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14화 (14/608)

제14화

한창 잘나가던 순간 이어진 질문은 흐름을 끊어 놓기 충분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그,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부정이면 부정이지, 그게 어떻게 긍정이라는 거니? 인간으로 살다 오더니 애가 이상한 사상에 빠져 있다니까? 괜히 엉뚱한 상상이나 하고 말이야. 네가 그러니까 이제껏 제대로 된 정령왕 구실을 못 하지!”

“컥! 이 정령왕이 또 생정령 잡네? 너 툭하면 날 무시하는데, 네 행동 충분히 수상한 거 맞거든? 그렇게 당당하면 처음엔 왜 제대로 대답을 못 한 건데? 전대를 좋아한 거냐고 물었을 때 너 분명히 머뭇거렸거든?”

“그, 그건…….”

“이것 봐. 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변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수상하단 증거라고. 속이려면 속일 수 있는 상황에서 속여야지! 내가 물로 보이냐?”

“어라? 지훈, 너 물 맞잖아?”

“크흑! 트로웰!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가 뭘…….”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트로웰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말하는 족족 태클을 거는 쪽이었다.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엔 이프리트에게서 아무런 반격이 없었다. 그저 꾸욱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다.

후후, 내 승리인가?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말 그대로 잠시였다. 잠시 후 눈앞에 보이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던 것이다.

“이, 이프리트?”

장난을 칠 때의 사람 심리란 게 늘 그렇지만, 상대방이 울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말을 잃고 굳어져 버린 나를 향해 이프리트는 앙다문 입술을 열었다.

“너 같은 녀석, 진짜 싫어.”

“…….”

“꼴도 보기 싫어. 다신 너 같은 거 안 볼 거야!”

그게 끝이었다. 무수한 저주나 폭언을 퍼붓지도,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친 이프리트는 내가 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불길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큰일 났다!’

그냥 살살 약 올리며 자백을 받아내려 했던 것뿐인데. 설마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그때 망연하게 서 있는 내 옆쪽으로 트로웰이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울려 버렸네.”

“윽! 어, 어떡하지, 트로웰?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자(?)를 울리다니. 강지훈 인생에서 처음 벌어진 사달이다. 이거 당장 찾아가서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석고대죄? 그게 뭔데?”

“음. 그게 뭐냐면, 돌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를 거듭하는…… 트로웰, 마음 읽지 말라니까.”

무심코 설명하려던 나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트로웰은 가볍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미안. 그런데 이번엔 네가 먼저 사과하려고?”

“응? 이번은……이라니?”

내가 언제 또 이프리트하고 다툰 일이 있었나? 아니, 다투기야 자주 다투지만 그건 일방적으로 이프리트 쪽에서 시비를 거는 거고, 한 번도 이렇게까지 틀어진 적은 없었는데?

뭔가 미묘한 질문이란 생각에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엘퀴네스랑 이프리트는 대대로 사이가 안 좋다고 했잖아? 이전엔 다투면 늘 이프리트 쪽에서 사과했거든. 전대의 엘퀴네스는 절대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헤에, 그렇구나.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한 거니까.”

“글쎄, 별로 다르진 않을걸. 심한 말을 한 건 이프리트도 마찬가지였잖아. 게다가 이전에도 딱히 누군가 잘못해서 다툰 건 아니었거든.”

“그럼 왜 싸웠는데?”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이프리트가 시비를 걸고 화내다가, 결국 밀린다 싶으면 울면서 도망쳤지. 오랜만에 봤더니 좀 신선하긴 하네. 아마 본인도 감회가 새로울 거야.”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상당히 흔하다는 거지?”

“마지막으로 외치고 간 말까지 똑같았어.”

“…….”

생긋 웃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그럼 결국 조금 전 눈물을 보인 건 죄다 연극이라는 소린가? 아니, 그치만 정말로 운 것 같았는데?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다시 트로웰을 응시했다.

“저기, 트로웰. 그럼 이럴 때 보통 이프리트가 언제쯤 사과를 해?”

“음, 때때로 달라. 빨리 풀어질 때도 있지만 오래갈 땐 몇 년에서 몇십 년을 넘기기도 하거든. 전대와는 오백 년이 넘게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은 적도 있어.”

“헉! 오, 오백 년?”

“그게 최고 기록이지. 이프리트가 바짝 약이 올라서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고 승부를 걸었거든. 결과는 그의 패배였지만.”

“으아, 아무리 승부라지만 오백 년이나 참은 것도 대단한데?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게 가능해? 세상에서 단 4명밖에 없는 정령왕이잖아.”

그 말에 트로웰이 조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춤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싶었던 것이다.

“왜, 왜?”

“아니,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거든. 단 4명밖에 없는 존재라…….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우리는 인간처럼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딱히 교류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 그래?”

“응, 서로 존재하기만 하면 필요한 부분은 알아서 다 채울 수 있거든. 그래서 개인적인 성향이 큰 편이야. 전대는 그중에서도 특히 더 독단적인 편이었지. 늘 물의 영역에서만 지내서 우리가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모습을 볼 일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헐…….”

정령왕의 수명은 만 년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물의 영역에서만 지내다니. 전대의 엘퀴네스라는 놈은 엄청난 아웃사이더였던 게 분명하다.

“그런 녀석을 좋아하다니. 이프리트도 취향 참 특이하네.”

“응? 이프리트가 전대의 엘퀴네스를 좋아한다고?”

그 순간 금시초문이라는 듯 트로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에 나는 오히려 더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트로웰. 지금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 전부 다 들었잖아. 그런데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이.”

“듣기야 했지. 하지만 이프리트가 아니라고 했잖아.”

“어? 그건 그냥 거짓말한 거 아냐?”

“설마,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헉! 정말?”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건 인간들이나 그렇지. 우리 정령은 늘 자신의 본심에 충실한 종족이야. 그런 걸 숨길 이유는 없잖아?”

헐, 그럼 정말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투시하는 트로웰이 그렇게 말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한 거지? 정말 아니라면 날 쥐어 패서라도 무슨 헛소리냐고 해도 되는 거였잖아?

‘그렇다고 트로웰의 능력을 무시할 수도 없고. 으으, 이거 정말 골치 아프네.’

트로웰의 말을 믿자니 의심 가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그렇다고 내 직감을 믿자니 너무 신뢰도가 떨어진다. 남의 연애사라는 것이 복잡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골치가 아플 줄이야.

‘으음, 어쨌든 일단 지금은 이프리트한테 사과부터 하자. 남의 감정을 가지고 놀리려고 했던 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게다가 먼저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간 내가 제명에 못 살 것 같아.’

최소 몇 년에서 몇십 년이라니. 그런 엄청난 기간을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암, 그렇고말고.

결심을 굳힌 나는 당당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현실이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으니…….

“어? 왜 그러고 있어, 지훈? 이프리트한테 사과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그 자리에서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향해 트로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프리트한테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읽은 것이겠지만 항의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덤덤히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 신이 나에게 희망을 내려 줬다면 그건 바로 그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 트로웰…….”

“응?”

“불의 영역에는 어떻게 가는 거지……?”

“…….”

순간 나와 그의 주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었다.

풋!

그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을 깬 건 허파를 간질이듯 작게 터져 나온 바람 소리였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 서 있던 물의 정령들이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하나같이 내 시선을 피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것들이, 감히 상사의 무지를 비웃어?

정령왕인 트로웰도 이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는데 쪼매난 것들이 어디서 감히…… 감히, 응? 부들부들 떤다고?

그에게 시선을 보낸 순간 나는 움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서 있는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언뜻 무표정으로 보인다 싶었던 얼굴도 자세히 보니 확연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트로웰……?”

“……크흠. 흠흠, 응? 왜?”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도 되는데.”

“아니, 나는 별로…… 풉! ……으음. 미안, 지훈. 자, 잠깐만. 풋! 하하하!”

“…….”

이후 간신히 웃음보를 가라앉힌 트로웰이 이동 언령의 사용법을 알려 줄 때까지, 나는 한참을 홀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정령왕이었다.

* * *

정령계의 구조는 거대한 십자 형태로 나뉜 각 정령왕의 성역과 그 가운데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뤄진다.

오직 직속 계열의 정령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역과는 달리 정원은 누구나 드나드는 것이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푸르른 창공과 그 위를 유유히 흐르는 구름, 정원을 가득 채운 풀숲과 아기자기한 나무들,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청명한 바람. 그 안에서 가지각색의 정령들은 신분과 속성에 관계없이 한데 어우러져 노닐었다. 그것만으로도 신들은 이 정원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이 정원이 특별한 이유는 또 다른 부분에 있다. 바로 이곳에 속하는 모든 식물이 진귀한 보석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사파이어의 잎사귀에 루비의 꽃잎, 순금으로 만들어진 개나리와 레드 다이아몬드로 빚어진 장미, 불꽃으로 피어 있는 카네이션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에델바이스.

‘에바스 에덴.’

4대 차원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경으로 손꼽히는 황금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광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도 자신의 공간 안에 주저앉아서 영상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타오를 것같이 화려한 붉은색의 머리칼과 매혹적인 외모. 모든 불과 화염을 지배하는 정령왕 이프리트였다.

“……재미없어.”

우울하게 중얼거린 그는 이내 한 손을 저어, 보고 있던 영상을 사라지게 했다. 이미 다른 일로 머릿속이 꽉 찬 그에게 천공의 휴양지든 대(大)차원의 5대 절경 중 하나라고 손꼽히는 아름다운 광경이든 그것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바짝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푸념했다.

“하아…… 난 항상 왜 이러는 거지? 이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이제 어떡해. 이번엔 아무리 그 녀석이라도 화났겠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참고 넘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잖아. 그렇게 매정하게 쏘아붙이고 왔으니 이제 두 번 다시는 상종 안 하려 들지도…….”

이전 대의 엘퀴네스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거나 자존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응징을 가하는 것은 기본이고, 한 번 틀어지면 백 년은 넘게 상종 안 하는 것이 예사였으며, 사과를 받기 전까진 설령 아크아돈의 공적인 일에 관계된 일이라 할지라도 먼저 말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게 너무 얄미워서 이프리트 자신도 똑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쳤지만 결국 승자가 되는 건 언제나 늘 엘퀴네스였다(물론 지지 않고 덤비는 그를 향해 다른 동료들은 피장파장이라 불렀다).

그러던 그가 단 한 번, 정말 단 한 번 이프리트가 거는 시비에 그냥 넘어간 일이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상황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도 시작은 평소랑 똑같았다. 아니,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늘 물의 영역에만 처박혀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엘퀴네스가 그날만은 에바스 에덴에 나와 있었으니까. 유희는커녕 가벼운 산책도 잘 즐기지 않는 그로선 상당히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 녀석이 여긴 웬일이지?’

반가운 기분에 이프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늘 그랬듯 싸늘한 무시뿐이었다. 그에 울컥한 이프리트는 그만 평소처럼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너 같은 거 진짜 짜증 나!”

“…….”

“정말이야! 정말이라고! 정말 네가 너무너무 싫거든? 빨리 소멸이나 해 버려!”

한두 번 하던 말도 아니었고, 새삼 양심에 걸릴 정도로 심한 욕설도 아니었다. 그러나 말을 내뱉은 순간 이프리트는 하얗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반감에는 사소한 것에도 늘 바로 응징을 가하던 엘퀴네스가 그 순간엔 그냥 웃어넘겼기 때문이다.

딱히 즐겁다거나 재미있어서 웃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입 끝을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인, 밀랍인형 같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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