는 큰 폭풍과 폭우가 연달아 빗발쳤다. 인간들은 몰랐지만 그것은 전부 정령왕들이 단기간에 대륙을 회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 결과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기운이 가장 창궐했다.

단기간에 집중된 물의 기운은 그 양이 너무 많아 대륙에서 미처 소화를 다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기운들은 하나의 집약체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다가 자연스럽게 공중으로 소멸할 예정이었다.

페리스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렇게 소멸을 위해 잠시간 만들어진 ‘마나의 샘’이었다. 이 물을 이용해서 소환주문을 외우면, 약간의 자연 친화력만 가지고 있어도 상급의 정령까지 소환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기에 소년에겐 특별한 기연이 하나 더 있었다. 본래 근래의 인간들은 유희 중이던 드래곤 앗리시아와 인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후예들이었다. 이미 거의 피가 희석된 상태이긴 했으나, 그의 경우엔 중도에 한 번 더 블루 드래곤의 피가 섞이게 되면서 약간의 상승 작용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자연 친화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친화력과 농밀한 마나를 품은 샘. 이 두 가지의 만남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소환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고 있었다.

소년이 조금만 더 샘에 늦게 찾아갔다면 이루어질 수 없던 일.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한한 마나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다 쓰고 있었다.

* * *

“헐, 정말 소환마법진……?”

있지도 않은 심장이 쿵덕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가 눈을 비볐다가 다시 깜빡거려 보기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그래도 눈앞의 황금색 홀로그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한 빛을 내뿜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머릿속의 의심은 점점 뚜렷한 확신으로 번져 나갔다. 이건 틀림없이 소환마법진이었다.

‘대체 누가…….’

설마 어느 용감한 드래곤이 라피스라즐리를 무시하고 소환주문을 외운 걸까?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 천천히 마법진에 손을 가져갔다.

파아앗!

그 순간 마법진 안에서 눈부신 금색의 빛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엄청난 압력이 내 온몸을 집어삼켰다. 미처 저항할 틈조차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어? 으아악!”

마치 높은 고층빌딩 위에서 떨어지는 것만 같은 아찔함이 덮쳐들었다. 그 언젠가 탄생의 방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제발! 이런 건 예고 좀 해 달라고!’

다행히 추락하는 감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몸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생판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 주위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무성한 수풀과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옹달샘이었다. 그 밖에도 군데군데 거대한 바위라든지, 비탈진 길들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깊은 산 속 한가운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드래곤이 이런 곳에 사는 건가?

황당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본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곳에 누군가가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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