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9화 (19/608)

제19화

그렇게 잠시 옛 추억(?)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이어지는 유라우스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헉! 맞다! 상처 치료하는 것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네!”

찔끔한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어쩐 일인지 대뜸 ‘바보’라고 중얼거려야 했을 녀석이 이번엔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는 것은…….

‘너도 잊고 있었냐!’

뜨악해서 보자 붉어진 얼굴로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게, 정말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관심한 척 태연하게 있었어도 유라우스가 다쳤을 때 당황하긴 당황했었나 보다.

어쩐지 굉장히 기분이 유쾌해졌다. 구제 불능의 악동에게서 순수한 이면이 남아 있음을 발견할 때의 흐뭇함이랄까.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얼굴을 잔뜩 구긴 이프리트가 빽 하고 소리쳤다.

“뭘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는 거야? 빨리 저 녀석한테 용건이나 말해!”

“아아, 미안.”

“저어, 저는 ‘저 녀석’이 아니라 엄연히 ‘유라우스’라는 이름이…….”

“시끄러. 닥쳐! 내가 저 녀석이라면 저 녀석인 거야. 어디서 말이 많아!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

살벌하게 몰아붙이는 이프리트의 말에 유라우스는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아니, 그것보단 어느새 이프리트의 손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에 위협을 느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심지어 그냥 불덩어리도 아니고 어디서 많이 본 것이…… 어이, 어이. 그건 아까 그 위험한 장미꽃이잖아! 그건 또 언제 따서 들고 온 거냐!

이프리트는 새하얗게 질린 유라우스를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원한다면 이번엔 이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어 네 몸에 붙여 주지.”

“아, 아닙니다! 저 녀석이어도 좋고 그 녀석이어도 좋고 야, 인마도 좋고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이프리트 님 편하실 대로 부르십시오!”

이미 한 번 그 꽃이 주는 효과(?)를 호되게 경험한 상대에게 트라우마를 재확인시키다니, 진정한 의미에서 악랄한 수법이다. 덕분에 기죽은 유라우스는 어린 양처럼 얌전해졌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라도 조금 전의 고통을 다시 맛보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저기, 이름이 유라우스 라고 했죠? 실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라 하시면?”

유라우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동시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의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상당히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인도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우리를 신계로 데려가 줄 수 있나요?”

“예에? 신계요? 그건 안 됩니다!”

“뭐야?”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던 그는 이프리트가 노려보는 순간 즉시 말을 정정했다. 그래, 내가 그 마음 잘 알지. 나는 속으로 그에게 동정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왜 불가능한데요? 규율에 걸리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저희 인도자들은 어느 차원이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만, 유일하게 신계로의 출입만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차원의 결계를 지키는 문지기의 출입 허가서가 필요합니다. 한데 이게 망자를 데리러 가는 경우가 아니고선 발급이 되는 게 아니라서요.”

“으음, 출입 허가서라…….”

“혹은 결정자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난감해하던 나는 이어진 유라우스의 말에 반색을 표했다.

“결정자? 아레히스 말이죠? 그가 신계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 건가요?”

“예, 예. 그, 그렇습니다.”

“그럼 그를 만나게 해 주면 안 될까요? 제가 직접 부탁해 볼게요.”

“으음, 하지만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리 그분이라도 공식적인 업무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신계로의 방문은 꺼리시는 편이라…….”

“그래서 해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 순간 이프리트의 손에 들려 있던 염화의 불꽃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덮쳐들 듯 코앞에서 넘실거리는 불덩어리에 놀란 유라우스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 모시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위대했다.

* * *

“이런, 이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엘퀴네스 님.”

명계에 도착한 나와 이프리트를 맞이한 건 이곳에 온 목적이자 우리가 만나려고 했던 존재인 아레히스,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나와 이프리트는 곧장 유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사전에 미리 연락을 넣은 건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라우스의 얼굴도 경직된 것을 보아, 그 역시 예상치 못했던 일인 듯했다.

“아하하, 오랜만이네요, 아레히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별수 없이 나는 총대를 메는 심정으로 그 앞에 나섰다.

사실 오랜만이라고 해도 제대로 계산하면 아직 헤어지고 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레히스는 별다른 지적 없이 예의 그린 듯한 미소로 내 인사에 화답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엘퀴네스 님도 본래의 환경에 잘 적응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래 봬도 그렇게 떠나신 후 상당히 염려하고 있었답니다. 한데 역시 괜한 염려였던 것 같네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완전한 정령왕이시군요.”

“아, 아뇨. 뭘요.”

“외모도 몰라보게 바뀌셨네요. 만약 제게 영혼의 기운을 감별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의 지훈 군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하…… 그거 칭찬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빙긋 웃던 아레히스는 이내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한순간에 표정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굉장히 엄한 얼굴로 훈계하듯 말을 이었다.

“정령왕이 지켜야 할 자리를 비우시다니, 정말 무모하셨습니다. 지난 몇십 년간, 물의 정령왕의 부재로 아크아돈에 재앙이 임한 것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엘퀴네스 님은 아직 자각이 덜 되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이프리트 님까지 이런 일에 동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그게 실은…….”

“변명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서로 상극인 두 분이 함께 자리를 비우셔서 망정이지, 두 분 중 어느 한 분이 빠진 것이었다면 간신히 진정된 아크아돈에 또 다른 피해가 생겼을 겁니다. 완벽한 존재로 일컬어지는 정령왕에게 주신께서 차원 이동의 능력을 허(許)하지 않으신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정녕 그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프리트의 굳은 표정을 보니 그는 어느 정도 이런 문책을 각오했던 것 같았다.

확실히 나는 아직 자각이 부족한 상태구나. 아레히스의 말처럼 완전한 정령왕이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걸 알면서도 이곳까지 올 결심을 굳힌 이프리트에게 새삼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원의 재앙을 각오하고 이곳에 온 것이다. 오직 전대 엘퀴네스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다행히 아레히스도 그 이상 책망을 이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와 이프리트를 돌아보았다.

“그래, 여기까지 오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이리 대책 없이 차원까지 건너오셨으니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요?”

“어라?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전 우리가 오자마자 나타나기에 당연히 다 알고 온 줄 알았는데…….”

“설마요. 아무리 저라도 그런 것까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단지 이곳 명계를 향한 차원 이동의 파장에 정령의 기운이 서려 있기에 이상해서 나와 본 것뿐입니다.”

“그래요? 그럼 운이 좋았던 거였네요. 실은 아레히스를 만나려고 온 거거든요.”

“절 말입니까?”

“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그는 짧은 침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요. 유라우스, 당신은 인제 그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예? 그, 그래도 됩니까? 처벌은…….”

바짝 긴장하고 있던 유라우스는 그 말에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처벌’이란 단어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인제 보니 그 역시도 처음부터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실감이 들었다.

‘완전 민폐였잖아!’

다행히 아레히스는 이 모든 사태를 불문에 부치기로 한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령왕을 이곳으로 모셔 온 일은 그리 가벼운 사안이 아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규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은 특별히 그냥 넘어가 드리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에도 이와 같은 선처가 주어지진 않을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반색하며 감사를 표한 유라우스는 이어서 우리에게도 허리를 굽혔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두 분 정령왕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으음. 잘 가요, 유라우스.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도 입었는데 오히려 이런 것밖에 해 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부디 뜻하시는 일을 이루시길.”

마지막까지 그는 정중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다시 한 번 아레히스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다음, 공간의 한 부분에 있던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작 한 명의 공백이었지만 주변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와 이프리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레히스가 앞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 * *

아레히스가 향한 곳은 언젠가도 들른 적이 있던 새하얀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들어섬과 동시에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랄까.

달라진 공간은 역시 마찬가지로 붉은 카펫 위에 티 테이블이 놓인 그때의 그 장소였다. 테이블 위에는 미리 준비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더운 김이 나는 주전자와 세 사람분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나와 이프리트가 머뭇거리는 동안 아레히스가 의자를 빼어 그 위를 가리켰다.

“자,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지요.”

그는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따른 후 차례대로 건넸다.

“그럼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제게 부탁하실 일이라는 게 뭡니까?”

“음, 실은…… 신계에 가고 싶어요.”

“신계요?”

“네, 아레히스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들었어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뜻밖이었는지 아레히스는 두 눈을 멍하니 뜬 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신계를……. 아무리 저라도 신계로 향하는 연결문을 사사로이 열 순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상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개,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어서요.”

“흐음? 이제 갓 태어나신 엘퀴네스 님이 신계에서 알아보실 것이 뭐가 있죠? 딱히 인연이 닿은 존재가 있으신 것도 아니실 텐데요. ……아아, 혹시 이프리트 님의 문제입니까?”

그의 시선이 홀로 차를 홀짝이던 이프리트를 향했다. 혹시라는 말로 질문하고 있었지만 이미 확신을 담고 바라보는 눈이었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모호한 상태로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하기야 오랜 시간 남몰래 속에서 끓여 왔던 감정을 오늘 처음 만난 존재에게 털어놓을 리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내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나 싶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아레히스. 제가 용건이 있는 거예요. 실은 제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였다는 자를 만나 보고 싶거든요.”

“이전 세대의 엘퀴네스 님 말입니까?”

“네, 하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이프리트는 제가 같이 가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예요.”

후후후. 어떠냐, 이프리트. 내 이 쩔어 주는 희생정신이. 틀림없이 감동했겠지?

그러나 힐끔 살펴본 녀석은 이게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이다. 시망, 괜히 도와준다고 나섰나?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전 엘퀴네스 님이 현재 신계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찌하신 겁니까?”

“네? 아, 그게…… 보장은 없었는데요. 그냥 무작정 찾아가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 전에 아레히스가 그랬잖아요. 정령왕이 소멸하면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의 길을 걷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래서 그냥…….”

“그렇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레히스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사사로운 용건이라 안 되는 걸까? 반색하고 들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반응이 너무 나빴다.

차라리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동정심 작전으로 나갈 걸 그랬나?

사랑하는 존재의 소멸,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애틋한 짝사랑. 이 모든 걸 그럴듯하게 설명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졌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를 이 자리에 오게 한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

삽시간에 굳어지는 주변 공기를 느끼며 나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할 수 없지. 이렇게 되면 그냥 타협점을 찾는 수밖에.

“저기, 신계로 데려가 주는 것이 곤란하다면 전대의 엘퀴네스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만이라도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그것도 어려울까요?”

“……글쎄요.”

그것도 안 되는 건가.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아레히스를 보며 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가? 조금 전보다 한층 침울해진 이프리트를 보니 더 기분이 언짢았다.

치사해! 신이라면서 고작 그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잖아, 아레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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