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너는 너보다 늦게 태어났으면서도 훨씬 빨리 늙어 죽어 가는 인간들을 지켜보게 될 거야. 그때마다 크게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겠지. 그런 것이 반복되면 네 정신세계는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거 알아? 정령왕은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게 되면 폭주를 하게 돼.”
“폭……주?”
“응.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조차 무엇 하나 제어하지 못하지. 그때가 되면 진정될 때까지 봉인을 하거나 강제로 소멸시키거나, 둘 중 하나밖에 방법이 없어. 안 그럼 세상이 너무 위험해지니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정령왕이 같은 정령왕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그가 세상에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했을 때뿐이라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그 일이 마치 지금 당장 눈앞에 다가온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내가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자, 트로웰이 그 위를 자신의 손으로 가볍게 덮으며 말했다.
“물론 상당히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 하지만 나는 만에 하나라도 지훈이 그런 슬픈 일은 겪지 않길 바라. 그런 의미에서 엘뤼엔의 선택이 옳다고 믿어. 네가 상실감에 빠져 힘들어하는 순간이 오면, 그는 너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야. 죽지도 않고 배신도 하지 않는, 언제나 한 자리에서 너를 지켜봐 주는 ‘아버지’니까.”
‘나를 지켜봐 주는…….’
왜 갑자기 그 말에 눈물이 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울컥 치솟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악무는 나를, 트로웰은 가볍게 끌어안고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록 했다.
“받아들이도록 해.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너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그것이 우리 다른 정령왕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너와 같은, 동등한 존재니까. 아마 너 자신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껏 의지하지 못하겠지.”
“……하,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엘뤼엔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인데 나 혼자 그렇게 여기는 거면…….”
“아니, 그건 틀림없이 진심이었을 거야. 그는 엘퀴네스였을 때도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거든.”
“그, 그래?”
“응, 덧붙여 이전부터 일단 자신이 책임질 부분이라고 정해 놓은 것에는 한없이 관대한 면이 있었지. 그러니까 다음에 만날 땐 마음껏 어리광부려 봐. 아마 전부 받아 줄 테니까.”
“…….”
“어, 내 말 못 믿는 거야? 정말이래도?”
내가 불신의 시선을 보내는 걸 알았는지 트로웰은 과장되게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인가 싶었지만 나는 더 이상 기대감을 부풀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으니까.
“정말이야, 지훈.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사건에 부딪히든, 엘뤼엔은 절대로 너를 외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마. 그는 네 새로운 시작을 돕는 존재가 될 테니까.”
“…….”
새로운 시작이라…….
정령으로 태어난 지금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게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왠지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트로웰.”
“응? 뭔데?”
“내 이름 말이야……. 다시 엘퀴네스로 불러 주지 않을래?”
“어?”
“으음, 미안. 내가 먼저 지훈이라고 불러 달라고 해 놓고 이렇게 말하니 좀 민망하긴 한데. 하지만 계속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면 끝까지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젠 정말 너희의 동료로서, 또 한 명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내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그 말에 트로웰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좋아, 엘퀴네스. 호칭을 바꾸는 거야 어렵지 않아.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한걸.”
“고, 고마워.”
“천만에. 아아, 그래. 이건 어때? 엘퀴네스를 줄여서 ‘엘’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른바 애칭 같은 거지.”
“엘……?”
“응, 귀엽지?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쿠, 쿨럭! 귀엽다니…….”
당황해서 연방 헛기침을 내뱉자 트로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저 멀리 꽃잎에 누워 잠들어 있던 수많은 실프들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자그마한 불씨들은 불의 하급 정령인 카사들이었다. 나비의 모양을 한 카사는 저들끼리 춤을 추며 밤하늘에 별빛보다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았다.
언젠간 이 모든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때가 오겠지. 그리고 그때에 난 더 이상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나를 아찔한 행복 속으로 밀어 넣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이름…… 아버지.
“탄생을 다시 한 번 축하해, 엘. 정령계로 온 것을 환영할게.”
* * *
‘엘’이라는 애칭이 생긴 이후로 내 일상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맘때쯤 내가 하는 일은 트로웰과 미네르바를 따라다니며 아크아돈의 자연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태어난 이래 처음 목격한 아크아돈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사막화가 진행되어 무척이나 황폐했다. 그나마도 물의 정령들이 많이 태어난 덕분에 요즘은 꾸준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빠른 복구에 한계가 있는 듯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정령왕들이 나설 차례였다.
처음 아크아돈에 내려왔을 땐 팔다리가 너무 무거운 기분이 들어 제대로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에 오게 되면 본래 힘의 3분의 1밖에 내지 못한다는데, 그로 인해 생겨난 영향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동안은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곳 아크아돈의 문명은 지구의 중세 시절과 상당히 비슷했다. 드래곤과 엘프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라고 하니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건물 양식이라든가 숲의 모양 같은 게 중세 유럽의 전경을 떠올리게 했다. 간간이 지나치면서 보게 된 인간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우와, 저기 봐! 트로웰! 사람이야!”
“쿡쿡, 그렇게 신기해?”
“가까이 가서 구경해도 돼?”
“음,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우릴 알아보지는 못할 텐데.”
트로웰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흔들어 보고 툭툭 건드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키가 굉장히 크네?”
“그런가? 여기선 저 정도가 보통일걸?”
“헉! 딱 봐도 180은 되는 것 같은데, 그 정도가 보통이라고?”
“앗리시아인은 원래 타고난 골격이 큰 편이니까.”
“앗리시아?”
“인간들의 문명은 고대 황금기를 거치고 난 이후 한 번 멸망했거든. 앗리시아는 그 뒤에 새로 생긴 인종을 부르는 호칭이야. 처음엔 숫자가 무척 적었지만 섞이고 섞이다 보니 지금은 인간 대부분에게 그 피가 흐르고 있지.”
“헤에, 그렇구나.”
“우스운 점은 뭔지 알아? 앗리시아가 드래곤의 이름이라는 거야.”
“에?”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멸망기에 생존한 인간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로 시작되었다는 거지, 지금 인간들은.”
그래선지 유독 마법에 재능을 지닌 인간들이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지금은 그들의 조상인 드래곤 앗리시아도 수명이 다 되어 죽었고, 그의 피도 많이 희석된 상태지만 가끔 드물게 뛰어난 대마법사나 정령사가 태어나곤 한다는 것이다.
‘마법이라…… 역시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구나.’
하지만 이곳 인간들의 또 다른 점은 머리색에도 있었다. 지금 나와 이프리트의 머리칼처럼,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마치 물감을 섞은 듯 가지각색 선명한 색상이 이곳에선 실제로 존재했다. 타고난 머리색이 화려하다 보니 사람들의 외모도 더불어 더 화려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자, 그럼 이제 일을 시작하지.”
미네르바의 말에 따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일은 대부분 세 정령왕의 공동 작업이었다. 내가 더러워진 바다와 샘을 정화하고 사막으로 변한 땅에 수로를 만들면, 미네르바가 돌풍을 일으켜 꽃과 나무의 신들에게서 얻어 온 씨앗들을 그 위에 뿌린다. 트로웰은 그렇게 뿌려진 씨앗이 바닥에 자리 잡도록 도운 뒤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했다. 그렇게 하면 놀랍게도 다음날 바로 싹이 터 올랐다.
오래도록 메마르고 황폐한 곳이라도 비가 내리면 반드시 싹이 트는 것을 늘 신기하게 여겼었는데, 다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남모를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업이 두세 달쯤 이어지자 이젠 어딜 가도 깨끗한 강과 녹색의 대지가 펼쳐졌다. 이제 남은 것은 회복된 자연이 알아서 이전의 풍요로운 시절로 돌아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령계로 돌아온 우리는 에바스 에덴에서 작은 축배를 벌였다. 주최자는 트로웰로, 그는 평소 아껴 두었다는 술과 음료들을 꺼내어 전부 개봉했다. 전부 그가 직접 빚은 것들이었는데, 트로웰이 만든 술은 상당히 맛이 좋아 신계에서 없어서 구하지 못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특히 벌꿀로 된 샘물과 다이아몬드 백합으로 빚은, 이곳 정령계에만 존재한다는 특제주는 술맛을 모르는 내가 마시기에도 상당히 맛이 좋았다. 유일한 문제는 지나치게 높은 도수였지만, 이 경우에도 ‘물’이 지닌 영향은 나에게는 별로 해당 사항이 없으니 상관없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 트로웰.”
“그래? 마음껏 마셔. 부족해지면 또 만들면 되니까.”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잔이 비워질 때마다 가득 채웠다. 내 옆에서 묵묵히 마시고 있던 미네르바의 얼굴에도 드물게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네가 담근 특제주를 마시는 건 오랜만이군.”
“아아, 그러고 보니 특제주는 네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술이지, 미네르바. 그동안은 벌꿀 샘이 말라 있어서 통 만들 수가 없었지. 다시 빚어 본 게 벌써 10년 만인가? 이제 다시 가득 만들어 둬야지.”
“신들이 좋아하겠는걸.”
“흥, 그놈들 줄 몫은 없어.”
그답지 않게 툴툴거리듯 대답한 트로웰은 자신의 빈 잔에 다시 한가득 특제주를 채웠다. 그 옆에서 이프리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꿀꺽꿀꺽 연달아 잔을 비워 가는 중이었다.
“어쨌든 정말 기나긴 시간이었어. 이제야 마음 놓고 쉴 수 있겠네.”
“그러게 말이야.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엘.”
“아냐, 나보단 너희가 고생이 많았지.”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그때, 난데없는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엘이라니?”
“우와악?”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의 모습에 나는 한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눈부신 백금색의 머리칼에 하늘색의 눈동자를 지닌 장신의 남자. 다름 아닌 엘뤼엔이었던 것이다.
“어머, 엘뤼엔?”
“너…… 아니, 엘뤼엔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깜짝 놀란 이프리트의 외침과 내 경악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얼굴을 가볍게 찌푸린 그가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내 아들을 만나러 온 게 뭐가 잘못됐나?”
“마, 만나러 왔다고? 나를?”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런 게 아니면 내가 굳이 시간을 쪼개서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아니, 난 그 이유도 납득이 안 되는데?
당황한 건 트로웰과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전의 엘퀴네스네. 얼굴도 똑같아.”
“신이 되었다더니, 그게 정말이었군.”
물론 그들 중에서 가장 들뜬 이는 바로 이프리트였다. 한달음에 달려 나간 그는 엘뤼엔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엘뤼엔! 마침 잘 왔어. 이리 와서 앉아. 오랜만에 우리끼리 축배를 들고 있었거든. 같이 마시겠어?”
“특제주인가. 그리운 술이군.”
“헤헤, 그렇지? 예전에 곧잘 마시던 거였으니까.”
“아, 그럼 내가 잔을 더 가져올게.”
“난 술을 더 가져와야겠다.”
이프리트가 엘뤼엔을 자리에 안내하는 동안 나와 트로웰은 나머지 준비를 위해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에도 이프리트는 부산스럽게 그의 옆에 달라붙어 앉아 이것저것 끊임없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좋아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트로웰이 새로 꺼내 든 술 항아리를 한쪽 팔에 끌어안은 채,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프리트가 정말 이전의 엘퀴네스를 좋아했었구나. 어쩐지 직접 확인하니 놀랍네.”
“정말 하나도 몰랐던 거야? 트로웰은 타인의 생각도 읽을 수 있잖아.”
“말했다시피 나와 동급의 존재에겐 능력이 전부 통하지 않거든. 게다가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아니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거짓말을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건 아니긴 한데 말이야. 확실히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아. 정령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흔히 타인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거든.”
“음, 그래도 다른 사람을 믿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난 오히려 좋은 것 같은데?”
“그런가. 하지만 지금 이프리트의 경우처럼 불편한 점도 꽤 있어. 아, 그렇지. 그에 관련된 재밌는 일화를 알려 줄까?”
재밌는 일화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