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6화 (26/608)

제26화

“그래서 그런 식으로나마 아이를 위하는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고 싶었나?”

“……!”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가 떨렸다. 발끈해서 고개를 들자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푸른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고요하기만 한 눈빛이었다. 그 탓에 나는 다시 우물쭈물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린애로군. 그런 정신 상태로 앞으로 자립이나 할 수 있을까.”

“나, 남이사! 어린애든 뭐든!”

“글쎄, 하지만 나 역시 한때 엘퀴네스였던 자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군. 난 엘퀴네스였던 과거에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내 직속 후배인 네가 이런 식으로 엉성한 걸 보니 진심으로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군. 상당히 곤란해.”

“윽…….”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사과까지 했는데 이렇게 무안을 줄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은 정말 나쁜 놈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이건 기억하나?”

“뭐, 뭘?”

“다시 만나게 되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지.”

‘헉! 또 무슨 흉흉한 짓을 꾸미려고?’

있지도 않은 털이 온몸에서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기겁한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 난 그런 거 필요 없……!”

“필요의 여부는 내가 결정한다. 네가 아니라.”

그런 게 어딨어!

선물이란 건 본래 받는 쪽에서 기뻐야 가치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엘뤼엔은 그 당연한 이치조차 깡그리 무시할 기세였다.

그가 불쑥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행여나 또 신력이 날아올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이어진 건 격렬한 통증이 아닌,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그와 함께 믿을 수 없는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너, 내 아들 해라.”

“……!”

* * *

여기저기서 막힌 숨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레히스와 이프리트는 물론, 주변에 있던 천사들조차 할 말을 잃고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연코 맹세하건대, 이 순간 나보다 더 이 상황이 황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뭐, 뭐라고?”

“이제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냐?”

“아니, 제대로 다 들었거든? 나더러 아들을 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데?”

“말 그대로, 내가 네 부모가 되어 주겠다는 거지.”

헉, 이번 것은 제법 충격이 컸다. 지금 저치의 입에서 부모란 말이 나온 거야? 나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얼굴에 일어나는 잔경련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잠깐 사이에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되지? 피가 이어진 건 아니지만 네가 내 일부를 물려받은 존재인 건 맞다. 내 힘을 이어받아 다음 대의 엘퀴네스가 된 존재니까, 어떻게 보면 내 계승자인 셈이지. 즉, 굳이 내가 이런 제안을 하지 않더라도 너는 날 아버지로 여기는 게 옳다.”

어, 그, 그런 거야?

왠지 그럴듯하단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나는 이프리트의 표정을 보고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와 같은 정령왕인 이프리트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나는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엘뤼엔을 향해 물었다.

“저기, 후계자라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그럼 그쪽도 본인의 전대 엘퀴네스를 부모처럼 여기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의 표정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지?”

“…….”

“무엇보다 나는 그런 관계를 바란 적도, 이상적으로 여긴 적도 없다. 이미 나 홀로 충분히 완벽했으니까. 너와는 달라.”

‘에에잇! 역시 그냥 날 놀리는 거였잖아!’

본인 스스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내게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엘뤼엔은 뻔뻔하게 내 의사까지 확인하려 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해! 절대 싫어! 됐거든?”

“흠, 거절한다는 건가?”

“당연하지! 그럼 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들일까 봐? 나도 아버지 같은 거 필요 없거든? 충분히 혼자서 잘 살 수 있거든?”

“그 말에 토라진 건가. 성격도 소심하군.”

“…….”

말끝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엘뤼엔은 그 분야에서 이미 챔피언을 거머쥐었을 거다.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아예 고개를 돌리고 그를 외면했다. 그러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엘뤼엔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게 명분을 준 것뿐이다.”

“뭐?”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이 네가 날 아버지라 여기긴 쉽지 않겠지. 그러니 내 일부를 물려받은, 내 계승자라고 생각하라는 거다. 그편이 좀 더 받아들이기 편할 테니까.”

농담치고는 너무도 진지한 어조였다. 그제야 나는 그의 눈빛에 서린 진심을 읽고 조금 당황했다. 설마 정말로 날 아들로 삼겠다고 한 거였나? 어째서?

“……동정하는 거야?”

모든 것에 허술하고 엉망진창인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던 걸까. 그래서 이런 황당무계한 제안을 할 정도로?

차라리 무시당하는 쪽이 더 나을 뻔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한 기분에 나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그런 내 모습에 엘뤼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조금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에이, 설마……. 저 엘뤼엔이 난감해한다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 그가 살짝 혀를 차며 말을 잇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난 이제껏 누군가를 동정해 본 일이 없어서 말이야.”

“…….”

“형벌의 신인 내가 하는 일은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뿐이다. 그 일엔 동정이란 감정이 스며들 틈이 없지. 이건 다른 부분에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동정이란 건 가여운 처지에나 쓰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 넌 너 스스로가 가엾다고 생각하나?”

“아니.”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그렇고 전생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가엾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가족과의 관계가 불편하긴 했지만 그 대신 주변에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나를 위하고 사랑해 주는 그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그게 누군가의 말처럼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나도 마찬가지다.”

“그, 그럼 왜 갑자기 날 아들로 삼으려고 하는 건데? 지금까지 그렇게 구박해 놓고선!”

“내가 널 언제 구박했다는 거냐?”

“덜떨어졌다느니, 어린애라느니, 너무 긍정적이라느니, 소심하다느니 그랬잖아! 그게 구박이 아니면 뭐야?”

“소심한 것도 사실이고, 긍정적인 것도, 어린애 같은 것도 전부 사실이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덜떨어졌다는 말은 네가 한 말이잖아.”

헉! 그,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잠시 당시 상황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다시 그를 쏘아보았다.

“아, 아무튼! 아들로 삼으려는 이유는 뭔데! 아직 그것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았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선물을 준다고 했잖아.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그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제법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헉! 말도 안 돼! 내 어디가?”

“글쎄, 건드렸을 때 즉각 반응이 돌아오는 점? 온종일 지켜봐도 별로 심심하진 않을 것 같군.”

내가 무슨 장난감이냐! 어이, 너희는 뭘 또 동조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의 옆에서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아레히스와 이프리트를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정말 딱이다. 이프리트는 그렇다 치고 아레히스 당신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 내게, 빙긋 미소 지은 엘뤼엔이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어쨌든 이제 이유도 다 알았겠다. 다시 내 제안을 수락할 기회를 주지. 설마 이번에도 거부할 생각은 아니겠지?”

“뭐? 나, 나는…….”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 거절할 시엔 내게 지금까지 건방지게 군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니까. 물론 반말을 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야.”

“내, 내가 언제 건방지게 굴었다고! 게다가 먼저 말을 놓으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

“놓으면 된다고 했지, 실제로 놓으라고 한 기억은 없다만.”

‘이, 이런 사기꾼 같으니!’

아무리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그딴 걸로 낚시를 하기야!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이러는 건 무슨 경우냐아!

그 순간 난 보고야 말았다. 엘뤼엔의 손바닥 위에 맺혀 가는 새하얀 빛줄기를 말이다. 틀림없는 신력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빛이 퍼지는 범위가 크다. 그렇단 건,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거겠지?

“저, 저기?”

“마지막 기회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런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엘뤼엔의 모습이 마치 지옥의 사신처럼 보였다.

저기, 엘뤼엔?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잖아? 게다가 그쪽은 특히 그중에서도 신이라는 직책을 맡은 고귀한 존재란 말이지. 신이라면 모름지기 폭력보다는 대화로 먼저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아무리 형벌의 신이라도 지켜야 할 도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다고나 할까. 아니, 그러니까 내가 꼭 맞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니고. 이게 다 그쪽을 생각해서…….

한순간에 수많은 말이 입가에서 마구 맴돌았다.

그러나 내가 머릿속으로 구상한 말을 내뱉는 것보다 엘뤼엔의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으니……!

“그래서, 이번 대답은?”

“하, 할게! 한다고! 한다니까? 아들 하면 되잖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젠장!”

엘뤼엔은 발악하듯이 소리 지르는 나를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력을 다시 꺼트려 없앤 다음,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에 어쩐지 자상함이 배어 있는 것같이 느꼈다면 그저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상하리만치 부드럽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도 역시 착각이길 바란다. 급조로 만들어진 아버지 따위에 기대고 싶어지길 바라진 않으니까.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들아.”

* * *

“자, 도착했습니다.”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정령계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훌쩍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아침 햇살에 눈부신 빛을 반사하는 에바스 에덴을 바라보다, 아레히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레히스. 여기까지 직접 데려다 주실 필요까진 없었는데…….”

“아닙니다. 이왕 모시게 된 거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요. 아무 일 없이 모든 용건을 무사히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한때는 어떻게 될까 봐 정말 조마조마했는데 말이죠.”

무작위에 걸려서 잘못 떨어지고 거기서 엘뤼엔을 만나고, 신력에 맞아 기절까지 해 보고. 정말 하룻밤 사이에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엔 거창한 부자(父子) 선언까지 하고 말이지.

그러자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레히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생기신 것,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아하하…….”

나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얼결에 수락하긴 했지만, 아직 아버지가 생겼다는 실감도 나지 않는데 축하를 받으니 미묘한 기분이다.

무엇보다 사는 세계가 이렇게 달라서야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기나 할까. 내 쪽에선 신계에 갈 방법이 없고 그렇다면 엘뤼엔이 오는 수밖에 없는데, 그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다는 건 사실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엄청 바빠 보였는데 말이지.

“난 인정 못 해!”

아직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 이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작 그 자리에 있을 땐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더니, 녀석은 뒤늦게 씩씩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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