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4화 (24/608)

제24화

“이놈의 자식, 죽어라! 죽어!”

둔탁한 타격 음과 함께 지독한 통증이 퍼진다. 이젠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동시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은 고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슴도치처럼 두 손 안에 머리를 말아 넣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아파! 아파요, 아버지!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닥쳐라, 이놈! 아버지는 누가 네놈의 아버지야! 당장 죽어 버려! 빨리 죽어서 그 재수 없는 면상 좀 내 눈앞에서 치우란 말이야!”

쨍그랑!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아픔이 퍼지고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다. 문득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나는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가, 곧 손을 들어 천천히 이마 부근을 매만졌다. 다시 내려다본 손바닥엔 붉은 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울컥 억울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대체……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아니, 그래도 이놈의 자식이?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려? 지금 내게 반항하는 거냐?”

“저는…… 전 단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

“허허, 그래! 네가 오늘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오냐! 내가 알려 주마!”

소매를 걷어 올린 거친 팔엔 어느새 두꺼운 쇠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오른 그것이 빠르게 내게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넌 태어난 것 자체가 죄였어!”

* * *

“으으음…….”

오랜만에 지독한 꿈을 꿨다. 이상할 정도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눈을 뜨자, 까마득히 높은 천장과 그 가운데 주렁주렁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정신이 몽롱한 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정령계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데 말이야. 아니, 그보다 난 왜 자고 있었던 거야?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먹통이라도 된 듯 깜깜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거라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방 안에 내가 누워 있다는 것 정도일까.

“윽…….”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섬뜩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통증에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꼭 아버지한테 붙들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다음 날 같은 것이…… 아아, 이래서 그런 꿈을 꾼 건가?

아마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평소엔 그저 무관심하기만 할 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폭력적이 되기 일쑤였다. 쌓아 둔 앙금을 단번에 해소하기라도 하듯 나를 붙잡고 폭행을 일삼았다. 어느 때는 일부러 술에 취하기도 했다. 부모와 형제들이 나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혹, 부모 형제와 유대감이 없지는 않았습니까?

언젠가 아레히스가 내게 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휴, 언제까지 이럴래, 강지훈.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됐잖아.’

이게 전부 다 아파서 그런 거다. 원래 사람(?)은 아플 때 정신이 약해진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굳이 내 탓은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아니, 근데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마치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 맞았다고?’

순간 머릿속에 퍼뜩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책상을 내리친 두 손바닥에서부터 퍼지던 진동, 휘날리던 종이 더미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

“맞다! 엘뤼엔! 그 자식! 아윽…….”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또다시 울리는 통증에 나는 침대 위에 엎어졌다. 이제 전부 기억이 난다. 내가 왜 이렇게 아픈 건지. 그렇게 왜 이런 곳에 있는지까지도!

콰아앙!

열 받아서 책상을 내리친 순간 깜짝 놀란 천사들과 달리, 나를 응시하는 엘뤼엔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흩날리는 종이 더미들을 잠시 못마땅하게 바라본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물러나.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뭐어? 아니, 나도 이런 때 나서는 게 주제 넘는다는 건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네 판정에 항의하고 있는 거잖아! 변명 정도는 하라고!”

“변명?”

“자식을 잃은 부모가 화나서 벌인 짓이잖아. 아무리 죄질이 나빠도 어느 정도는 감안을 해 줘야지. 그냥 곱게 죽여도 되는 걸 꼭 그렇게 잔인한 처벌을 해야겠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아!”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군.”

한숨을 내쉰 엘뤼엔은 들고 있던 서류 중 일부를 거칠게 책상 위로 던져 놓았다. 그리곤 한낮의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창문을 흘낏 보더니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본래 그가 가진 존재감도 그렇지만,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녀석이 바로 코앞에 서니 그 위압감은 실로 대단했다. 인간 같지 않은(실제로도 인간은 아니지만) 그의 화려한 외모 때문에 저절로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때야 탈출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뭐, 뭐야.”

“난 분명히 물러나라고 했다. 그 경고를 어긴 건 너야. 그러니 원망은 듣지 않겠어.”

“……뭐?”

그 직후,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새하얀 빛덩어리가 빠르게 쏘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언뜻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비명이 들린 것 같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하! 뭐야. 그럼 나 맞아서 기절했던 거야?”

고작 한 방에 쓰러진 나도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물러나라는 경고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때려서 기절을 시켜? 뭐 그딴 놈이 다 있어? 이프리트의 말대로 정말 성격파탄자였잖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온몸의 격통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다시 찾아가서 한마디 해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엘퀴네스 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레히스였다.

“아레히스, 여기가 어디예요?”

“엘뤼엔 님 궁처에 있는 손님방 중 하나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하긴 이건 괜한 질문이었군요.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모를까, 물의 정령왕의 치료술이라면 그런 통증쯤은 간단히 가라앉힐 텐데 말입니다.”

“에?”

헉, 맞다! 치료술, 나한테 그게 있었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자 아레히스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잊고 계셨습니까?”

“아하하…….”

나는 그제야 허둥지둥 내 몸에 치료술을 시전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욱신거리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 거 진작 할 것을.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아레히스는 잠시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엘뤼엔 님은 가볍게 기절시킨 거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심이 되어야 말이죠. 마신과 거의 비등하다고까지 알려진 그 강대한 신력으로 그렇게 무자비하게 내리치시다니.”

“에? 신력? 그 이상한 하얀빛 말이에요?”

“네, 맞습니다. 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힘이죠. 다행히 의식을 잃는 정도에서 끝나셨으니 망정이지, 운이 나쁘셨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바로 소멸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소, 소멸이요?”

그거…… 죽는다는 거지?

기겁해서 되묻자 아레히스는 한층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니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중간계라면 계약자의 마나를 빌어 임시 육체를 투영할 수 있으니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아서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이곳 4대 차원 내에선 본체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받은 타격이 곧장 목숨과 직결됩니다. 정령 분들은 워낙 중간계 쪽의 상황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이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더군요. 그래서 신계에 모셔 오길 꺼린 건데…….”

“으음, 소멸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야 강지훈 때처럼 혼령이 되어 저와 함께 명계로 가셔야 했겠죠. 그렇게 되면 아마 역사에 남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역대 정령왕 중에서 가장 짧은 임기를 보낸 정령왕으로 말입니다.”

그딴 걸로 역사에 남고 싶지 않아!

경직된 내 모습에 아레히스는 빙긋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했다. 무슨 농담을 저렇게 살벌하게 한담? 그마저도 참 그답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프리트는 어디 갔어요?”

“아아, 그분은 지금 엘뤼엔 님과 대화 중이십니다.”

“엑! 단둘이서요?”

뜻밖의 대답에 나는 질겁했다. 대화라니! 성격이라면 이프리트도 만만치 않은데 그 둘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리가 없잖아. 혹시 그 녀석도 나처럼 한 대 맞고 실려 오는 거 아냐?

단지 내 예상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차고 넘쳤다. 허둥거리는 나를 향해 아레히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엘퀴네스 님이 기절하셨을 때 이프리트 님이 조금 흥분하시긴 했지만, 그 외에 딱히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어? 그, 그래요?”

“예. 저도 조금 전까지 함께 있다가 엘퀴네스 님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잠시 빠져나온 겁니다. 걱정되시면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나는 냉큼 대답하고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프리트의 안전에 대한 걱정보다는 엘뤼엔을 만나서 담판을 짓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다짜고짜 공격해 놓고 이런 곳에 그냥 던져 놓다니. 이거야말로 노골적인 무시가 아닌가. 가만히 있어도 울컥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만만했다 이거지! 이번에야말로 그 높은 콧대를 왕창 꺾어 주고 말겠어!’

그러자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옆에서 아레히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잊지 마십시오. 이번에 맞으면 정말 소멸입니다.”

* * *

집무실 앞에 이르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프리트와 엘뤼엔의 목소리였다.

나는 살짝 문을 연 다음, 그 틈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살폈다. 그 둘은 작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뒤돌아선 탓에 엘뤼엔의 표정은 잘 알 수 없었지만, 맞은편에 앉은 이프리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아주 좋아 죽는구만.’

친구가 지금 사경을 헤매다(?) 왔는데 넌 그렇게 만든 범인 앞에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싶더냐!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정신없이 엘뤼엔을 바라보고 있던 이프리트가 흠칫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까, 깜짝이야. 어? 뭐야, 엘퀴네스. 지금 깨어난 거야, 너?”

“어째 깨어나서 아쉽다는 투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이프리트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우물거리는 동안 나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엘뤼엔을 노려보았다. 그는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중이었다.

순간 욱하는 기분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와 결판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아레히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말씀들은 다 나누셨습니까?”

말을 건넴과 동시에 그의 잔잔한 눈빛이 슬쩍 나를 향했다. 그것을 보자 이곳에 오기 전 그가 했던 경고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 맞으면 정말 소멸입니다.

“…….”

아무리 내 머릿속이 객기로 가득 찼어도 선뜻 무시하기 힘든 말이었다. 잠깐 겪어 본 것뿐이지만 저 엘뤼엔은 정말 화가 나면 서슴없이 날 죽일 수 있는 남자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고작 이런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은가.

‘으으, 정말 뭐 이래!’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이프리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이프리트가 잠시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다시 엘뤼엔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을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그땐 정말 다시 생각해 주는 거지? 응? 엘뤼엔.”

“……글쎄.”

“치이, 신이 되더니 더 무뚝뚝해졌어.”

“나야말로 지금 네 태도가 적응이 안 되는군. 나만 보면 시비 걸기 바빴던 것 같은데 말이야.”

“어머,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호호호…….”

“…….”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기절한 그 사이에 둘의 관계가 상당히 진척된 것만은 분명했다. 형벌의 신이라는 사실에 경직될 때는 언제고, 두 눈이 하트 모양이 돼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니 배알이 조금 뒤틀렸다.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콧소리라니! 이래서 여자들이란!

“하하, 정말 화목한 분위기로군요. 전대의 정령왕과 현대의 정령왕 분들이 이렇게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명계의 신으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눈치 없는 아레히스는 덩달아 들뜬 얼굴로 감탄을 연발했다.

그때 돌연 엘뤼엔의 눈빛이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 그대에게는 따로 할 말이 있었지.”

“예? 제게 말씀입니까?”

의아하게 바라보는 아레히스를 향해 엘뤼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입가에 서린 웃음이 조금 비틀린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긴 하군. 정령왕의 임기를 마치고 명계에서 봤을 때 이후 처음인가? 그 뒤로 쭉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보다시피 일이 너무 쌓여 있어서 말이야. 통 시간이 나지 않더군.”

‘헉! 저 엄청난 종이 더미가 정말 서류였다고?’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는 다시금 방 안 전경을 질린 기분으로 돌아보았다. 신이 되면 탱자탱자 놀고먹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일거리에 치여 살 줄은 몰랐다. 이래서 세상일은 겪어 봐야 안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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