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만나서 반가워. 이번에 새로 태어났구나?
―그래, 그래.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응응, 나도 잘 부탁해.
‘이게 무슨 소리지?’
눈을 뜬 것은 귓가에서 가느다랗게 울리는 재잘거리는 소리에 의해서였다. 까르르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소리가 마치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 같았다.
‘어라, 내가 잠이 들었었나?’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기에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시커먼 것이 불쑥 내 앞에 모습을 들이밀었다.
“우와악?! 뭐, 뭐야!”
―헉! 죄, 죄송합니다. 나의 왕. 놀라셨습니까?
“어어?”
나의 왕……이라고?
나는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벙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바로 눈앞에 황소만 한 덩치의 거대한 짐승이 있었던 것이다.
짐승의 전체적인 모습은 늑대와 흡사했는데, 신기하게도 몸체가 투명하게 비치는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조차 시린 물빛이었다.
물의 늑대는 강직하고 늠름한 자태만큼이나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고귀하신 나의 주군, 물의 지배자 엘퀴네스 님을 뵙습니다. 심연을 다스리는 바다의 시큐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시, 시큐엘?”
설마 물의 상급 정령인 그 시큐엘 말이야? 말로만 듣던 시큐엘의 모습이 이렇게 생겼다니. 아니, 그보다…… 그럼 내가 상급 정령을 만들었다는 건가?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황한 나머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시큐엘의 옆에서 무언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을 발견했다. 어림잡아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에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굉장히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여자아이가…….’
소녀의 몸 또한 시큐엘과 마찬가지로 투명한 물덩이로 이뤄져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하더니 다급히 입고 있는 물색 원피스의 양 끝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존귀한 물의 왕이시여. 강과 호수의 정수를 다스리는 운디네가 주군을 뵙습니다.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운디네? 넌 혹시 물의 중급 정령이야?”
상급은 시큐엘, 하급 정령의 호칭이 나이아스라고 했으니 남은 건 중급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네. 마, 맞습니다.
‘헤에, 생각보다 예쁘잖아.’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를 봤을 때도 멋지다는 생각은 했지만, 직접 내 휘하의 정령들을 마주한 지금 이 순간의 감동에 미칠 순 없었다. 같은 물의 정령이라서인지 첫눈에도 친근감이 물씬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만들었단 거지?”
―예, 저희는 왕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두 정령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금 의구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들을 부른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큐엘은 그렇다 쳐도 운디네의 경우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아, 혹시 그건가?’
나는 어제 나도 모르게 무심코 외쳤던 의미 모를 외침을 상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 직후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었지. 수십만 개의 물거품들이 주변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때 벌어졌던 현상들은 이미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이프리트가 내게 시범을 보였을 때와는 전혀 다르긴 했지만, 아마도 그것이 정령이 만들어지는 광경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왠지 태어난 정령들이 이 둘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보다 감각이 닿는 범위가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어제 나를 괴롭혔던 지독한 갈증 역시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부족하단 느낌은 여전했지만 한계에 이른 것처럼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물의 느낌도 어제보다 훨씬 신선하고 청량하다. 마치 안개비가 내리고 난 아침,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상급 정령은 시큐엘, 중급 정령은 운디네라고 하는구나. 그럼 하급 정령은 어디에 있는 거지?’
상급과 중급에 비해 하급인 ‘나이아스’는 굳이 만들지 않아도 내 기운을 느끼고 알아서 태어난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지 궁금했다.
그때 어디선가 맑은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울렸다. 졸졸졸 아득하게 흐르는 느낌이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자 그것은 점차 뚜렷한 음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은 북동쪽 하늘로 향하는 구름에 몸을 싣자!
―동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너무 기뻐.
―들어 봐, 저기 인간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
―아침이니까 부지런히 이슬을 만들자.
―무럭무럭 식물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처음 깨어났을 때 귓가에서 재잘거리던 바로 그 목소리들이었다. 그땐 잠결이라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선명했다.
‘뭐, 뭐야. 왜 물소리가 대화 소리로 들리는 거지? 설마 내가 미친 건가?’
지치지도 않고 떠드는 목소리들은 내가 의식적으로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그에 더 불안해진 나는 얼굴을 굳힌 채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시큐엘과 운디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너희, 방금 들었어? 지금 저쪽에서 아이들 소리가…….”
예상치 못했던 방문객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흙벽이 생긴다 싶더니 그 안에서 까만 피부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트로웰이었다.
“지훈! 정령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구나! 하룻밤 새 무서울 정도로 물이 불어났어. 정말 굉장해. 이 속도면 자연이 원상 복귀하는 것도 시간문제야.”
“트, 트로웰!”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그는 굳어 있는 내 모습에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멈춰 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당황한 얼굴이야?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바로 그거야!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힌 표현에 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완전히 자각한 건 아니구나. 괜찮아. 네가 환청이라고 생각한 그 대화 소리는 나이아스들의 목소리야.”
“어어? 나, 나이아스?”
“물의 하급 정령들 말이야. 대지 곳곳에 퍼져 있는 하급 정령들은 어디서든지 우리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 방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지? 그래서 그들의 수다 소리가 귓가로 전해진 것뿐이야. 당연한 현상이니까 너무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휴우, 그런 거구나. 정말 다행이다……가 아니라! 뭐야, 트로웰! 난 제대로 설명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내 상황을 아는 거야? 설마 정말로 생각을 읽는 건가?
나는 안심할 겨를도 없이 또다시 경직된 상태로 트로웰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바로 난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꼭 내가 위협하는 느낌이잖아.”
“그, 그치만…… 너 방금…… 아니, 그전부터…….”
“네가 말하지도 않은 걸 알고 있다 이거지?”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트로웰이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단 네가 생각하는 그건…… 맞아. 일부러 읽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헉! 저, 정말로 읽는다고? 남의 생각을?”
이 순간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미 의심하고 있었긴 했지만, 설마 정말일 줄은 몰랐으니까. 기겁한 내 반응에 그는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혜안이라고 하면 될까? 굳이 읽는 다기보단 빠르게 유추해내는 쪽이야. 어떻게 보면 눈치가 좋은 편에 가깝지. 그렇다고 아주 안 들리는 건 아니고, 들으려고 하면 들을 수도 있지만.”
“그, 그러니까 결국 들린다는 거잖아?”
“뭐, 그렇지. 전부 들리는 건 아니긴 해도.”
싸악―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그를 만난 자리에서 속으로 남자 주제에 요염하다느니, 두근거린다느니, 별의별 주책을 다 부렸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전부 다 듣고 있었다는 거잖아!
“표정이 왜 그래? 아주 파랗게 질렸는데.”
“그, 그치만, 그게……! 나는……!”
“하하! 괜찮아, 괜찮아. 전부 다 들리는 건 아니라니까? 아무리 나라도 네가 감추고 싶어 하는 감정까진 읽지 못해. 같은 정령왕 급은 투시가 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거든. 뭐, 인간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야말로 지옥 끝에서 구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절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목 안으로 삼켰다.
설마 트로웰 이 녀석, 일부러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유만만하게 웃는 그를 보니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앞으로 그 앞에 있을 때는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겠군.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사실 내 주 능력은 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거야. 투시는 그 속에 포함된 일부일 뿐이지.”
“헉!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그럼 예언을 한다는 거야?”
“맞아. 이것 역시 상대에 따라 볼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대로 트로웰들에게 내려지는 특이 능력이지. 정령왕들은 전부 고유의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거든.”
“우와, 굉장해.”
나는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령왕이라는 것만도 대단한데 과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다니. 이건 거의 신이 부럽지 않은 능력이잖아? 게다가 어딘지 그에게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유독 차분하고 깊은 그의 황금색 눈동자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라? 근데 전부 고유의 능력이 있다고?’
그럼 나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가? 때마침 스친 생각에 나는 멍하니 트로웰을 응시했다. 그러자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곧장 설명을 이었다.
“물의 정령왕의 고유 능력은 재생과 치료술이야.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 어떤 상처라도 완벽하게 낫게 할 수 있지.”
“헤에? 치료술?”
“응. 치료의 상급 신과 거의 비슷한 위력이라고 들었어.”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굉장한 능력이었다. 나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물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글쎄, 네가 알지 못한다면 나로선 조언할 방법이 없어. 스스로 터득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으음, 그런가.”
하긴 물의 정령왕 고유의 능력이라면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어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건가. 내가 침울해하자 트로웰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위안했다.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마. 지훈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것들이니까. 못 하겠다고 했으면서도 벌써 정령을 만들었잖아? 네가 스스로 정한 한계를 일부라도 깨트렸다는 증거야. 그러니까 벌써 조급해할 필요 없어.”
“그, 그런가?”
“당연하지. 나는 미래를 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믿어.”
그 어떤 응원보다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덕분에 기분이 나아진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프리트라면 그저 다그치기 바빴을 텐데, 확실히 트로웰은 친절하다.
“근데 트로웰, 정령이 다치기도 해?”
“응? 설마. 정령계는 워낙 평화로운 곳이라서 그런 일은 거의 없어. 설령 다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자체적으로 치유되는 편이고. 게다가 아크아돈에 내려가서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위협을 당할 일도 전혀 없지.”
“……그럼 치료 능력이 있어도 전혀 쓸모가 없잖아.”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해도 환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인 법이다. 다치는 일이 없는데 치료 능력 따위 가져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트로웰이 냉큼 대답했다.
“육체를 가진 존재를 치료하면 되지. 예를 들면 인간들 같은.”
“어? 인간들을 만날 수 있어?”
“당연하지.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지훈 네가 원한다면 나중에 아크아돈을 돌아보며 여행을 다닐 수 있어. 제대로 유희를 즐기려면 중간계의 종족과 계약을 해야 하지만.”
“중간계? 계약?”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인데도 이해가 되는 말들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당황하자 트로웰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정령계라고 불리는 건 알지? 중간계는 아크아돈처럼 인간 종족들이 사는 차원을 말해. 우리 정령들은 영체에 가까워서 이 모습 그대로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아.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긴 위해선 임시로 사용할 육체를 구성해야 하는데, 이때 다른 종족과의 계약을 통해 그의 힘을 빌려야 하지. 물론 그 대가로 우리 쪽에서도 그를 도와야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아무 대상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조언을 덧붙였다. 정령에게 마나를 공급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에 그만한 자격을 지닌 자만이 계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