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궁전 앞에 이르자 거대한 홀이 우리를 반겼다. 새하얗고 정갈한 느낌의,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다만 알려진 명성(?)과는 다르게 궁전 내부는 상당히 고요했다. 심지어 청소하는 하인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 아닐까요?”
“아뇨, 엘뤼엔 님은 궁처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으신 편입니다. 유난히 조용한 건 그분이 번잡한 걸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신들의 연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셨을 정도니까요. 그 때문에 처음엔 그분의 외모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었죠. 특히 허락도 없이 방문하는 자들을 아주 질색하셔서…….”
“윽! 그거 괜찮아요? 우리도 허락 안 받고 온 거잖아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그게 뭐야!
애매하게 웃는 아레히스를 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만큼은 이프리트도 질린 표정이었다.
“설마 아무 대책 없이 온 거였어요?”
“으음, 아니라곤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사실 저도 신이 되신 이후의 엘뤼엔 님을 뵙는 건 처음이라……. 하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이미 저희가 이곳에 접근한 걸 느끼셨을 텐데, 지금까지 아무런 반격 조치가 없었잖습니까?”
“반격 조치라뇨?”
“번개를 내리거나, 화염구를 떨어트리거나, 갑자기 땅이 꺼지거나, 그밖에 이것저것…….”
……그냥 통과할 수 없는 곳이었어?
방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온 그 길에서 사실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안쪽이 다 서늘했다. 물론 아레히스는 고작 그 정도에 죽지는 않는다고 상큼하게 대답했지만. 그럼 다치는 건 괜찮다는 거냐, 이 자식!
“어쨌든 그런 과정이 없었다는 건 이미 반은 허가를 내주셨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보인다구요?”
“아하하. 아니, 정말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그분의 수행천사가 나올 겁니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등 뒤에 여섯 장의 날개를 달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천사였다.
“망자의 신 아레히스 님과 두 분 정령왕을 뵙습니다.”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천사의 모습에 나와 이프리트는 당황하여 서로 바라보았다. 그런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인 천사가 단정한 어조로 말했다.
“엘뤼엔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 * *
“……어?”
천사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엘뤼엔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나는 문득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복도의 벽면 위쪽, 가장자리에 작은 문양이 일직선으로 쭉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새겨진 모양이 어디선가 본 듯 몹시 낯이 익었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자, 옆에 있던 아레히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엘퀴네스 님?”
“아뇨, 저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네? 아아, 신의 문양 말입니까?”
“에?”
……신의 문양이라고?
그 순간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텁텁한 기분이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향해 아레히스는 담담히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신들은 각기 자신을 상징하는 고유의 문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새하얀 천칭에 뱀이 휘감겨 있는 문양은 이 궁처의 주인이신 엘뤼엔 님의 표식이지요.”
“……잠깐만요. 그 표식이란 거, 설마 천사들의 이마에도 새겨져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아니겠지? 절대 아닐 거야. 아무렴, 아니어야 하고말고!
나는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간절하게 아레히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내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는 말을 꺼내고 말았으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로 맞히셨습니다. 신족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이 섬기는 신의 문양을 이마에 새기고 태어납니다.”
“헐……?”
“왜 그래, 엘퀴네스?”
굳어 버린 내가 이상했는지 이프리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나는 패닉에 빠져 허둥거리는 상황이었다.
“저기, 자, 잠깐만 기다려. 나 지금 막, 방금, 몹시도 불길한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난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뭐?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사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굳이 그를 만나 볼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 엘뤼엔에게 용무가 있는 건 너 혼자잖아. 안 그래, 이프리트? 아하하! 그런 의미에서 난 이만 돌아갈 테니, 넌 여기 남아서 실컷 해후를 즐기고 천천히 돌아오면…….”
그러나 나는 미처 말을 다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때마침 나타난 고풍스러운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천사가 사무적인 어조로 통보해 왔던 것이다.
“다 왔습니다.”
헉! 벌써 다 왔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천사가 문고리를 잡아당긴 뒤였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가 내게는 마치 지옥의 입구가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바짝 얼어 버린 나를 향해 천사는 그 고운 얼굴만큼이나 다정한 어조로, 지옥의 언어를 속삭였다.
“들어가시지요.”
“…….”
“뭐 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지 않고.”
결국 나는 강제로 등을 떠미는 이프리트의 재촉에 못 이겨 억지로 문 안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저기, 이프리트. 애타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 이러지 좀 말아 줄래? 지금 나는 너보다 더 심장이 벌렁거려서 미치겠거든? 네 쪽은 아련한 첫사랑의 그리움에 들뜰지 몰라도 난 이 만남에 생명이 걸려 있다고!
물론 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외침일 뿐, 현실의 나는 이미 들어선 내부의 정경을 착실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산처럼 쌓인 종이 더미들이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거대한 종이의 산이 높은 탑처럼 천장까지 아슬아슬 닿아 있었다. 분명 집무실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종이 천지라니.
‘설마 이게 다 서류인 건…… 아니겠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 엄청난 종이 산 주변엔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천사들이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태였다.
나는 그들 중에서 어렵지 않게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새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 나드엘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붙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슬쩍 종이 산의 너머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묵직한 종이 뭉치들 사이에 조금 튀어나온 원목의 책상, 그 앞에 약간 비틀어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색의 화사한 머리칼에 정신이 멍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 청공의 방에서 나를 농락(?)한 그 신이 틀림없었다.
‘네가 엘뤼엔이었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고많은 신 중에서 왜 하필 거기서 만난 신이 엘뤼엔이란 말인가.
그는 한 손에 깃펜을 든 채,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 분명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강하게 움켜잡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뻣뻣하게 굳어 있는 이프리트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의 의연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누가 보기에도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부릅뜬 눈으로 입술을 악문 모습이 어찌 보면 조금 웃기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목구멍으로 심장을 토해낼 것 같다는 게 바로 이런 표정이 아닐까.
“어, 어떡하지? 엘퀴네스가 맞아. 머리 색깔이 달라지긴 했지만…… 맞아. 틀림없는 그 녀석이야.”
“엘퀴네스는 난데.”
“이익!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아니, 난 그냥 긴장 좀 풀어 보라는 뜻에서…….”
어설프게 웃자 이프리트는 새파란 시선으로 날 쏘아보았다. 하지만 본래라면 바로 이어져야 했을 타박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입을 벌리는 순간, 곧장 이어진 나직한 음성 때문이었다.
“시끄러워.”
“……!”
음성의 주인은 바로 엘뤼엔이었다.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하더니 대화는 전부 듣고 있었던 건가? 그는 동시에 입을 다문 나와 이프리트를 흘낏 곁눈질로 응시한 다음, 이내 옆에 서 있던 천사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다음 건은?”
“제36구역에 일어난 소동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제36구역? 거긴 빈민가 아닌가?”
“예, 맞습니다. 그곳의 인간 주민들이 우연히 접촉한 마족과 문제가 벌어졌는데, 이에 관한 보고입니다.”
“……또 그놈들인가. 빌어먹을 놈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이지?”
건성건성 대답하는 엘뤼엔의 목소리엔 희미하게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들고 있는 서류의 검토도 한눈에 대충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건의 발단은 어린 인간 아이가 무심코 마족의 알을 주운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침 부화 직전이었던 알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어났지만, 그 속에서 태어난 마족 아이는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자신을 주워온 인간 아이는 물론, 주위에 있던 다른 인간들을 습격해서 그 피를 취했습니다. 그에 놀란 인간들이 자경단을 형성하고, 오랜 추격 끝에 마족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마족 아이의 어미인 여성 마족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여성 마족은 분노에 차올라 제36구역의 인간들은 물론, 근처 도시에까지 넘어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로 인한 사상자가 3천 명이 넘습니다.”
“그 마족은 잡았나?”
“예, 궁처로 끌고 와 모든 마력을 봉쇄하고 지하 감옥에 구금해 둔 상태입니다. 엘뤼엔 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쯧…….”
엘뤼엔은 짧게 혀를 찬 다음 들고 있던 깃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애초에 마족의 알이 왜 바이톤에 떨어진 거지? 모든 마족의 알은 마계의 금역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도 그 이유까지는…….”
“……망할 카노스, 그놈 짓이군.”
짧게 투덜거린 엘뤼엔은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덮었던 머리카락 일부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 간단한 동작조차 TV 광고 속에 등장하는 모델처럼 우아하다. 지켜보는 이프리트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네.’
학살을 한 건 물론 그 마족이 잘못한 거지만, 애초에 원인은 마족 아이를 죽인 인간들에게 있다고 봐도 무관했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를 죽인 놈들을 가만히 놔두겠는가? 이성을 잃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반대로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어리다 해도 사람을 습격하는 마족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방어가 최우선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마족 아이가 나빴다고 하기엔 단순히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니 무조건 탓을 하기도 애매하고.’
엘뤼엔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까? 나는 명심판관의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근두근한 가슴을 안고 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펼쳐진 현실은 기대만큼 따뜻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았다.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것을 느껴야 했다.
“태형 천 대. 그 후 피부를 전부 벗겨 낸 다음 염전에 던져 넣어.”
“예? 하지만…….”
“죄질이 나쁜 놈을 그냥 곱게 죽여 줄 순 없지. 무고한 생명을 3천이나 해쳤다면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나? 마침 새로운 본보기가 필요했는데 잘 됐군.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서 몸부림치다 죽어 가게 해라. 그리고 시체가 되거든 꼬챙이에 꿰어 마계에 던져 놔. 누구도 다신 그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엘뤼엔 님.”
맙소사! 정말로 그런 잔인한 형벌을 내린다고? 아무리 형벌의 신이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콰앙!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에 나는 현재 상황도 잊고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책상을 내리치는 순간, 놀란 천사들과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넌 선처라는 말도 모르냐! 어떻게 그런 끔찍한 벌을 내릴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