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5화 (25/608)

제25화

아레히스 역시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란 모습이었다.

“상급 신의 일이 고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정말 굉장하군요. 그런데 제겐 무슨 일로?”

“짐작 가는 일이 있을 텐데.”

“짐작 가는 일이요?”

짐짓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묻는 그였지만, 왠지 어색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니 이미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엘뤼엔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눈썹을 살짝 꿈틀거린 그는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이야기를 끄는 것은 질색이다. 잊었다면 말해 주지. 소멸의 때가 되어 명계에 갔을 때 그대는 내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신이 되는 길과 내세를 걷는 길. 그렇지 않나?”

“네? 아아, 그, 그랬었죠.”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그때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기억하나? 개인적으론 기억하고 있길 바라는데 말이야.”

“……내세를 택하셨습니다.”

‘헉?’

짧은 침묵과 함께 이어진 아레히스의 대답에 나는 경악했다. 저 신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남자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내세를 택했다고? 아니,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지금 신이 되어 있는 거지?

놀란 것은 이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엘뤼엔과 아레히스를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귀찮은 것은 싫다― 그렇게 말했었지. 신이 되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많아지니 아무리 누릴 권리가 많다 해도 사양하고 싶다고. 그런 건 이미 지난 정령왕 시절로도 신물 나게 겪었다고 말이야.”

“맞습니다, 엘뤼엔 님. 그리고 저는 당신만큼 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분이 없으니 생각을 재고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지요.”

“그래, 그 말 그대로다. 하지만 나는 다시 거절했지. 또다시 선택의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역시 한 번쯤은 내세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이야. 그땐 그대도 그런 내 의사에 납득한 듯 보였다. 그런데…….”

잠시 말을 끊은 엘뤼엔은 서슬 퍼런 눈으로 아레히스를 노려보았다.

“왜 내가 신이 되어 있는 거지?”

“아하하…… 그, 그게…….”

“기가 막히더군. 그대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단순히 기분 탓이라 여겼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상급 신이라……. 게다가 엘뤼엔의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말이지. 나중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썩을 것들이 넘쳐흐르는 땅 바이톤을 담당하라고 서둘러 임명장이 오더군. 그때부터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나기만을 정말 손꼽아 기다렸다. 감동해도 좋아.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해 보기는 난생처음이니까.”

표정은 분명 웃고 있는데 주변에선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나는 황망한 기분으로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고 있는 아레히스를 바라봤다. 설마 아레히스, 당신……!

‘엘뤼엔을 속여 먹은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레히스는 손수건을 꺼내 흥건히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변명을 드리자면 저로선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와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윗선에서 공문이 내려왔었거든요.”

“……공문?”

“으음, 상급 신이 너무 부족하니 누구든 강제로 신의 길을 택하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엘뤼엔 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신계에 상급 신이 채 20명도 되지 않잖습니까? 본래 자격을 갖춘 영혼들이 전부 신이 되었다면 적어도 50명은 되어야 했습니다. 그마저도 상당히 적은 숫자죠. 그런데 다들 내세의 길을 고집하시니…….”

자격을 갖춘 영혼, 즉 신의 영혼들은 내세를 택해도 다음 생에서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얼마든지 내세를 경험하고 나중에 신이 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반대로 일단 한 번 신을 선택한 이후에 다시 내세로 가기 위해선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신의 영혼 대부분은 바로 신이 되기보단 내세를 돌아볼 것을 선택했는데, 그 때문에 신계의 인력이 극도로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상급 신의 업무는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신계는 오래도록 진통을 앓아 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래엔 결국 선택의 길에서 무엇을 택하든 무조건 신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엘뤼엔은 그것에 희생된 운 나쁜 첫 번째 타자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엘뤼엔은 잠시 기막힌 표정을 짓더니 곧 이를 갈 듯이 내뱉었다.

“그럼 내가 ‘바이톤’을 맡게 된 이유는?”

“상급 신의 담당 차원은 주신의 의지로 결정되는 겁니다. 주신께선 당신의 능력이 그에 합당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엘뤼엔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굉장히 화가 난 것이 분명한데 예상외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옆에 있던 이프리트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기, 이프리트. 주신이 그렇게 굉장해?”

“바보야, 당연하지. 주신은 신 중의 신이자, 모든 신들의 창조주라고. 그의 명령이 곧 이 세상의 법이자 진리야. 거역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전에 거역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걸?”

“헤에, 그렇구나.”

결국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주신 앞에선 전부 순한 양이 된다는 소린가.

‘너도 알고 보니 꽤 불쌍한 놈이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벌인 행동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얘길 듣고 나니 묵혀 놨던 10년 체증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참 쌤통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신이라는 존재를 너무 간과했던 모양이다. 그가 살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찔끔한 나는 되는 대로 지껄였다.

“뭐, 뭐야. 난 못 할 말 한 거 없거든? 쌤통인 걸 쌤통이라고 한 게 뭐가 나빠!”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은가 보군.”

“누, 누가 그렇대? 그, 그치만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보란 말이야? 신이면 다냐! 이건 횡포야! 독재자는 물러가라!”

빠르게 외치는 내 말에 아레히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이프리트는 저게 뭘 잘못 먹었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을 들은 엘뤼엔은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기운 채 무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재자라…….”

이번에도 바로 신력으로 칠 줄 알았는데 왜인지 재밌어하는 기색이다. 청공의 방에서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때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더 울컥해 버렸다.

“그래! 그러니까 당장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든가, 아니면 사과해! 무조건 때리고 기절시키면 다냐! 너 때문에 난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기억해 버렸거든? 최악의 악몽이었다고! 그러니까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하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어? ……아, 안 그러면…… 아, 그래! 화낼 거야! 엄청나게 무지무지 화내고 저주할 거라고!”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유치하고 황당한 답변인지. 말하는 나 자신도 얼굴이 뜨거울 정도인데 듣는 엘뤼엔은 오죽하랴. 이프리트와 아레히스는 아예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치만 나더러 어쩌라고! 정령왕의 능력으로 상급 신을 이기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냔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덤비지나 말 걸 그랬다. 때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지만 나는 철철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

“아, 아무튼 그러니까 당장 설명해! 굳이 그 마족에게 그렇게 잔인한 처벌을 내린 이유가 뭐냐고! 납득이 되면 날 때린 것도 그냥 넘어갈 테니까!”

“저주도 내리지 않고 말이지?”

“그, 그래!”

“내가 저주와 형벌을 관할하는 신이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인가?”

“…….”

헉, 맞다! 그랬지! 할 말을 잃고 얼어 버리자 옆에서 이프리트가 ‘바보……’라고 대놓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흡, 이왕이면 그런 소리는 작게 해 주면 안 되겠니? 굳이 그렇게 콕 집어서 알려 주지 않아도 되거든?

한동안 집무실 안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이 깨진 건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입을 열면서부터였다.

“……뭐 하나 아는 것도 없고 감정적이고, 기억력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고. 나설 때와 그렇지 못할 때를 구분하는 눈치도 없군. 그런 주제에 의협심만은 강해서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다라…….”

“윽…….”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찌르는 것 같다. 차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흠칫흠칫 어깨만 떨고 있는 내게, 그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역대 엘퀴네스 중에서 이런 타입은 처음이군.”

“나, 나도 내가 덜떨어진 거 알거든?”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누구 약 올리나? 이미 그렇게 들리도록 다 말해 놓고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냐고!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화를 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곧장 엘뤼엔의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마족이 왜 인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에? 그야…… 자기 아이를 죽였기 때문이잖아?”

내 대답에 그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말로 가장 웃기지도 않는 이유지.”

“무슨…….”

“마족은 모성애가 없다.”

“……어?”

또 우습게 여기는 건가 싶어 화를 내려는 찰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에 관한 설명을 이은 건 옆에 있던 이프리트였다.

“그건 사실이야. 마족들은 자기 알을 낳자마자 바로 버리는 종족이거든. 아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태어난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여기지도 않아. 심지어 자기의 마력을 확장하기 위해 잡아먹는 경우도 있어.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걸? 그래서 마계에선 알들을 회수해서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 계급이 따로 있을 정도야.”

“어? 정말? 그, 그럼 그 마족이 특이한 건가?”

“……인제 보니 지나치게 긍정적이기까지 하군.”

엘뤼엔의 한숨 섞인 소리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그를 노려봤다.

“그게 아니면? 왜 자기 아이를 죽인 인간들을 해친 건데?”

“당연한 것 아닌가? 그냥 학살을 즐긴 거잖아.”

“……뭐?”

“내가 담당한 이후로 규율이 강화되어 함부로 인간들을 해칠 수 없게 되니 그럴듯하게 구실을 만들어낸 거지. 어쩌면 본래 자신이 먹으려고 했던 어린 마족을 인간들이 못쓰게 해 놓은 것에 대한 화풀이일 수도 있고. 어쨌건 어느 쪽이든 네가 생각하는 애틋한 복수 따위가 아니라는 거다.”

“그런…….”

할 말을 잃고 망연해 있는 내게 엘뤼엔은 묵묵히 내가 미처 짚어내지 못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정말 모성애가 넘치는 타입이었다면 애초에 알을 방치하지도 않았겠지. 모르는 것 같으니 이것도 알려 줄까. 마족의 알에서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나려면 성인 마족이 주기적으로 알에 마력을 주입해야 한다.”

“……?”

“하지만 태어난 어린 마족은 극심한 영양부족이었지. 그 옆에 있는 인간들을 습격할 정도로 말이야. 그 어미가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소리다.”

“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오해일 뿐이었다는 건가?

하긴 아무리 신이라곤 해도 그렇게 무작정 잔인한 처벌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내려진 판결일 텐데, 나 혼자 불복하고 열을 내다니.

‘정말 내가 나설 일이 아니었잖아…….’

나는 혹시 무조건 나만 옳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신인 그보다 더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바보 같다, 정말.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몹시 창피해졌다. 도대체 무슨 낯으로 엘뤼엔의 얼굴을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설명이 됐나?”

“……으윽! 미, 미안해요. 난 그런 것도 모르고…….”

황급히 사과를 건네자 그는 만족의 표정 대신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에 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뭐, 뭐야. 대체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고작 사과 따위로 넘어가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이건가? 이번엔 또 얼마나 아프게 때리려고!

하지만 잠시 후 그에게서 나온 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인제 보니 상당히 이상한 부분에 집착하는 것 같군.”

“……에?”

“네가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족을 두둔한 건 그가 죽은 아이를 위한 복수를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상당히 실망하는군. 보통은 살육을 즐기기 위해 제 자식까지 이용하는 그 잔학한 성품에 놀라기만 할 텐데 말이야.”

“그, 그거야…….”

“청공의 방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지. 나와 신족의 부모와 자녀 같은 유대감이 부럽다고.”

그러자 아레히스와 이프리트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언제 거기서 그를 본 거냐고 묻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전혀 아는 척하지 않기에 그냥 넘어가 주는가 했더니 왜 갑자기 그 이야기는 꺼내고 그런담?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상당히 성공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어색하게 그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변명하듯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그때 그건, 딱히 깊은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은…….”

“그런 것치곤 꽤 집요한 시선으로 보던데.”

“그, 그럼 안 돼? 나는 신족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태어나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고. 신족이 신을 섬기는 일족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단 말이야. 신이 친히 이름을 붙여 주고 종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게 그냥 신기해서 본 것뿐이야.”

“신기하다라……. 하긴 그럴 만도 한가. 네가 행방이 묘연했던 지난 시절 동안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었다는 말은 들었다. 꽤나 부모란 자들에게서 정서적인 안정을 얻지 못하고 살았던 모양이던데.”

“……뭐?”

왜 갑자기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당황한 나머지 나는 무심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엘뤼엔은 그런 나를 차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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