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1화 (21/608)

제21화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는 어떻게 됐지? 괜찮은 건가?’

나는 나보다 앞서 이런 상황을 겪었을 녀석의 모습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이프리트가 아닌 크고 거대한 나무 한 그루였다.

단순히 크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한 게, 기둥의 크기가 성인 십수 명이 둘러싸도 다 끌어안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잔가지의 굵기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나무줄기만 한 듯했다.

이 거대하고 큰 나무는 가지마다 주렁주렁 새하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나무의 덩치만큼이나 열매의 크기 또한 비정상적으로 컸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그저 신계의 나무는 상당히 크다고만 여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매를 자세히 본 순간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껍질이 투명하도록 얇은 탓에 그 안에 들어찬 내용물이 적나라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물의 정체가 무려…….

“사, 사람? 사람이잖아!”

나무에 열린 열매,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아니라 다 자란 성년의 모습을 한 사람 말이다.

뭐야, 이건! 설마 이곳 사람들은 나무에서 열리는 건가? 아니면 저 나무가 식인 습성이 있어서 사람을 잡아다 가둬 둔 건가아!

패닉에 빠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당장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무가 너무 거대하다 보니 열매에 손이 닿지도 않을뿐더러, 건드려도 되는 상태인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바스락.

“……!”

그 순간 들려온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프리트나 아레히스가 나를 찾아온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어?”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건 생전 처음 보는 금발의 남자였다. 심지어 엄청나게 잘생겼다! 그동안 정령왕들이랑 살면서(?) 꽤 미남 미녀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을 단번에 무너뜨릴 정도였다.

어깨 부근에서 가볍게 묶어 허리 아래까지 늘어트린 백금색의 머리칼은 한 올 한 올 순금을 뽑아 만든 듯이 반짝거렸고, 피부는 상아로 빚은 듯 희었다. 시린 얼음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동자는 연한 물색을 띠어 더 신비롭게 보였다. 마치…… 그래, 보석으로 빚은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 살아 있는 조각 같은 미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빛이 무언가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야, 넌.”

헉! 목소리도 좋잖아.

듣는 순간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로 낮고 울림이 좋은 미성이다. 그래선지 처음부터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데도 그것이 거슬리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바보같이 생각해 버렸다. 뭐 이런 사기적인 캐릭이 다 있어?

잠시간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급히 두 손을 저었다.

“아,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정령왕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에?”

“……게다가 너 하나만이 아니군.”

우왁, 대단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놀라서 굳어 있는 동안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뜨겁고 건조한 기운에, 습하고 칙칙한 기운이라……. 문이 열렸다 했더니 명계의 짓인가.”

잠시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빨리 돌아가라. 너희가 정령계를 오래 비우면 골치 아파지니까.”

“앗! 저, 저기요. 잠시만요!”

지나쳐 걸어가던 그는 내 부름에 다시 무심한 시선을 보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라는 표정이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가. 머뭇거리면 그냥 가 버릴 것 같은 예감에 나는 급히 말을 내뱉었다.

“실은 제가 지금 뭐가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뭐?”

“여기가 신계 맞나요?”

내 질문이 그렇게 이상했나?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곧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덧붙이자면 그중에서도 청공의 방이다.”

“청공……?”

“모르고 온 건가?”

“네에, 전 그냥 떨어져 보니까 여기라서……. 헉! 그럼 여긴 신들의 회랑이랑은 전혀 다른 곳인 건가요? 전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무작위에 걸려들었군.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지.”

그는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망할 하이튼 놈이 어쩌고 투덜거리는 것 같다)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그리곤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보이나?”

그가 지목한 건 조금 전 내가 발견하고 경악했던 바로 그 거대한 나무였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저 인간이 달린 나무…….”

“인간이 아니라, 신족이다.”

“……에? 신족?”

내가 이해하지 못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다시 얼굴을 찌푸리곤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짜증이 난 건가 싶어 식은땀을 흘리는데, 그가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기다려.”

“네?”

그는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나를 놔두고 성큼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가득히 열려 있던 열매 중 하나가 살짝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이다.

“……!”

땅에 떨어진 후에도 열매는 마치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좌우로 꿈틀거렸다.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이러한 파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눈을 감고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때 지이익― 무언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복숭아처럼 굳게 몽우리 진 열매의 끝 부분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갈라진 틈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쿠욱― 촤아아!

껍질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천천히 양옆으로 밀려 나갔다. 그때마다 안을 채우고 있던 액체가 폭포수처럼 터져 바닥으로 흘렀다. 부푼 볼처럼 빵빵하던 열매의 부피가 절반으로 줄어든 건 순식간이었다. 이제 남은 건 탄력을 잃고 쭈그러든 껍질과 그 아래 덮인 사람뿐이었다.

‘주, 죽었나?’

열매가 터진 이후에도 그 속에 있던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 다가가려고 하자 그때까지 무심히 지켜보던 남자가 팔을 뻗어 나를 제지했다.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살아 있는지는 살펴야…….”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당연히 살아 있다. 이제 막 태어났으니까.”

“네?”

태어났다고?

나는 무슨 의미인지 묻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늘어진 껍질 안쪽에서 들썩이는 미동이 느껴졌다. 의식을 차린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쿨럭, 쿨럭!”

작은 기침을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새하얀 머리칼과 분홍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고개를 든 그녀의 이마 위에는 특이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두 개의 저울추를 매단 천칭을, 기다란 뱀이 감싸고 있는 문양이었다.

‘무슨 낙인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이 든 이유는 문양 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상처를 만든 것이 아니고서야 저런 자국이 생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보통 낙인이 붉은 자국으로 남는 것과는 달리 소녀의 이마의 문양은 새하얀 색이었다. 그래선지 아프거나 징그럽다는 느낌보다는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잠시 멍하니 그 문양을 바라보던 나는 곧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소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열매의 껍질 부분으로 몸을 감싸고 있긴 했지만.

“저, 저기, 괜찮아요? 일단 옷을…….”

“내버려 둬.”

금발의 남자는 이번에도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발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아까부터…….”

하지만 내가 내뱉은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돌연 소녀의 몸에서 빛이 터진다 싶더니, 그녀를 덮고 있던 껍질의 형태가 변형을 일으킨 것이다.

갈라진 부분마다 각기 따로 꿈틀거리던 그것은 소녀의 등 뒤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늘어지고 볼품없던 껍질의 두께가 점차 얇아지며, 소녀의 몸에 완전히 밀착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곧 기지개를 켜듯 하늘을 향해 활짝 펼쳐 오르더니 이내 여섯 장으로 된 새하얀 깃털 날개로 화했다.

그 모든 변화를 낱낱이 지켜본 나는 소리 없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내 눈에 몹시 익숙한 그 모습이 마치, 마치…….

“……천사?”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 직함이긴 하지만.”

내 말에 반응한 건 예의 금발의 남자였다. 나는 뻣뻣하게 경직된 목을 억지로 그에게 돌렸다.

“여, 여긴 천사가 태어나는 곳인 건가요?”

“정확히는 신족이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신족이 대체 뭔데요?”

“……보다시피. 신을 섬기기 위해 태어나는 일족이지. 평소엔 탄생수에 맺혀 있다가, 지금처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신의 존재를 느끼면 깨어난다.”

“에에? 그럼 당신이 신이라고요?”

당황해서 외친 말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크게 찌푸린 얼굴이었다.

“당연한 소릴 하는군. 정령왕이면서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냐?”

“아하하, 제가 좀 둔해서…….”

“……확실히 그런 것 같군. 이왕 알려 주는 김에 한 가지 더 가르쳐 주지. 여긴 본래 신밖에 들어오지 못한다.”

“네에? 저, 정말요?”

“내가 그것에 또 답해야 하나?”

시리게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이라더니 아레히스만큼이나 치사한 녀석이다. 고작 그 정도 질문에도 대답해 줄 친절이 없는 건가.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자신의 겉옷을 벗은 다음, 그녀의 몸에 둘러 주면서 말했다.

“네 이름은 나드엘이다.”

“나드엘…….”

“날 알아보겠나?”

다소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소녀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에 새겨졌던 문양에 새파란 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사파이어를 가루로 빻아 뿌린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었다.

“나드엘, 고귀하신 주인을 뵙습니다.”

이윽고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싼 소녀가 공손히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표정이 없어 마치 얼음처럼 보였던 남자의 입가에 처음으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무릎 꿇은 천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환영한다, 나드엘. 나의 아이야.”

“…….”

그 순간엔 뭐랄까.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장면을, 단지 지켜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갑자기 온 세상이 전부 새하얘지고 이 세상에 오직 그와 소녀의 모습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그런가. 신에게 천사는 귀여운 아이 같은 존재인 거구나.

그제야 내가 다가가려 했을 때 그가 제지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갓 태어난 소중한 아이에게 애먼 놈이 손을 대려 하는데 누가 두고 보겠는가.

그들 사이의 유대감은 생판 낯선 존재인 나 같은 게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난 오히려 도우려는 걸 방해한다고 생각하다니. 그가 얼마나 속으로 나를 한심하게 여겼을까 싶었다.

“뭐지?”

남자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주절거렸다.

“아, 아뇨! 그냥 참 보기 좋은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어, 아이라고 부르는 건 무슨 뜻인가요?”

“내 기운을 받아 탄생했으니 앞으로 영원히 내가 책임질 내 몫이지. 그런 의미에서 부른 호칭이다.”

“헤에, 역시 그렇구나. 정말 멋지네요.”

“멋지다고?”

“아, 특별히 이상한 뜻은 아니에요. 뭐랄까. 둘 사이에만 흐르는 끈끈한 유대감이랄까. 마치 부모와 자녀 사이 같은,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존재하는 느낌 있잖아요. 제가 예전부터 그런 걸 좀 동경하는 편이었거든요. 방금 당신과 천사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조금 부럽네요.”

“……별게 다 부럽군. 정령왕도 휘하의 정령들에게 같은 느낌일 텐데?”

“아, 하긴. 그건 그렇네요.”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처투성이로군.”

“네?”

“이런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은 녀석이 엘퀴네스라는 게 놀랍다는 소리다. 이거야, 원. 물의 정령왕이 복귀했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군.”

“……초면에 좀 말이 심하시네요. 저 그쪽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못한 거 없습니다. 참견받을 이유도 없고요.”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떴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울컥해서 말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반말하는데요? 그쪽이 아무리 신이라지만, 전 정령왕이거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사회생활도 안 해 보셨어요? 신으로만 사셔서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자신보다 못 미쳐도 한 세계의 왕 정도 되는 존재면 존중해 줘야 하는 게 예의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무례한 태도를 보이시면 몹시 불쾌합니다만!”

“그럼 너도 놓으면 되잖아.”

젠장,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남자는 제법 재밌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투다. 탐색하는 시선에 나는 이성을 잃고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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