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0화 (20/608)

제20화

“엘뤼엔입니다.”

“예?”

뜬금없는 아레히스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이제 이 신도 투시력을 쓰는 건가? 근데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자기 이름이 아레히스가 아니라 엘뤼엔이라고?

어리둥절한 기분에 나는 이프리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아레히스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엘퀴네스 님이 궁금해하시는 선대의 새 이름 말입니다.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라 합니다. 엘퀴네스 님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그분은 현재 신계로 들어가 신의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마(魔) 속성의 상급 신이자 차원 바이톤을 관장하는 최고신이지요.”

“컥! 뭐, 뭐라구요?”

“그게 정말인가요?”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레히스는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알려선 안 되지만 두 분이 정령왕이시니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훗날 정령왕의 임기를 마치시면 다 알게 되실 내용이니까요.”

“그, 그렇군요. 설마 하긴 했는데 정말로 신이 되다니 놀랍네요. 그치, 이프리트?”

“…….”

동의를 구하는 말에 이프리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리에 앉긴 했지만 이미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하긴 나도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인데 녀석은 오죽할까.

게다가 상급 신이라니. 그냥 듣기에도 엄청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건 내 예감이 맞았다. 상급 신은 주신을 제외하면 신계에서 가장 지위가 높을 뿐더러, 그 숫자가 20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상당히 희소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첫사랑이 훗날 엄청나게 출세해서 백마 탄 왕자님이 되었다는 흔한 로맨스 소설의 스토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이프리트의 심정이 딱 그렇지 않을까 싶다. 엘뤼엔이라는 이름도 꽤 근사하고.

‘……가만.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려 준다는 건 역시 직접 만날 순 없다는 소리겠지?’

각오하긴 했지만 막상 최후통첩이란 생각이 들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프리트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뒤늦게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나마 근황이라도 듣고 가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아레히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

뭐야, 설마 벌써 돌려보내려고?

나와 이프리트는 동시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허둥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 그가 다시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미련이 남아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은가? 진짜 보면 볼수록 얄미운 신이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말에 나는 귀를 의심해야 했다.

“뭐하십니까? 신계에 안 가실 겁니까?”

“예? 에에?”

“마침 시간도 오후 시간대군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4대 차원은 시간의 흐름이 동일합니다. 이 시각이면 엘뤼엔 님의 궁처를 방문해도 실례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럼?”

정말 신계에 데려다 준다는 건가?

틀림없이 틀렸다고만 생각했던 참이라 나는 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그는 사소한 용무로는 문을 열 수 없다고 했고, 누가 보기에도 내가 신계에 가려는 이유는 상당히 별 볼 일 없는(고작 어떤 놈인지 궁금해서라는 게 말이 돼?) 편에 속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지?

이런 내 의문을 읽은 듯 그는 가볍게 설명했다.

“엘퀴네스 님에게는 빚이 있으니까요.”

“네? 아, 그, 그치만…….”

“괜찮습니다. 저희 때문에 고생하신 것도 있는데 이 정도 부탁은 들어 드려야죠. 대신 시간을 오래 드릴 순 없습니다. 아주 잠시 인사만 드리고 오는 정도가 될 겁니다. 물론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제가 문을 열어 드리는 일 또한 없을 겁니다.”

“그, 그럼요! 염치없이 또 이런 부탁을 하려고요. 저도 다신 안 해요! 맹세할게요!”

나는 긴장한 나머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나불거렸다. 그게 재밌었던 것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아레히스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그럼 가 보실까요? 이번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 될 것 같군요. 정령왕이 신계로 가기 위해 이곳까지 넘어온 일은 간혹 몇 번 있긴 했습니다만, 성공한 사례는 지금까지 전무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까다로운 요청을 나 때문에 들어준다는 건가!

아아! 앞서 걷는 뒷모습에 후광이 비추는 것 같다. 치사하다느니 얄밉다느니, 조금 전에 투덜거렸던 거 전부 다 취소! 나는 대체 이렇게 착한 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레히스!

“잘됐다, 이프리트. 신계에 갈 수 있대!”

“으, 으응!”

감동에 젖은 나만큼이나 이프리트 역시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때 걸어가던 아레히스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아아, 그렇지. 한 가지를 빼놓을 뻔했군요.”

“예, 말씀만 하세요, 아레히스!”

대답한 것은 이프리트였다. 어느새 그의 추종자가 된 것인지 평소엔 쓰지도 않는 경어를 외치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러다 전대 엘퀴네스를 만나면 넙죽 절이라도 하는 거 아냐? 쉽게 상상은 가지 않지만 왠지 지금 이 상태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무섭다.

그 순간 마주한 아레히스의 얼굴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 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엘퀴네스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네? 아, 네…… 뭐어, 그게…….”

“동료를 위하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엘퀴네스 님.”

“아하하…….”

‘들켰다!’

하긴 용건이 있던 녀석치곤 내가 너무 담담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프리트가 안절부절못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게 이상한 거지. 민망한 기분에 나는 억지로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그런 거였어? 어쩐지 왜 갑자기 나서나 했지. 웃긴다, 너?”

“웃기다니…….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라고. 나름 신경 써 준 사람한테 건네는 감상이 고작 그것뿐이냐?”

“흐응― 그러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하래? 뭐, 어쨌든 기분이 나쁘진 않네. 너한테도 쓸 만한 점이 있긴 하구나.”

“…….”

뭘 바랐던 거냐, 강지훈. 저 녀석이 마녀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잖아? 그래. 그러니까 난 이 정도에 새삼 상처받지 않아, 상처받지 않아, 상처받지 않……기는 개뿔!

‘에에잇! 뭐 이래? 남이 기껏 생각해 줬더니!’

내가 다시는 시키지 않은 일 하나 봐라!

나는 속으로 이프리트를 향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래 봤자 내가 그를 이길 날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 같았지만.

* * *

“자, 여기입니다.”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으슥한 곳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창문도 없이 캄캄한 내부에는 별다른 장식물도 없이 오직 길고 거대한 가구 하나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두꺼운 천이 덮고 있어 내용물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신계로 간다더니 왜 이런 곳에?

나와 이프리트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사이 아레히스가 성큼성큼 걸어가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쌓여 있던 먼지(이곳에도 먼지가 쌓인다니 놀라운 일이다)들이 사방에 퍼짐과 동시에 그 속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둥그런 원형으로 이루어진, 내 키보다 더 큰 거울이었다.

먼지의 양을 보면 꽤 오래 방치한 것이 분명한데 거울의 표면은 이제 막 공정을 마친 새것처럼 깨끗했다. 마치 내 앞에 또 다른 내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심코 만져 본 순간 손에 닿는 감각에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예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아닌 출렁거리는 물에 잠기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뭐, 뭐야?”

실제로 거울 표면 역시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는 유리가 아니라 호수를 박아 넣어 거울로 쓰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 귓가에 담담한 아레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연결의 거울입니다.”

“여, 연결?”

“평소엔 평범한 거울입니다만 중급 신 이상의 존재가 서면 지금처럼 성질이 변화되지요. 일종의 신계로 향하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이라니…… 그럼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가요?”

“보시는 그대롭니다.”

대답과 함께 아레히스는 불쑥 손을 거울 안으로 집어넣었다. 풍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은 어깨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잠겨 들었다. 시범을 마친 그는 다시 팔을 빼내며 말했다.

“통로는 한 사람당 개별적으로 열립니다. 안에 들어가서는 만나실 수 없으니 이 점 미리 숙지해 주십시오. 제가 먼저 들어가면 문이 닫히기 때문에 두 분 정령왕께서 앞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음, 안쪽엔 뭐가 있는데요? 물속?”

“그냥 평범한 복도가 나올 겁니다. 그대로 반대편에 있는 연결문이 나올 때까지 쭉 걸어가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신계의 입구라 불리는 ‘신들의 회랑’이 나올 겁니다.”

우와, 이렇게 들으니 무언가 본격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걸?

그래서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반면 이프리트는 오히려 신이 난 듯 보였다.

“흐응―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저 먼저 들어가도 돼요?”

“차례는 상관없습니다.”

“좋아,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이따 봐, 엘퀴네스.”

“헉! 자, 잠깐, 이프리트……!”

그는 내가 미처 만류할 겨를도 없이 불쑥 거울 안으로 사라졌다. 손을 내밀다 만 자세로 망연히 서 있는 내게 아레히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엘퀴네스 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저, 저기…… 하하, 잠시만요. 아시다시피 제가 좀 경험이 많이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조금 마음의 준비가…….”

그러자 생긋 웃은 아레히스가 친절한 설명을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앞서 들어간 사람이 있어도 제가 마지막에 들어가지 않으면 통로에 반대편 문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에?”

“혹시 명계를 협박해 신계로 침입하려는 위험인물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대비해 만들어진 트릭이지요. 덧붙여 알려 드리자면 처음 진입한 존재 다음으로 제가 들어서야 하는 텀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저절로 문이 닫혀 버리죠. 즉, 지금 이렇게 엘퀴네스 님이 지체하시는 만큼 제가 들어갈 텀이 늦어져 문이 닫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프리트 님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영원히 거울 속에서 헤매게 될지도…….”

“으악! 가요! 간다고요!”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황급히 거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승리감에 젖은 아레히스의 짓궂게 휘어지는 눈동자를!

‘제엔장! 나를 가지고 논 거냐!’

얄밉다는 말 취소했던 거 다시 취소야! 제길!

* * *

거울 속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었다. 개별적으로 생성되는 통로라더니 간신히 성인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이왕 생기는 거 좀 넓고 큼직하게 해 줄 것이지. 폐소공포증 환자는 어쩌라는 거야? 나는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출구에 이른 순간 내 앞엔 예상치 못한 난관이 펼쳐졌다. 당연히 하나일 줄 알았던 문이 두 개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간판도, 별개의 표식도 없이 둘 다 동일한 색, 동일한 모양이었다.

“……뭐야. 이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어디로 나가야 하는 거지?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아무 문이나 열기로 했다. 어차피 어디로 나가든 같은 장소로 연결되겠지, 라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딘 순간 나는 갑자기 바닥이 쑥 꺼지는 것을 느꼈다. 문 너머로 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자각했을 땐 이미 몸이 빠르게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우와악!”

왜 이런 곳에 벼랑이 있는 거야! 설마 신계에 오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거냐! 난 듣지 못했어! 이런 말은 듣지 못했다고, 아레히스!

다행히 생각보다 높진 않았는지 나는 금방 바닥에 떨어졌다. 다만 추락한 부근이 하필이면 언덕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한참을 더 아래로 굴러 내려가야 했다.

“으으. 뭐야, 이건…….”

정신을 차렸을 땐 정체 모를 풀숲이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어찌 됐건 무사히 도착을 하긴 한 모양이다.

그저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고 했던 그 단순한 과정이 이렇게 스펙터클할 줄이야. 나는 둔탁한 통증에 신음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난 부분은 없었지만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덕분에 정령도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런다고 좋아해 줄까 보냐, 아레히스! 이 망할 놈의 신 같으니! 하마터면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잖아! 이런 상황은 미리 경고를 해 줬어야지!

사전에 미리 알기만 했어도 꼴사납게 언덕을 구르는 사태만은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그를 향한 복수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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