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그, 그럼 그 자격은 어떻게 알아보는데?”
“딱 보면 알 수 있어. 자격을 지닌 자는 몸에 흐르는 기운이 우리와 비슷하거든. 아마 상당히 친숙하게 느껴질 거야.”
“그럼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건가?”
“아니, 꼭 그렇게 하진 않아도 돼. 중간계 종족 중에선 타고나면서부터 우리와 계약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들도 있거든.”
“헤에, 그렇구나.”
그러면서 트로웰이 덧붙인 말에 의하면, 간혹 자격을 지닌 이들 중에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소환 의식이라는 특이한 방법을 통해 이쪽과 잠시간 통신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오래전 정령들이 계약자를 보다 편하게 찾기 위해 세상에 알려 준 방법이라는데, 자격을 갖춘 이들은 누구나 이 방법으로 원하는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소환된 정령이 무조건 계약을 할 필요는 없다. 소환 자체는 거부할 수 없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은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설명을 마친 트로웰은 못 말린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프리트가 이런 것도 알려 주지 않은 거야? 나 참, 처음부터 그냥 내가 가르칠 걸 그랬네. 미안해.”
“아니야, 덕분에 많은 걸 알았어. 고마워, 트로웰. 아 참,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뭐든 물어봐.”
나는 차분하게 질문을 기다리는 트로웰을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주고받는 대화에서 그와 내가 마치 선생님과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자상한 데다 외모까지 근사하다니. 이렇게 섹시한 선생님이라면 학생들이 새벽부터 줄을 지어 등교하지 않을까?
“어? 내가 그렇게 섹시해? 칭찬 고마워.”
“……쿨럭, 부탁인데 이런 생각은 좀 읽지 말아 줘.”
“일부러 읽은 게 아니라 그냥 들린 거야.”
나는 생긋 웃는 트로웰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내가 미쳐! 트로웰 앞에선 생각을 조심하자고 다짐한 지 몇 분도 안 돼서 이게 대체 뭔 망신이람. 그나마 이런 낯 뜨거운 소리를 듣고도 그가 나를 기피하는 느낌은 없어 다행이었다. 나는 뜨겁다 못해 재가 되어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을 느끼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흠흠, 어쨌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야. 정령을 일단 만들긴 만들었는데…… 이프리트가 보여 줬던 방식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서.”
“다르다니?”
“이프리트는 그냥 손을 뻗으니까 이그니스가 휙 하고 나타났거든. 그런데 난 어제 몸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나가더니 물거품 같은 게 잔뜩 끓어올랐어. 하룻밤 새 내내 말이야. 정령이 태어났다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겨우 알았고.”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네가 한꺼번에 많은 정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니까. 수천수만 마리의 정령이 동시에 태어나는데 이프리트처럼 한순간에 만들어낼 리가 없잖아?”
“어? 그렇게 많이 태어났다고?”
더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그렇게 많은 숫자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트로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너 자신이 본능적으로 부족한 숫자만큼 만들어냈을 거야. 어제와 오늘, 피부에 와 닿는 감각이 다르지? 네 힘이 그만큼 아크아돈에 많이 퍼졌다는 증거니까 전혀 염려할 것 없어.”
“으음, 그렇구나. 다행이다. 실은 제대로 된 건지 계속 불안했거든. 그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가서…….”
“이상한 소리?”
“으응. 이상하달지, 뭐랄지. 억양이랄까, 발음 같은 게 분명 똑같은 언어인데도 뭔가 다른 느낌이랄까. 뭔가 위화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아아, 무슨 소린지 알겠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트로웰은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렇게 말이지?”
“헉……!”
나는 깜짝 놀라 헛숨을 삼켰다. 똑같았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같은 건지는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방금 그가 사용한 말은 어제 내가 내뱉은 의문 모를 외침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였다. 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물었다.
“뭐, 뭐야?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당혹감을 역력히 드러낸 나를 향해 트로웰은 다시금 싱긋 웃었다.
“언령이야.”
“어, 언령?”
“쉽게 설명해서 말을 통해 의지를 발현하는 거지. 네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돼. 신(神)이나 그에 근접한 존재들만이 쓸 수 있는 상위 능력 중 하나지. 물론 다 같은 언령이라도 위력은 신이 사용하는 언령이 가장 뛰어나지만 말이야.”
“허어…….”
말을 하면 이루어지는 능력이라…….
내가 그런 엄청난 걸 사용했단 말이지?
기쁘긴 했지만 아직은 얼떨떨한 심정이 더 강했다. 사실 언령이라고 해 봤자 나 자신도 어떻게 했는지 알 수조차 없으니 뿌듯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다시 할 수 있을걸?”
“으응?”
“무의식적이라도 언령을 사용했다는 건 좋은 징조야. 네가 그만큼 본성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니까. 하물며 이미 한 번 터득한 방법을 잊었을 리가 없어.”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지. 지금 마음속으로 정령을 만들고 싶다고 강하게 염원해 봐. 아마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그의 말에 따라 나는 차분히 정신을 집중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령, 정령을 만들고 싶다. 너무 많이는 말고 딱 시큐엘 한 마리만.
사실 물거품으로 가려진 탓에 제대로 정령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못 본 것이 내심 아쉽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시큐엘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제대로 두 눈에 담아 두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입 안쪽에서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젯밤 물거품이 일기 전 무슨 말이라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과 비슷했다.
‘설마 이게 언령의 징후인가?’
나는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속에 맴도는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
“나와, 시큐엘―!”
출렁―!
그 순간 내 몸 안에서 무언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파도가 치기 전 물결이 크게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어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이 내 가슴에서 팔을 타고 천천히 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기운은 곧 손바닥 위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쏴아아 철썩!
그렇게 일어난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거대한 물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안에서 조각이 새겨지듯 뭉툭한 형체가 천천히 드리우는 것을 발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선명한 늑대의 현상을 이뤄 가고 있었다. 물의 늑대 시큐엘이었다.
이윽고 완성된 시큐엘은 공중에 거꾸로 도약하여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곤 내 앞에 낮게 포복한 자세로 엎드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존귀하신 물의 지배자, 나의 주군, 엘퀴네스 님을 뵙습니다.
“헤에…….”
“거봐, 된다고 했지?”
트로웰의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상당히 바보 같아 보였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난 내가 스스로 행한 일에 감동하느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생각만 했는데 됐다. 설마 정말로 정령이 만들어질 줄이야!
그 엄청난 현실은 그때까지 그저 막연하기만 하던 여러 가지 감각을 한꺼번에 일깨우기 충분했다. 덧붙여 나는 실감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까지 덩달아 확실하게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 * *
언령을 사용하게 된 이후 나는 조금 당당해졌다. 직접 정령을 만들어낸 만큼, 이제 더 이상 내가 정령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마치 장기 자랑을 하는 어린애처럼 계속해서 정령들을 만들어냈다. 그때마다 트로웰이 잘했다는 듯이 웃으며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매번 반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제법 무료할 텐데도 짜증 내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일 한 번 없었다(이런 걸 보면 트로웰은 유치원 교사가 적성에 맞을지도). 덕분에 나는 더 신이 난 상태였다. 아마 뜻밖의 방해꾼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몇 날 며칠이고 지치지도 않고 정령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야! 정령 좀 그만 만들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정도라는 걸 모르네! 아크아돈을 물바다로 만들 일 있니?”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존재는 여느 때와 같이 도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프리트였다. 트로웰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이프리트.”
“뭐야, 트로웰. 너도 여기 있었어?”
“응, 지훈 좀 봐. 정말 대단하지 않아? 벌써 이만큼이나 능력을 자각했어.”
트로웰은 마치 자기 일을 자랑하듯 주변을 가득 채운 물의 정령들을 가리켰다. 물론 그에 같이 감동해 줄 정도로 마음씨 고운 이프리트가 아니었다.
“흥! 당연한 걸 가지고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그리고 나 지금 놀러 온 거 아니거든?”
“그럼 왜 왔는데?”
“물의 정령이 너무 많이 태어나는 바람에 이쪽의 기운이 확 줄어들었잖아! 짜증이 나서 항의하러 온 것뿐이야. 트로웰 넌 옆에 있었으면서 말리지 않고 뭘 한 거야?”
“난 괜찮았거든.”
“으휴! 정말이지, 이래서 상성이 맞는 것들이란!”
분통을 터뜨린 이프리트는 한구석에 모여 있던 갓 태어난 물의 정령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위협적인 시선에 정령들이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그만 노려봐.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노려보긴 누가 노려봤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이프리트 너지. 봐! 네가 무서워서 떨고 있잖아.”
“흥! 시끄러워. 정령왕인 내 앞에서 그 휘하의 정령들이 겁을 내는 건 당연한 거지!”
“내가 만들어낸 내 정령들이거든? 너한테 겁내라고 만든 거 아니거든?”
“뭬야?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은 그냥 척 보기에도 몹시 공격적이었다.
평소였다면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름 정령왕으로서 한껏 자신감이 차오르던 상태였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는 소리다.
“하! 해보자면 내가 못 할 줄 알아?”
호기롭게 맞받아친 나는 이프리트가 한 것처럼 한쪽 손에 물의 기운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뭉쳐진 물덩이는 마치 송곳처럼 날카롭게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양쪽 다 언제 부딪칠지 모를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때마침 옆에서 들려온 트로웰의 중얼거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곳 물의 영역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흐음,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왠지 전대 엘퀴네스와 이프리트 때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트로웰?”
전대의 엘퀴네스가 어쨌다고?
당황한 나에 이어 이프리트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지훈 말이야, 처음엔 아닌 것 같았는데 볼수록 전대 엘퀴네스랑 닮은 것 같아서. 아무래도 같은 엘퀴네스니까 기운이 비슷한 건 당연하겠지만.”
“어, 진짜? 내가 전대랑 비슷해?”
“말도 안 돼! 누굴 어디다 감히 비교해?”
순수하게 호기심을 비치는 나와 달리 이프리트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덕분에 나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근데 이거 은근 기분이 나쁘네? ‘감히’라니. 전대 엘퀴네스가 워낙 대단했다니 나 같은 녀석이랑 비교하는 것이 기가 찬 심정이야 이해는 하지만.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표현할 수는 없는 건가? 기분이 상한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이프리트를 바라봤다.
“야, 이프리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전대나 나나 다 같은 엘퀴네스인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흥, 지위만 같으면 단 줄 알아? 외모며 능력이며 성격이며, 어디 뭐 하나 비슷한 구석이라도 있어야 닮았다고 인정을 하지. 꼴에 같은 엘퀴네스라고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건 단지 네 착각일 뿐이라고. 주제 파악 좀 해.”
“뭐어?”
“양심이 있어야지. 지금 네 주제에 전대 엘퀴네스와 비교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니? 누굴 작정하고 모욕하는 것도 아니고.”
거침없이 이어지는 언사에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이 녀석은 대체 왜 이렇게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까? 면전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만큼 내가 이 녀석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아, 그래! 양심 없어서 미안하게 됐다! 그런데 모욕하면 좀 어때서? 어차피 너랑 전대랑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잖아?”
“뭐, 뭐?”
“별로 사이도 좋지 않았던 전대를 뭘 그렇게 두둔하냐는 거야! 너야말로 이미 죽은 녀석의 입장만 생각하느라 날 심하게 대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누가 보면 꼭 네가 전대를 좋아한 줄 알겠다?”
“……!”
그러자 곧장 나에게 반격할 거란 예상과 달리 이프리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잠깐의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고 전부 목격했다. 그제야 마지막 퍼즐의 조각을 찾은 것처럼,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뭐야. 정말 그런 거였어?”
헐, 어쩐지! 왜 그렇게 나한테 날을 세우나 했다! 그럼 그렇지! 이프리트, 너 딱 걸렸어!
나는 약점을 잡은 사람처럼 득의양양해져서 헤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이프리트의 얼굴이 단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냐! 누가 그래? 절대 아니거든? 난 단지 너랑 전대를 비교하는 게 너무 황당했던 것뿐이야!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잖아!”
“헤헹,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시나. 그렇게 변명하는 것부터가 다 속에서 찔리니까 그런 거지.”
“아, 아니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왜 이러실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소리도 못 들어 봤어?”
“응?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왜?”
그때 불쑥 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트로웰이었다.
헐, 왜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질문은 나중에 하면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