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화 (22/608)

제22화

“에에잇! 내가 놓으라면 못 놓을 줄 알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대체 어디서 뭐 하는 신이야! 이름이나 밝혀! 처음 만났을 땐 자기소개가 기본이라는 거 몰라? 비겁하게 내가 엘퀴네스라는 건 알고 있으면서 자기 이름이랑 정체는 전부 쏙 빼놓다니!”

“비겁? 나는 내 능력으로 널 알아본 거다. 너도 알고 싶다면 재주껏 스스로 알아내지그래.”

“뭐어? 그런 게 어딨어! 나는 딱 봐도 정령인 게 티 나잖아! 게다가 정령왕은 고작 4명밖에 없다고! 세상에 4명밖에 없는 정령왕 중 한 명이랑,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신 중 한 명이랑 누가 찾아낼 확률이 더 크겠어? 딱 봐도 내가 더 불리하잖아!”

“흐음, 발에 치일 정도라…….”

“그래! 게다가 나는 지금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신계에 온 거란 말이야! 그런 거 조사하러 다닐 시간 없거든? 정령계를 오래 비울 수 없는 몸이라고!”

“그건 네 사정이지.”

“……이익!”

내가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런 녀석과 다투고 있는 거지? 심지어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 상대방은 여유만만하게 내 반응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심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씩씩거리고 있는 내 머리를 툭툭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재밌는 녀석이란 건 잘 알았다. 더 놀아 주고 싶지만 이만 헤어져야 할 시간 같군.”

“뭐어? 놀아 주긴 누가……!”

“저기, 널 찾으러 온 것 아닌가?”

“……!”

그 순간 뒤편에서 나를 부르는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나는 멀찍이서 달려오는 낯익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였다.

“이프리트! 아레히스! 여기예요, 여기!”

반가운 나머지 나는 양손을 번쩍 들고 크게 흔들었다. 그때 내 머리를 헝클듯 쓰다듬은 남자가 나직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날 만나게 되면 선물을 주지.”

“……에?”

다시 만나게 되면, 이라고?

뭔가 이상하단 느낌에 나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바로 보여야 할 그의 모습은 어느새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그 옆에서 공손히 서 있던, 갓 태어난 신족 나드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어라?”

“엘퀴네스 님!”

“엘퀴네스! 이 바보야!”

그 사이 한달음에 달려온 두 사람이 나를 부여잡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괜찮으십니까?”

“멍청아! 너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우리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사색이 되어 나를 살피는 아레히스와 달리 이프리트는 곧장 타박부터 건넸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냥 문을 열고 나왔더니 여기였는데 어쩌라는 거야. 얼굴을 찌푸리자 아레히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무작위에 걸리셨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무작위?”

그러고 보니 금발의 남자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레히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차원의 이동을 관장하는 상급 신 하이튼 님은 장난이 몹시 심한 분이시죠. 간혹 이동 구간을 불규칙하게 만들어 엉뚱한 곳에 떨어지게 하는데, 이럴 때 무작위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연결의 문을 건드리신 적은 없었는데……. 아마 잠시 손보시는 사이에 엘퀴네스 님이 들어가신 모양입니다.”

뭐야, 결국 내가 운이 억수로 없었다는 거잖아.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향해 이프리트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어떻게 된 게 뭐 하나 한 번에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니? 하여튼 사건을 사서 만드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니까.”

“그게 내 탓이냐. 나도 놀랐거든?”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지셨으니 운이 좋으신 겁니다. 무작위에 잘못 걸리면 차원의 틈새에 빠져 영원히 한길 속에서 헤매거나, 자칫 손을 쓸 수 없는 위험한 장소에 떨어지기도 하거든요. 특히 지옥 같은 곳에 빠졌다면 다시 나오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겁니다.”

아레히스는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곤 기가 질린 채 서 있는 나와 이프리트를 향해 다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어서 이곳을 나가도록 하죠. 이곳 청공의 방은 신족들의 탄생수가 자라는 곳으로, 상급 신 외에는 출입이 엄히 단속되는 신계의 금역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문지기에게 부탁하여 겨우 들어올 수 있었지만 오래 지체할 순 없습니다.”

“에? 상급 신?”

“예, 왜 그러십니까?”

“아하하. 아니에요, 아무것도.”

뭐야, 그럼 그 금발 남자가 상급 신이었다는 거야?

하긴 보는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이긴 했다(그 이유에 외모가 반 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레히스도 신이긴 하나, 그 남자 앞에 설 때만큼 위축되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난 그런 대단한 존재에게 반말을 하고 화까지 냈던 건가. 게다가 신 따윈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는 말까지 했었지, 아마?

다시 날 만나게 되면 선물을 주지.

이 순간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오른 건 단지 우연만이 아닐 것이다. 그땐 무슨 헛소리인 건가 싶어 그냥 넘겼는데, 아무래도 그냥 단순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한 건 저 선물이란 것이 절대 좋은 의미의 선물일 리는 없다는 거겠지.

‘왠지 대형 사고를 친 것 같은 기분이…….’

나는 흐르는 식은땀을 남몰래 닦아냈다. 그 녀석이 그냥 가 버려서 천만다행이다. 이대로 돌아갈 때까지 다신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신계는 청공의 방을 포함한 13개의 금역과 189개의 성역, 2,069개의 개방터, 그리고 무한한 신의 궁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곳에서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령계와는 그 규모 면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실제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난센스지만).

“우와…….”

곳곳마다 펼쳐진 언덕과 들판, 아름답게 가꾸어진 가로수들을 보며 나는 연방 감탄을 내뱉었다. 신들이 사는 곳이니만큼 굉장할 거란 건 익히 예상했던 바지만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어딘지 공기 중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엘뤼엔 님의 궁처는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아레히스는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나와 이프리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앞서 걷고 있는 그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으며 물었다.

“저어, 아레히스. 신들은 모두 자신의 궁처를 갖고 있다고 했죠? 그럼 아레히스도 이곳에 궁처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신전 규모의 협소한 수준이긴 하지만요.”

“신마다 궁처의 규모가 달라요?”

“궁처는 대개 본인이 지닌 신력에 영향을 받아 형성됩니다. 그 때문에 저와 같은 중하급의 신들은 대개 저택이나 신전 수준의 작은 궁처를 가지는 편입니다. 그에 비해 상급 신의 궁처는 굉장히 크죠.”

“헤에, 그렇구나.”

“저기, 저 궁전 보이십니까?”

아레히스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린 난 거대한 성벽이 둘러싼 궁전의 모습을 곧장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 숲의 한가운데 이어진 오솔길이 우뚝 솟은 유백색의 궁전과 어우러진,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굉장히 예쁜 성이네요. 저게 상급 신의 궁처인 건가요?”

“맞습니다. 꽃의 여신 프라워스 님의 궁처입니다. 신들의 궁처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지요. 그 외에도 상급 신들의 궁처는 대개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지금 저희가 찾아가는 엘뤼엔 님의 궁처도 마찬가지고요.”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엘뤼엔의 궁처는 그의 말처럼 정말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입구에서부터 성에 이르기까지 걷는 거리만 한 마을의 크기에 해당할 정도로 길었는데, 쭉 이어진 돌바닥이 전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었다. 양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숲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하프처럼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지니고 있는 신력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다고 했던가. 주변 경관만 보아도 이곳에 사는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뤼엔은 무슨 신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꽃의 여신이라든지 차원의 이동을 관할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신마다 불리는 호칭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레히스는 망자의 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으음, 그게 궁금하십니까?”

그러자 차분하던 아레히스의 눈빛에 처음으로 미미한 동요가 일었다. 뭔가 꺼림칙해하는 표정이랄까. 지금까지 나서서 설명해 주는 일은 있을지언정 묻는 말에 대답을 회피한 적은 없었기에 나는 조금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이프리트 역시 조바심이 난 표정이었다.

“음, 엘퀴네스 님. 신들은 전부 타고난 속성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내부에서도 다시 자잘하게 갈라지긴 합니다만, 일단 크게 나누면 천의(天意)속성과 마(魔)속성으로 구분됩니다.”

“알아요. 엘뤼엔은 마속성의 신이라고 했잖아요.”

내 대답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천의속성이 인간의 선한 감정이나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진다면, 마속성은 그 반대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 물론 속성이 그렇다 해서 그것을 담당하는 신의 성정까지 선악으로 가려지는 건 아닙니다. 전부 인간들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부분들이니까요. 사건이 잦고 더 다루기 까다롭다는 점에서 마속성의 신들이 천의 속성보다 더 강한 신력과 담대한 성정을 갖긴 합니다만, 어쨌든 담당 영역과 본 성격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지요.”

사족이 길었지만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무서운 호칭을 지녔다고 해서 미리 편견을 갖지 말라는 게 아닌가.

‘대체 얼마나 흉악한 칭호기에…….’

사실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았다. 이미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천의속성이었다면 그게 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선지 이프리트도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엘뤼엔 님이 담당하신 차원이 ‘바이톤’이라고 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아, 네. 기억해요.”

“여러분이 다스리는 아크아돈과 같이, 수많은 중간계 차원 중에선 4대 차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지역이 몇 개 있습니다. 바이톤도 그중 하나로, 마계와 하나의 통로로 연결이 되어 있죠. 거의 제2의 마계와 다름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몇몇 상급 신이 담당하셨다가 몇 년도 안 돼서 포기했던 차원입니다.”

“……!”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자 아레히스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은 본래 이곳 신계에 속하던 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정이 너무 난폭한 나머지 다루기가 무척 까다로웠죠. 능력은 신족과 거의 다름이 없는데 피와 살육을 즐기고 매시간 치열하게 다투는 것에만 시간을 쏟았거든요. 당연히 그들이 머무는 곳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창조한 마신께서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하다 판단하시고, 그들 종족끼리만 머물도록 한 차원에 가둬 버리셨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마계입니다.”

“……어떤 종족인지 알 만하네요.”

“정말 엄청난 일족이죠. 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마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끝이 나지 않을 겁니다.”

어쨌건 마계가 생긴 이후로 신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자신들의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신이 쳐 둔 결계로 인해 마족들은 누군가의 소환을 받지 않는 한 직접적으론 중간계에 내려갈 수 없었다. 간혹 한두 마리 정도가 내려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그 차원을 담당한 신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만 끝났다면 그저 한때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모두를 경악하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 생겼다. 바이톤이라는 이름의 어느 중간계 차원에서, 한 인간 마법사가 마계와 연결되는 차원의 통로를 뚫어 버리고 만 것이다.

“……헐, 그게 가능해요?”

경악하는 내게 아레히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주신이 직접 창조한 종족입니다. 그래선지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죠. 가장 힘이 없고 나약해 보이면서도 때때로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곤 하거든요. 아마 전 종족 중에서 유일하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일 겁니다.”

“기적이라…….”

“차원의 벽을 허문 것이 기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참담했다. 연결 통로를 통해 바이톤으로 뛰어든 마족들이 무차별적으로 그곳의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갇혀 살았던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마족들은 빠르게 바이톤을 점령했다. 본래 그곳을 담당하고 있던 신이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사이 바이톤은 완전히 마계에 복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차원 연결을 담당하는 신들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끔찍했습니다. 그 이후로 바이톤을 담당하는 신들마다 전부 피를 토하실 정도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셨죠. 마족들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기존의 주민들을 그들에게서 보호까지 해야 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마족들을 감당할 수 있는 신은 아마 마신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을 창조한 분이기도 하지만 신 중에서 가장 강하시거든요. 그거 아십니까? 그런데도 마계를 담당하는 상급 신이 두 분이나 됩니다.”

“엣? 두 명이요?”

“예, 마신인 카노스 님과 지옥의 신 크라제 님 입니다. 마족들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자꾸 사고 치면 지옥에 처넣어 버리겠다고 마신이 지옥의 신을 섭외하셨죠. 그런데 거기서 또 제2의 마계가 만들어진 겁니다.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습니까?”

“…….”

알다마다. 너무 소름 끼치게 실감해서 오히려 탈일 정도다. 맙소사. 그런데 그런 위험한 곳을 전대의 엘퀴네스가 담당하게 되었단 거야?

갑자기 백마 탄 왕자에서 조폭들에게 시달리는 말단 형사로 이미지가 바뀌는 건, 비단 내 생각만이 아니겠지.

이미 이프리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는 매달리듯 아레히스의 옷깃을 붙잡고 물었다.

“에, 엘뤼엔은 괜찮은 건가요? 그는 무사해요?”

거친 호흡을 삼키며 떨리는 손끝으로 가슴을 부여잡는 모습이 마치 전쟁에 나간 연인의 안부를 확인하듯 비장하다. 그러나 아레히스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혹시 전대 엘퀴네스 님의 새로운 이름인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나와 이프리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레히스 역시 이미 그럴 거라 짐작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다시 이어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이프리트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엘뤼엔은 신어로 ‘파괴하다’라는 뜻입니다.”

“……네?”

“크리노는 ‘심판하다’, 루사테는 ‘헐다’ 또는, ‘파멸시켜 죽이다’……라는 뜻이지요.”

뭐, 뭐야. 무슨 이름 뜻이 다 그따위야?

듣기만 해도 전신이 오싹할 만큼 무시무시한 이름이다. 발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저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아레히스가 생긋 웃었다.

“마속성의 최고신이신 엘뤼엔 님이 관할하시는 영역은 ‘저주와 형벌’입니다. 그분께 바이톤보다 적절한 차원이 없다고 판단하신 건 바로 주신이십니다. 그러니 두 정령왕들께서는 그분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저주? 형벌?”

“예, 그중에서도 특히 형벌 쪽에 특화되어 계시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최근 마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은 마신이 아니라 바이톤의 ‘엘뤼엔’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랍니다.”

“…….”

‘그런 건 진작 말해!’

괜히 걱정해서 손해만 봤다. 황망한 심정에 나는 이프리트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살아온 세월은 무시할 수 없는 건가. 그는 달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당연하다는 태도다. 그 녀석은 그럴 만도 해, 라니! 넌 대체 어떤 괴물을 좋아했던 거야!

‘그 녀석이랑 만나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번 만남엔 액운이 낀 것이 분명하다. 하늘이 다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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