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7화 (27/608)

제27화

“믿을 수가 없어. 엘뤼엔은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람? 양아들이라니. 자식이야 나랑 나중에 결혼해서 낳으면 되는걸.”

“헉, 결혼이라니? 언제 얘기가 그렇게까지 진행됐어?”

내가 기절한 사이에 벌써 그런 언약이 오갔단 말이야? 경악해서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냥 말이 그렇단 거지. 그걸 또 곧이곧대로 듣니?”

“뭐야, 그냥 네 희망 사항인 거야?”

“흥, 소망이 곧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거 모르니? 아레히스에게 물어보니까 신이 될 때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던 걸. 그래서 난 여신이 될 생각이야.”

“흐음, 그러고 보니 고백은 제대로 했어? 아까 보니까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퍼뜩 생각나서 묻는 말에 이프리트의 얼굴이 화롯불처럼 붉어졌다. 혹시 또 시비만 걸다 온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내 기우였던 모양이다.

“내 마음에 대해서는 전했어. 더 이상 감추고 숨기기만 하다가 후회하지 않기로 했거든.”

“오오, 장하다. 그래서 엘뤼엔이 뭐라고 대답했는데?”

“그다운 답변이었지 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사랑 타령이냐고, 나중에 여신이 되면 그때 가서나 말하라지 뭐야?”

“네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나 말이야? 이천 조금 넘었는데, 왜?”

“…….”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천이라니. 인간으로 치면 역사가 몇 번 바뀌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그 엄청난 나이를 보고 머리에 피도 안 말랐다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러니 이제 갓 태어난 나는 어린애로 취급하는 게 당연하지. 과연 이 녀석들 눈에 다 자란 인간이 성년으로 보이기나 할지나 의문이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이프리트는 상당히 만족한 기색이었다. 상급 신인데다가 외모까지 출중하다 보니 평소 엘뤼엔을 향한 여신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는 편인데, 그때마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그가 그나마 이프리트에게는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냐?”

“당연하지! 그럼 안 좋겠니?”

내가 보기엔 딱히 그거나 이거나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긴 매한가지였지만. 아니, 희망 고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몇 배나 질이 나쁜 걸로 보이는데, 단지 내 착각일까?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한 대 맞을 것 같아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말했다 하더라도 듣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이프리트는 자기만의 세상에 한껏 도취해 있었으니까.

“아아, 엘뤼엔. 엘퀴네스 시절에도 멋있었지만 신이 되니까 더 멋있는 것 같아. 역시 상급 신이란! 정말 어쩜 그렇게 멋있을 수가 있지?”

“난 지금의 네 변화가 더 놀라운데. 지금까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고 살았어?”

“시끄러! 아무튼 내 목표는 훗날 여신이 돼서 엘뤼엔과 결혼하는 거야. 너, 그의 아들이 됐다고 방해할 생각하면 절대 용서 안 해. 알았어?”

“미안하지만 방해할 생각 없네요. 근데 신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해?”

“그럼 당연하지. 신이 우리처럼 무성인 것도 아니고 엄연히 성별이 있는 걸.”

“흐음……. 그럼 신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종족은 뭐가 되는데? 신?”

그러자 아레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맞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중하위급 신이 됩니다.”

“상급 신끼리 결혼해도요?”

“하하!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급 신은 특별한 자격 요건을 갖춘 존재만이 부여받는 자리거든요.”

“특별한 자격?”

“일단 주신이 직접 창조한 가장 고결한 신의 영혼이어야 하고, 정령왕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하지요.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 정령왕님들처럼 말입니다.”

“……에?”

우리처럼이라니. 그냥 나중에 신이 되면서 등급이 갈리는 게 아니었어? 당황스러운 기분에 나는 내가 이해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건넸다.

“설마…… 저희가 소멸하면 상급 신이 되는 거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맞아요?”

“이런, 제가 거기까진 설명을 안 드렸었나요? 예, 맞습니다. 정령왕 분들은 전부 예비 상급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신이 되신다는 이프리트 님의 말씀에 저는 무척 감동했습니다. 아무쪼록 엘퀴네스 님도 선택의 시간이 주어질 때 신의 길을 선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꾸만 빠져나가는 인원을 충당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말이죠.”

“…….”

얼떨떨해하는 나와는 달리 이프리트는 아주 신이 난 표정이었다. 상급 신이 되면 엘뤼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아레히스가 이윽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명계를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어서요. 두 분 정령왕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소멸의 때에나 뵐 수 있겠군요. 그때까지 아무쪼록 평안하시길.”

“잘 가요, 아레히스.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그 뒤 아레히스가 돌아간 후에도 이프리트는 연방 콧노래를 부르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머, 기뻐할 건 당연히 기뻐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넌 이제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도록 해.”

“……뭐?”

“미래의 새어머니니까 당연히 엄마라고 불러야지. 그때 가서 부르려면 쑥스러울 것 아냐.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 예행연습하는 셈 치고 그렇게 부르란 소리야.”

“내가 미쳤냐!”

아직 엘뤼엔의 아버지 선언도 감당이 안 되는데, 이젠 엄마? 니들 전부 쌍으로 날 놀리려고 작정한 거지?

경악하는 나를 향해 이프리트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후우, 어쩔 수 없잖아? 나로서도 창창한 나이에 이렇게 다 큰 아들을 두고 싶진 않지만, 낭군님의 뜻이 그러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나 역시 앞으로 널 아들이라고 부르도록 노력할 테니까…….”

“하지 마! 부르지 마! 노력하지 말라고!”

“뭘 하지 마?”

“글쎄, 이프리트가 날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망언을…… 어?”

무심코 대답하던 순간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내가 누구한테 대답한 거지? 이곳엔 나와 이프리트만 있던 게 아니었나?

그리고 뒤를 돌아본 즉시, 나는 그곳에서 서늘한 표정을 한 채 조용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트로웰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미네르바가 역시 마찬가지로 엄격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트, 트로웰. 미네르바……?”

대체 언제 온 거지? 아니, 그보다 둘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평소보다 어둡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마치 화가 난 사람 같았던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두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그때 낮게 가라앉은 트로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

“두 정령왕의 기운이 한꺼번에 이 땅에서 사라지다니.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

그제야 나는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머나먼 외출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프리트를 도울 생각에만 열중한 나머지 다른 일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화해하러 간 녀석이 그 당사자와 함께 꼬박 하루 동안 행방이 묘연했으니, 두 정령왕의 심정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윽! 트로웰, 미네르바. 그, 그게 말이지, 어떻게 된 거냐면…….”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려 하자 트로웰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에 차가운 빛을 더하며 나를 응시했다.

“설명해 봐.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아, 아니. 시, 실은 그게 말이야…….”

말을 더듬으며 힐끗 옆을 바라보자 이프리트가 열심히 내게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나더러 전부 알아서 설명하라는 표정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이번에도 총대를 메고 지난 일들을 전부 설명해야 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두 정령왕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갔다. 그들은 우리가 차원을 이동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향한 장소가 신계라는 사실에 당황했으며, 신이 된 전대의 엘퀴네스를 만나고 왔다는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계에 가서 전대의 엘퀴네스를 만났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 전례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딱히 별일은 없었…….”

“별일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애초에 정령왕이 차원을 건넌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아? 엘퀴네스는 그렇다 쳐도, 이프리트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하나같이 구구절절 맞는 말들뿐이라 나와 이프리트는 꼼짝없이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두 정령왕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는 장장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나와 이프리트는 묵묵히 그들의 잔소리를 듣고 그때마다 사죄를 거듭했으며,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해야 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힘겨운 교훈을 얻은 순간이었다.

* * *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에도 나는 트로웰과 단둘이 남아 신계에서 있었던 일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대의 엘퀴네스가 형벌의 신 엘뤼엔이 되었으며, 동시에 내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처음엔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납득하는 듯 보였다.

“정말 미안해, 트로웰. 상의도 없이 멋대로 이렇게 일을 벌여서.”

“아니, 이제 그건 됐어. 충분히 반성한 것 같으니까. 그보다 아버지가 생겼다니. 잘됐다, 지훈. 축하해.”

“으음, 사실은 잘 모르겠어. 이게 과연 축하받을 일인지.”

“어째서?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하, 하지만 정말 엘뤼엔이 진심으로 한 말인지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 그리고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없는데 나만 아버지가 생긴다는 것도. 왠지 내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달까…….”

“인정하면 안 돼?”

“어? 그, 그야. 실제로 많이 부족하니까…… 인정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트로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지훈. 난 네가 정령왕으로서 부족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 실제로 지금까지 아주 잘해 주고 있고. 다만, 엘뤼엔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 네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주기 위해 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으응? 응, 그랬던 것 같아.”

“나도 그 점에는 동감하고 있거든. 네게는 의지할 장소, 더불어 네 자립을 도와줄 존재가 필요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무너지지 않게 다독여 줄 존재라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의미야?”

내 질문에 트로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종족이 있어. 우리 정령을 비롯한 인간과 엘프, 그리고 드래곤과 드워프, 몬스터들도 그중 하나지. 각자 삶의 방식도, 수명도 천차만별이야. 하지만 너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가장 먼저 인식했어. 하필이면 수명도 짧고, 가장 사회적인 성향이 강한 종족을 말이야.”

“……!”

“그래서인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지훈, 너 자신은 잘 못 느끼는 것 같지만. 누가 봐도 네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프리트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만 봐도 그래. 단순히 마음이 상냥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외면받는 게 무서웠잖아. 그렇지?”

“…….”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둔 치부를 그대로 꺼내 보인 기분이었다.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트로웰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야.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지훈은 다정하고 따뜻한 정령왕으로 기억될 거야. 하지만 그렇기에 이미 형성한 관계가 무너지게 되면 너는 그만큼 큰 충격을 받겠지. 특히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선 더더욱. 예를 들면…… 죽음 같은 거 말이야.”

지금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 나보다 어렸던 아이가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병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난 어쩌면 지금의 처지를 너무 낙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앞으로의 인생이 순탄하진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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