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뭐? 어, 어떻게?”
내심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탓인지, 어둡게 가라앉았던 이프리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에 대답하기에 앞서, 나는 미리 연막을 쳐 두는 걸 잊지 않았다.
“일단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야. 나도 내가 생각한 이 방법이 통할지는 자신이 없으니까.”
“대체 무슨 방법인데?”
“듣고 나서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해 주지.”
“……네가 지금 당장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아닙니다. 그럼요, 여왕님. 당장 말씀드리고말고요.
나는 비굴한 눈물을 삼키며 곧장 머릿속에 구상한 생각을 실토했다.
“……명계를 이용하는 거야.”
“이용이라니?”
“그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정확한 건 아닌데 정령왕들은 소멸의 시기에 이르면 명계로 가서 후계자에게 능력을 물려준다고 들었거든.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아?”
“응, 맞아. 네 이전의 엘퀴네스도 명계로 이동해서 소멸했으니까.”
“그럼 일단 그전에 명계로 이동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명계의 인도자들이 데리러 오지. 인간들이 죽을 때처럼, 정령왕도 소멸 시기가 가까이 오면 명계에서 인도자들이 데리러 오거든.”
“아하! 그 인도자들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도 얼마든지 차원 이동시킬 수 있다는 거네?”
“그거야 그렇……! 너 설마?”
그제야 내 계획을 눈치챘는지 이프리트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명계의 인도자들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는 거라면, 그들에게 부탁해 신계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설령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현재 엘퀴네스가 어떤 처지인지는 알아봐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기뻐하기보다 회의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방법이긴 한데, 아마 불가능할 거야. 이미 끊어졌던 전생의 인연을 다시 이으려고 시도하는 걸 명계에서 좋게 볼 리가 없어. 무엇보다 명계는 운명의 신들 개입이 큰 곳이고…….”
“흐음, 그거야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스스로 찾아볼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만난 것일 수도 있잖아? 어차피 정령왕들이 나중에 신이 되는 거라면 언젠가는 다시 인연이 이어진다는 건데 굳이 지금 막을 이유가 뭐가 있어?”
“…….”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이프리트의 말처럼 쉬운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다른 문제는 다 차치하더라도 명계의 인도자들을 만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으니까.
그런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계속 뭔가에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눈빛에 어린 기대를 풀지 못하는 걸 보면 아닌 척해도 어지간히 전 엘퀴네스를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나는 더더욱 이번 계획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생에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자청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이래 봬도 한때는 ‘닭살 커플 훼방 놓기 운동 본부회’의 총회장직을 맡았던 몸인데 말이다.
“흠, 아무튼 가장 큰 문제는 이거야. 인도자를 만나야 뭔가 시도라도 할 텐데 지금으로썬 그들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거지. 인도자를 부르겠답시고 멀쩡한 정령을 죽일 수도 없고. 대체 어떻게 해야…….”
“있어.”
“응?”
푸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이프리트가 정신을 차렸는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쁨이 가득 만개한 얼굴에는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희망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명계의 존재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있어.”
* * *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초원과 한 편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정령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구름 가득한 창공과 넓은 대지, 초원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동그란 언덕 너머로 보이는 푸른 숲이 청량한 잎사귀를 흔들며 자태를 뽐내고, 달콤한 향기가 은은히 주변을 가득 채웠다. 창공을 날아다니는 한 떼의 요정들은 바람의 하급 정령이 틀림없었다. 나는 금실 같은 햇살이 이 모든 아름다운 정경을 뒤덮는 걸 황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 광경은 더욱 장관이었다. 이름을 알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이 전부…… 전부!
“보석이잖아!”
척 보기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십만 종의 꽃이 전부 보석! 그것도 섬세하게 가공된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그 눈부심에 차마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닥에 깔린 풀잎들은 고운 실크로 짜여 있었고, 조약돌이며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전부 다 금덩이요, 은덩이였다. 하다못해 시냇물은 벌꿀의 맛과 똑같았다.
“무슨 이런 황당한 곳이 다 있어!”
감탄보다는 먼저 경악으로 굳어져 버린 내게 이프리트가 옆에서 친절하게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에바스 에덴. 오직 이곳 정령계에만 존재하는 황금의 정원이지. 각 속성의 정령만을 받아들이는 성역과는 달리 이곳은 4대 정령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장소야.”
“뭐? 그런데 나한테는 왜 이제야 가르쳐 주는 건데?!”
“그거야 내 맘이지.”
“…….”
이제는 화를 낼 기운조차 없다. 나는 차라리 마음 편하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몇 년이 지나도 몰랐을 게 뻔하니까.
보아라, 이 빛나는 긍정적 마인드! 아,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착한 것 같아.
“그런데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야, 이프리트?”
나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별안간 끌려온 참이라(덕분에 다수의 공간 이동도 가능하단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저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이프리트는 한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까 뭘 들은 거니? 명계의 존재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고 했잖아.”
“아, 여기가 그곳이라고?”
“그래. 에바스 에덴은 4대 차원에서 손꼽는 절경으로, 타계(他界)인들에게도 굉장히 유명하거든. 특히 명계의 존재들이 휴양 차원에서 자주 놀러 오는 편이야.”
“헤에, 휴양? 거기 사람들한테도 휴식이 필요해?”
“당연하지. 그럼 그 어마어마한 시간을 일만 하고 살 일 있니?”
“……그건 그렇지.”
하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명계로 인도하고 다음 탄생지를 분배하고, 인세로 환생시키는 과정 전부가 그들에게는 업무 과정의 일부였을 것이다. 특히 최근엔 행방불명된 나를 찾는 일과 더불어 아크아돈의 10년 가뭄 탓에 죽은 사람이 부쩍 늘어나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을 거라고, 이프리트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의 안색이 꽤나 나빴던 것 같은데. 그게 전부 과로 때문인 건가? 어딜 가나 일에 치이는 삶이라니, 사후의 세계라는 것도 별거 없구나.
그에 비하면 정령왕은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니,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아, 물론 옆에서 바보라고 상습적으로 구박하는 마녀만 없다면 말이다.
“널 찾았으니 이제 급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겠다, 아마 다들 오랜만에 휴가를 받았을 거야. 즉 이곳을 방문하는 명계인들도 많을 거란 소리지.”
마녀, 이프리트의 말에 따라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한눈에 다 파악할 순 없었지만 정령 외의 다른 기척의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
“나도 보면 알거든? 매일 방문자가 있는 건 아니니까 없을 수도 있지.”
“흠,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방문일이나 목록 같은 걸 알 방법은 없어?”
“그런 건 몰라. 에바스 에덴은 개방된 장소라서 누구든지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거든.”
“……뭐야. 그럼 그냥 여기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 그럼 어쩌라고! 다른 방법이 있으면 네가 말해 보든가!”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나도 딱히 방법은 없긴 하지.
그 뒤 나와 이프리트는 정원에 죽치고 앉아 누군가 방문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고, 주변은 며칠을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 일색이었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시간이 마냥 지루하진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바람의 하급 정령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풀잎 사이에 숨은 채 이쪽을 힐끔힐끔 경계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왜 저러는 거야?”
“뭐? 실프 말이야?”
“아아, 저 애들을 실프라고 해?”
결 좋은 생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실프들은 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누가 바람의 정령 아니랄까 봐 모습이 전체적으로 투명했는데, 그들의 왕인 미네르바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바람의 하급은 실프, 중급은 슈리엘, 상급은 진이잖아. 이런 건 이제 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보면 안 되니?”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아직 내 정령 이름도 다 못 외워서 말이지.”
“그게 자랑이니, 멍청아!”
쳇쳇,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본능도 잊어버렸는데 그까짓 정령 이름이 대수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턱짓으로 다시 실프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왜 저 애들은 저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데?”
“무서워서 그래.”
“무섭다고? 우리가?”
“하급은 본능적으로 정령왕의 기운을 두려워해. 그나마 실프는 하급 중에선 가장 배짱이 있는 편이야. 다른 하급 정령들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있잖아?”
“아, 그러고 보니.”
4대 정령이 전부 모이는 장소라고 했는데, 그런 것치곤 다른 정령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령왕들이 나와 있을 땐 으레 숨는다는 것이다.
“잘 찾아보면 나이아스들도 있을 거야. 네 휘하의 정령들인데 인사라도 해 두지그래?”
“헤에, 그럴까.”
나이아스들은 아직 목소리밖에 들어 보지 못했다. 직접 만들지 않아도 알아서 탄생하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특한 녀석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만나 볼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왕의 명령인데 부르면 모이겠지? 나이아스! 전부 집합!”
그러자 그 순간 신기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비눗방울 같은 물거품들이 내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도착한 물방울들은 곧 실프처럼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변했다.
푸른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트린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하반신이 물고기의 꼬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래 귀가 있어야 할 부분에도 마찬가지로 아가미로 보이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었다.
‘우와, 귀엽잖아!’
나이아스들은 갑작스러운 내 부름에 무척 당황했었는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작게 달싹이는 그들의 입술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의 지배자, 우리의 주군, 엘퀴네스 님을 뵙습니다.
전에 물의 영역에서 들었던,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수다쟁이들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긴장한 탓인지 그때 들었을 때보다 한층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다들 너무 겁먹지 마. 그냥 보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우리 첫 대면이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러자 눈이 동그래진 나이아스들이 저희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불안한 기분에 이프리트를 바라보자 그가 시큰둥한 어조로 설명했다.
“하급 정령들은 정령왕의 기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네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걸 알고 두려움이 없어진 거야.”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흥,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닐걸?”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급들은 대개 엄청난 수다쟁이거든.”
나는 굳이 이프리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나이아스들이 소란스럽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잘 부탁드려요, 엘퀴네스 님!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머리카락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그 위에서 미끄럼틀 타 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
과연, 이런 뜻이었군.
겁이 없어지다 못해 대담해진 나이아스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나를 향해 이프리트가 잘해 보라는 듯이 윙크를 날렸다.
‘이런 건 빨리 말해 달라고!’
흔히 여자들의 수다는 파괴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건 작은 꼬마들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찌나 쟁알쟁알 떠들어대는지 나중에는 파리채로 한 마리씩 휘어잡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화를 내진 못하겠고. 으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억지로 웃었다. 그때 나이아스들이 갑자기 나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엘퀴네스 님!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우리의 왕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아, 정말? 고, 고마워.”
순수한 호의를 담은 칭찬에 나는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나이아스들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붉은 벚꽃이 피었다.
―꺄아! 엘퀴네스 님이 고마우시대!
―엘퀴네스 님이 우리한테 웃어 주셨어!
―우와, 우와! 칭찬받았다!
―기쁨의 축제를 벌이자!
―와아! 찬성!
―나도, 나도!
“어어? 얘, 얘들아?”
그 순간 이어지는 광경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갑자기 나이아스들이 앞다투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내 머리 위에서 하나의 원형을 이루어 선 것이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각자 작은 물방울들을 하나씩 품 안으로 끌어 올리고는 내 머리 위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보석처럼 영롱한 물방울들은 떨어지는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불꽃처럼 주변을 수놓았다. 알록달록하게 번지는 빛 가루의 모습이 마치 무지개 색 장막 같았다. 그 상태에서 나이아스들은 공중을 빙글빙글 돌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존귀하고 거룩한 우리의 지배자시여!
그 이름도 영원한 아름다운 물의 왕이여!
축복받은 아크아돈, 풍요의 대지여!
정령들의 보금자리, 황금의 정원이여!
그 이름 영광 있으라! 그 이름 영광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