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8화 (18/608)

제18화

맑고 고운 음성이 울릴 때마다 작은 물방울들이 춤을 추듯 둥실둥실 떠올랐다. 차마 그냥 보기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우와아…….”

나는 홀린 기분으로 나이아스들의 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감동의 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옆에서 들려온 이프리트의 빈정거림에 의해서.

“네 정령들은 널 닮아서 단순하구나. 고작 그 정도 인사말에 좋다고 춤추긴.”

“……꼭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 이렇게 예쁜 광경을 보고.”

“흥! 내 카사들의 춤이 더 아름답거든?”

아, 그러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뭐가 불만이냐는 듯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웠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나는 더 당황했다.

“말해 두지만 내가 더 예뻐.”

“……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나이아스들이라서 네가 특별히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뿐이야. 다른 사람들 시선에는 너보단 내가 훨씬 더 예쁘거든?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울 거라느니 그런 착각엔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그래…….”

뭐야. 그것 때문에 꽁했던 거냐.

인제 보니 나이아스들이 내 외모를 칭찬한 것에 경계심을 느낀 모양이다.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난 여성체가 아니라고!

“어? 잠깐 기다려. 손님이 온 것 같은데?”

“뭐? 어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난 꽃밭을 서성이는 한 남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척 봐도 정령이 아님이 명백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는 이제 막 정원에 도착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정말이네. 어디서 온 놈일까? 이왕이면 명계인이면 좋겠는데…….”

“아마 맞을걸? 신이나 신족들은 저보다 훨씬 더 위압감이 있거든.”

“헤에, 그래?”

순간 빠르게 시선을 마주한 나와 이프리트가 동시에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거기!”

“잠깐 멈춰!”

* * *

우리가 외친 소리는 예상 밖의 참사를 일으켰다. 마침 불꽃으로 만들어진 장미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서던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데고 만 것이다.

“앗뜨뜨!”

그는 데인 손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얼른 다가가 사과를 하려는데 이프리트가 한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바보 아냐?”

“이, 이프리트. 그러지 마. 우리 때문이잖아.”

“흥! 그러게 누가 불로 된 꽃에 가까이 다가가래? 그냥 봐도 위험해 보이잖아. 부주의한 쪽의 잘못이지.”

“그래도 다쳤는데 그런 말은…….”

“정 미안하면 가서 치료라도 해 주든가. 치료 능력은 엘퀴네스들의 특기잖아?”

이런 젠장. 내가 그런 것까지 할 줄 알면 오늘날 이 시점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겠냐? 많은 의미가 담긴 눈으로 쏘아보자 이프리트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이 정령왕은 날 괴롭히는 것을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크읍……! 아아, 정령왕들을 뵙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화상의 통증을 조금 가라앉혔는지 남자는 처음보다 한층 진정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생각보다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 왔던 사람들이 대개 모델처럼 가늘고 호리호리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투박하고 선이 거친 사내다운 축에 속했다. 바짝 날을 세워 깎은 머리형과 구릿빛 피부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어쨌건 결론은 이놈도 꽤나 잘생겼다는 거다.

젠장, 나도 이제 평범하게 생긴 놈을 만나고 싶어!

“괜찮아요? 화상 입은 것 같던데.”

“아하하. 괜찮습니다. 살짝 데였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곳 에바스 에덴은 정말 아름답군요. 선배들이 휴양지로 적극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거기다 운 좋게도 이렇게 정령왕들까지 뵈었으니…….”

“선배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유라우스라고 합니다. 명계의 일족으로, 망자의 혼을 모셔 오는 인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두 분 아름다우신 정령왕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빙고! 명계인이었구나.

게다가 마침 찾던 인도자라니, 아무래도 우리 일정에 운이 따르려는 게 분명하다. 반갑게 인사하려던 나는 문득 그의 손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살짝 데였다는 말과는 달리 화상을 입은 부분이 보기에도 괴로울 만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꽃잎을 세게 움켜쥐었었나? 자꾸 신경 쓰여서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이프리트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그 꽃은 그냥 평범한 불이 아니야. 지옥에서 피어나는 염화의 일부거든. 닿은 순간 순식간에 육체를 집어삼키고 영혼에까지 상처를 입히지. 저 정도 화상으로 그친 것이 용한 거야. 자칫하면 손이 아주 녹아 버렸을지도 모르니까. 뭐, 그렇다고 지금도 썩 괜찮은 상태라는 건 아니지만.”

아아, 이런. 경악으로 굳어져 버린 유라우스가 보인다. 그는 화상 입은 손을 부여잡고 실성한 듯이 ‘지옥의 염화를 만지다니……’라고 중얼거렸다.

하긴 설명만으로도 상당히 무시무시한 꽃이긴 했다. 육체를 집어삼키고 영혼까지 상처 입히는 불이라니. 꽃 주제에(?) 그런 위험한 성질은 왜 가지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걸 정원에 심어 놓은 이유는 또 뭐고? 저러다 정령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거…… 그냥 저렇게 둬도 괜찮은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꽃밭 위엔 실프들이 서슴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 꽃봉오리에나 안착해서 데굴데굴 구르는 녀석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내 걱정스러운 시선에 이프리트는 여전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정령들은 각 자연의 속성을 극한까지 가지고 있는 존재야. 제아무리 지옥의 염화라고 해도 우리에겐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해. 아무렴 정령에게 위험한 걸 이곳에 가져다 두겠니?”

“하긴 그렇겠구나. 하하…….”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저 인도자의 상처나 어떻게 해 봐. 염화의 불꽃은 완전히 치료하지 않으면 열기가 멈추지 않고 전신에 전부 퍼지니까. 저러다 죽을지도 몰라.”

“헉?”

나는 깜짝 놀라 유라우스의 상처를 살폈다. 정말로 손바닥에 입었던 화상이 어느새 팔뚝까지 넓게 번져 있었다.

“괜찮아요?”

“예에. 괘, 괜찮습…….”

그는 고통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피부엔 식은땀이 흥건히 맺힌 상태였다. 다급해진 나는 열상이 일어난 부위를 꼭 붙잡은 상태로 이프리트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어, 어떡하지, 이프리트? 이거 치료할 수 있는 약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령이 어디 다칠 일이 있어야지. 거기다 다치게 되더라도 엘퀴네스의 능력이 있으니 필요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네가 알아서 해 봐.”

“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괜찮아. 아직 전신에 퍼지기까지 시간은 충분하니까.”

저, 저런 마녀 같으니라고!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고 있냐!

그러는 사이에도 열상은 빠르게 번져 나가 어깨까지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우선 유라우스의 상의를 모조리 벗겨 낸 후 그를 자리에 눕게 했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그는 내 지시에 따라 순순히 몸을 눕혔다.

화상을 입은 사람의 응급처치가 뭐였더라? 아, 그래. 우선 찬물로 열을 식혀야지.

“이프리트! 가서 물 좀 떠 와!”

“……넌 지금 너 자신을 뭐로 생각하는 거야?”

엥? 그게 무슨…… 아, 맞다. 내가 물의 정령이었지!

뒤늦은 자각에 나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물을 관장하는 정령왕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물을 떠 오라고 시키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멍청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난 아직 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모른단 말이야!”

“아주 바보라고 광고를 해라!”

소리치는 이프리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만들긴 뭘 만드니, 멍청이! 전에도 말했잖아! 네 자체가 물이라고! 지금 이렇게 팔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물로 식히고 있는 상태란 말이야!”

“헉? 정말?”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곳에 있는 모든 물이 곧 네 일부라고도 했던 거 잊어버렸니? 공기 중의 수분을 끌어모으기만 해도 호수 한 개는 만들겠다. 다신 어디 가서 물이 없어 뭘 못하겠다는 멍청한 말은 하지 마! 알겠어?”

안 그래도 사나운 눈빛에 살기까지 담으니 박력이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프리트는 노려보던 눈에서 힘을 빼고 말했다.

“좋아, 그럼 계속해.”

“네, 넵!”

명령조의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나는 일단 닥치고 다시 유라우스의 상태를 살폈다. 이프리트의 말을 들어서 그런가. 인제 보니 열상이 번지는 속도가 느려진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전신으로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미 열상이 생긴 부분들이었다. 검붉게 변색한 부분의 상태가 꽤 심각했던 것이다. 새빨갛게 익은 살갗 위로 커다란 물집들이 보기 흉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하지.’

당장에라도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이곳에 치료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치료 능력 따위 불필요하다고 푸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필요한 순간이 올 줄이야. 이쯤 되면 신이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이 든다.

왜 하필이면 치료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게 물의 정령왕인 걸까.

하다못해 같은 물의 정령이라도 시큐엘도 있고 운디네도 있고 나이아스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진심으로 바라면 이루어졌잖아?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유라우스의 팔을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입안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그러니까…… 나는 상처를 치료하고 싶다, 치료하고 싶다…….”

“얼씨구. 그런다고 안 되는 게 되니?”

“에에잇! 시끄러워. 마인드 컨트롤 중이니까 말 걸지 마.”

이프리트는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남의 수고를 비웃다니, 정말 나쁜 정령왕이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진 광경에 나는 그를 향한 불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화상 부근을 붙잡고 있던 내 손바닥 밑에서, 파도에 떠밀려 나오듯 새하얀 물거품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빠른 속도로 번져 나온 물거품은 마치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위쪽으로 흘러가더니 열상이 새겨진 부근을 전부 뒤덮었다. 그리고 피부밑으로 스며든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피부는 본래의 말끔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헉!”

“나았다!”

뭐,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시간으로 치면 불과 몇 초에 해당할 뿐인,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프리트 역시 상당히 놀란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픈 팔을 끙끙거리며 부여잡고 있던 유라우스도 눈이 동그래진 상태였다.

“세, 세상에.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염화에 입은 상처가 이렇게 말끔하게 회복되다니……. 감사합니다, 엘퀴네스 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 아뇨. 뭘요. 아무튼 무사히 치료가 돼서 다행이네요.”

“정말입니다. 엘퀴네스 님의 치료술은 귀가 따갑게 들어 왔지만 정말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돌아가면 선배들에게 자랑할 겁니다. 정령왕들을 뵌 것도 모자라 이렇게 직접 은혜까지 입었으니 말입니다. 아마 다들 부러워서 뒤집어질 거예요. 하하하!”

“아, 예. 하하하…….”

퍽이나 부럽기도 하겠다. 자칫하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던 놈치고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육체를 가진 종족이야 죽어도 영혼이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미 영혼인 저승사자는 죽으면 그걸로 끝 아닌가? 근데 저놈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거야?

나와 같은 심정인지 놈을 보는 이프리트의 표정에도 황당함이 가득했다.

“엘퀴네스보다 웃긴 놈일세. 너 그거 알아? 엘퀴네스가 치료를 안 했으면 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했을 거라는 사실 말이야. 염화에 입은 상처는 상급 치유신이 아니면 거의 못 고친다는 거 알지?”

“하하, 물론입니다.”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한 거야? 너 방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거라고.”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위기를 극복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가끔은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네요. 정말 운이 좋은 날인 것 같습니다. 하핫!”

……긍정적 마인드도 이 정도면 도를 넘은 것 같다. 이프리트조차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 정도였다.

이 지나치게 긍정적인 인도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 님께 사과를 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이번에 저희 측 실수로 큰 폐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제대로 망각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가셔서 윗선들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지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치유술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심하셔도 된다고 보고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아, 뭐 보고할 것까지야…….”

“아닙니다. 모두 기뻐하실 겁니다. 특히 결정자께선 우연이라도 엘퀴네스 님을 뵙게 되면 어찌 지내시는지 알아봐 달라고 모든 인도자에게 신신당부 하셨는걸요.”

“결정자라고 하면…… 아레히스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헤에, 그가 나를 걱정했다고?

그렇지 않아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져서 내심 미안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좀 뭉클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나는 맛없는 액체를 강제로 먹였다며 원망이나 하고 있었다니. 왠지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기분이다. 게다가 그 몹쓸 액체도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것이었고.

‘으으, 생각할수록 내가 나쁜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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