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캉 콰앙! 채앵!
“커헉!”
“죽어랏―!”
한낮의 숲은 때아닌 침입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정신없이 검을 섞는 사람들은 검은 두건을 쓴 자들과 은제 갑옷을 입은 자들, 각 두 편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두 무리는 양쪽에 서서 서로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매서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실력은 거의 막상막하였다.
다만 두건을 쓴 자들과 달리, 은제 갑옷의 남자들은 공격보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쪽에 더 치중한 상태였다. 실제로 그들 한가운데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잔뜩 웅크린 작은 체구의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아는 상대편은 더욱 맹렬히 빈틈을 파고들었다.
한차례 칼부림이 끝난 후, 두건을 쓴 자들 가운데서 가장 선두에 선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네놈들이 갈 곳은 없다! 얌전히 투항하라!”
그가 쥐고 있는 검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분한 듯이 바라본 상대편 남자가 입술을 악물었다.
“웃기지 마라, 대공의 개! 절대로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건을 쓰고 있는 자들에 비해, 은제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지쳐 보였다. 심하게 긁힌 상처는 예사고 갑옷도 대부분 성한 곳이 없다. 그러나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상대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세리크 백작! 투항하라! 본 군은 그대와 그대가 지휘하는 단의 실력과 기량을 매우 아끼고 있음을 알린다! 그를 넘겨주기만 하면 지금까지 누려 왔던 명예와 지위를 그대로 보장하겠다!”
은제 갑옷을 입은 이들의 지휘자, 케이 드 세리크를 향해 보내는 외침이었다. 케이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같잖은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닥쳐라! 누가 그런 헛소리를 들을 것 같은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뼈를 깎는 수련을 하며 간신히 올라온 자리일 텐데?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생각이냐? 무엇을 위해서?”
“물론 우리의 명예와 우리가 지키는 주군을 위해서다! 네놈들에겐 개죽음으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우리의 신념을 지키다 죽은 숭고한 죽음이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내 동료들의 죽음을 폄하하지 말라!”
“하하하하! 네놈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는 자가 과연 그럴 자격이나 있는 자란 말이냐? 그자가 양심이 있다면 아까운 수하들이 더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할 터!”
그 말에 은제 갑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후드를 쓴 사람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본 케이가 급히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들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희를 현혹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이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것이 저희 신념이고 염원입니다.”
케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맹세했다. 그제야 눈에 띄게 흔들리던 후드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사나운 눈빛을 저편에 보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상대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가 지휘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이 발군이라 불리는 황실 직속 친위기사단이다. 그런 자신들을 상대로 상대편은 호각으로 대전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만한 실력자들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매시간 쫓기다 싸우고 또 쫓기는, 이런 전투가 벌써 사흘이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케이는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시금 모질게 다잡았다.
“네놈들이 대공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감히 이 땅의 정통한 핏줄에 칼을 들이댄 죄는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쿡쿡, 네놈들이 믿는 신이 우리의 신보다 강하더냐? 자아― 얌전히 길을 비켜라!”
“이 패악한 것들!”
화가 난 케이는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피식거리며 가볍게 대치했다.
챙― 날카로운 쇠의 마찰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간신히 소강 되었던 공기가 그 소리로 인해 다시금 뜨겁게 치달아 올랐다.
‘흥분하지 말자, 케이.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곧 페리스와 합류하기로 했던 지점이야. 그가 오면 분명히 우리 쪽이 우세할 거다.’
페리스는 우수한 바람의 정령사로,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따로 행동하는 중이었다. 그들과 약속했던 장소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행이 합류하면 이들을 물리치고 안전한 장소로 피신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으로썬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후우, 정말로 끈질긴 놈들이군.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러할까?”
“뭣?”
“나와라!”
“……!”
두건인의 손짓에 수풀 여기저기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검은 두건과 로브를 입은 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자 케이를 비롯한 기사들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매복!’
처음부터 이곳으로 유인했던 것이었나!
새로 나타난 적의 숫자는 언뜻 세기에도 일백이 넘었다. 고작 열몇 명 남은 인원으로 상대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때 검은색 로브를 입은 자들이 입으로 무언가를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 곳곳에서 불덩이가 형성되었다. 그것을 본 케이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마법사!”
설마 이런 곳에서 마법사가 나타날 줄이야!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그들이 날려 보낸 화염구가 빠른 속도로 쏘아져 들어왔다. 목표는 정확히 기사들 사이에 있는 후드인을 향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케이는 무작정 달려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주군!”
콰아앙!
그 순간 동시에 날아든 화염구가 그의 등에서 연달아 폭발했다. 울컥 붉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케이를 향해, 후드 속의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케이!”
“대, 대장!”
쓰러진 단장의 모습에 기사들 사이에서 크게 동요가 일었다. 그 틈을 노리고 두건을 쓴 자들 쪽에서 공격 신호를 내렸다.
“모두 쳐라!”
“와아아!”
“마, 막아! 모두 대장과 주군을 보호해라!”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들의 모습에 경직했던 기사들이 검을 움켜쥐고 서둘러 방어진을 구축했다. 곧 사방은 무수한 칼부림 소리로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군이라 불린 후드인이 자신의 품에서 늘어진 케이의 몸을 끌어안은 채 머리를 덮은 천을 걷어냈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어린 소년이었다.
“케이! 정신 차려라, 케이!”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한 케이의 뺨을 두드렸다. 그에 간신히 의식을 차린 케이가 다시금 울컥 피를 토해내며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피, 피하십……시오. 여기는…… 위험합…….”
“싫다! 어떻게 그대를 놔두고 가란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
소년은 울먹이는 얼굴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를 둘러싼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주, 주군! 더 이상은 버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그 사이에 피신을!”
“안 된다! 케이는 아직 살아 있어! 두고 갈 수는 없다!”
“주군!”
그때였다.
“슈리엘!”
쐐애애액―!
누군가의 희미한 외침과 함께, 뒤섞여 싸우던 자들 위로 갑자기 모진 강풍이 불었다.
“뭐, 뭐야?”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세찬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들의 지척에 다가온 기묘한 생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르르르…….
쭉 뻗은 긴 몸체에 네 개의 다리, 우아하게 흩날리는 갈기, 은회색의 눈동자를 깜빡이는 생물은 그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말?”
당황한 사람들은 곧바로 그 생명체의 정체를 인식했다. 그러나 보통의 말과는 다르게, 그 말의 몸체는 전체적으로 투명해서 뒤쪽의 배경이 거의 다 비쳐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히이이잉!
그 순간, 몸을 일으켜 발을 든 투명한 말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강한 돌풍이 일어나더니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몽땅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처절한 그 비명이 그들이 내뱉을 수 있었던 마지막 소리였다.
휘말린 자들은 마치 날카로운 검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갈가리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 그들 중에 숨이 붙어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돌풍의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마법사들이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주문을 영창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경악한 사람들은 돌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돌풍은 놀랍게도 기사들만은 전부 피해 가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사태의 불길함을 감지한 두건인의 수장이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 적의 기습이다! 퇴각해라! 모두 도망쳐!”
매서운 돌풍 앞에 살아남은 적들은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감췄다. 간신히 찾아든 평화 앞에 기사들은 모두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운 좋게 목숨을 구했다는 건 알았지만, 무슨 영문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 앞으로 조금 전의 투명한 말이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의 위풍당당한 등장과는 사뭇 다른 온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우아한 모습이 어떻게 돌변하는지 알고 있는 기사들은 감히 다가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모두 무사하십니까?”
“……!”
그때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고 수풀 사이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갈색의 긴 머리칼에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들 사이에서 안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페리스!”
* * *
동굴 안은 몹시 어둡고 습했다. 서둘러 마른 장작으로 불을 지핀 기사들은 그 앞에 부상자들을 차례로 옮겨서 눕혀 놓기 시작했다.
본래 백여 명 남짓했던 기사들은 그간의 전투로 인해 부상자를 다 합쳐도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숫자로 줄어 있었다. 자연히 기사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군.”
“예상보다 손실이 너무 컸어.”
“케이 님마저 저 지경이 되셨으니…….”
그들의 대장인 케이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부상이 상당히 위중한 상태였다. 치료한다 해도 며칠을 넘기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그나마 이런 곳을 발견하게 되어 운이 좋았습니다. 이곳이라면 추격자들에게 쉽게 발각되지 않을 겁니다.”
페리스가 그들을 열심히 다독였지만 이미 상심한 기사들의 어깨는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당장은 페리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지난 며칠간의 전투를 통해 적의 전력은 뼈저리게 깨달은 바였다. 지휘할 사람도 쓰러진 상황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당장 먹을 식량, 마실 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급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마련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갑옷은 너무 눈에 띄어. 갈아입을 옷이 필요한데…….”
“약과 상처에 감을 새 붕대도 있어야 해.”
“이래저래 필요한 것들이 많군요.”
“미안하다, 모두. 나 때문에…….”
그 순간 이어진 소년의 가는 목소리에 기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주군! 무엇보다 주군께서 무사하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무능해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일 뿐입니다.”
“아니, 그대들은 이미 넘치도록 잘하고 있다. 이렇게 과분한 보호를 받는 사람이 나라서 부끄럽구나. 그대들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내가 이렇게 작고 볼품없지만 않았더라면…….”
“주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은 저희의 단 하나뿐인 군주이십니다.”
“저희에겐 충분히 훌륭하고 장성하신 주군이십니다! 주군이 아닌 다른 사람을 모시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기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삼켰다.
그들은 어린 주군이 살아온 환경을, 그가 처해 온 상황을 모두 빠짐없이 옆에서 지켜본 자들이었다. 태어난 이래 단 하루도 순탄치 않았던 세월이었다. 한창 해맑고 노는 것을 즐겨야 할 나이에 뼈아픈 진실과 추악한 음모의 대상이 되어 이리저리 치여야 했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던 아이는 자라면서 웃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이 어린 주군이 부디 진심으로 다시 웃을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