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에엑? 이게 뭐야!”
나는 그대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는데, 나는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상당히 긴 머리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색은 잉크를 탄 듯이 선명한 파란색이기까지 했다.
거기까진 그렇다 치자. 아니, 사실 이런 완벽한 물빛은 돈 주고도 염색하지 못할 색이기 때문에 솔직히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단 하나, 유독 긴 기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건 나중에 잘라 버리면 되니 논외로 치고. 문제는…….
“이건 완전 여자 얼굴이잖아!”
그랬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지금 내 얼굴을 누군가 진부하게 표현해 본다면 이럴 것이다.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 조각같이 갸름한 얼굴선에 오뚝한 콧날, 피라도 칠한 듯 붉은 입술. 커다랗고 동그란 물빛 눈동자.
한마디로 말해, 예쁘장하게 생긴 전형적인 소녀의 얼굴이라는 소리다.
하고많은 얼굴 중에 하필이면 이따위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이런 빌어먹을!
이왕 예쁘장한 타입이라면 차라리 트로웰 쪽이 훨씬 낫다. 똑같이 어려도 섹시한 데다 확실히 남자로 보이긴 하니까. 하지만 내 얼굴은 어딜 봐도 여자였다. 그것도 청순가련형의, 가냘픈 느낌의 소녀 말이다. 머리까지 기니까 더 그런 것 같았다. 밋밋한 가슴이 아니라면 누구나 여자로 오해하기 충분할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눈썰미 없는 사람들은 그냥 좀 심각한 절벽 가슴을 가진 소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음? 근데 뭔가 허전한 듯한……?’
새로 생긴 몸을 불만스럽게 훑어보던 나는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 허전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듯한 찝찝한 느낌이랄까? 아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 게 인제 와서 이렇게 불편한 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뭐지?
나는 천천히 내 몸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서 이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뭔지를 차근차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어렵지 않게, 아니 오히려 처음에 못 찾은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쉽게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
100만 볼트에 감전당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없어……. 없……어! 없다고! 크아악―! 말도 안 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신념이 무너질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까?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해도 이런 기분을 맛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왜 내가 여자가 된 거야!”
* * *
“이거 바보 아냐?”
그날 저녁,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밤새 좌절한 끝에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피곤해서라기보다 정신적인 쇼크로 몰골이 초췌해져 있는 나를 향해 이프리트는 다짜고짜 매몰찬 평가를 내렸다.
“크흑!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미네르바한테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전생의 기억에 연연하고 있을 줄이야. 뭐 이런 한심한 녀석이 다 있어?”
“한심하다니!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내 성별이 바뀌었단 말이야! 너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네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되었다면 그걸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겠어?”
“그게 어때서? 난 지금도 자주 남자로 꾸미고 다니는데? 너도 정 남자 쪽이 편하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바보야! 그냥 꾸미고 다니는 거랑 진짜 남자인 게 같을 리가 있냐!”
“다를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우리 정령들은 무성인데!”
“그러니까 그건 엄연히 다른…… 엥? 방금 뭐라고?”
신랄하게 비꼬는 이프리트의 말에 필사적으로 변명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방금 이프리트가 뭐라고 그랬지? 정령이 무성이라고?
놀란 내 표정이 상당히 멍청했던지 이프리트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구겨졌다.
“기본적으로 정령은 무성(無性)이라고. 남자니 여자니 구분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다만 외형에서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차이가 날 뿐이지. 정령이 자식 낳았다는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나나 미네르바만 해도 외모로는 확연히 여성체지만 가슴은 없잖아? 너랑 똑같다고.”
“헉! 그, 그러고 보니…….”
나는 반사적으로 이프리트의 가슴 부근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녀(?) 역시 나랑 똑같은 평평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여자가 저렇게까지 가슴이 나오지 않은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아무리 발육이 덜 되었다 해도 어림잡아 17에서 20세 초반의 여성이라면 조금은 허리라든가 어깨선 같은 것이 어느 정도 태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프리트의 상체는 완벽한 소년의 그것과 같았다.
황망해하는 나를 향해 이프리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고 있어야 해? 정령왕 주제에 정령이 성(性)이 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전대 엘퀴네스가 알았다면 그대로 까무러쳐서 다신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나 참, 기가 막혀서.”
“그, 그럼 나…… 여자가 된 게 아닌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네가 무슨 붕어야? 솔직히 말해 봐. 너 실은 정령왕 아니지? 사람 모습을 한 조류지?”
거침없는 폭언이 이어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이 내겐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제야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얼굴이 예쁘면 어떻고 중요한 부위가 없으면 어때? 일단 여자만 아니면 된 거지.
17년 세월을 통해 성립된 가치관이라는 건 생각보다 차지하는 분량이 크다. 내 기준에서 여자란 남자의 이성(異姓)이고, 이성이란 곧 연정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건 결국 내가 시커먼 사내놈이랑…… 으아아악!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강지훈! 난 여자가 아니라잖아. 그래, 난 그냥 여성형일 뿐. 엄밀하게 말하면 무성…….
“아니, 난 이것도 싫어! 대체 왜 내가 여성형으로 분류되어야 하는데!”
내가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치자 이프리트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누가 너더러 여성형이래?”
“뭐? 네가 먼저 어제 나한테 여성형이라고 그랬잖아!”
“그건 전대의 외모랑 비교했을 때 그렇단 거지. 뭐, 지금 네 모습도 보기에 따라선 남성형으로 봐주지 못할 것도 없어. 아직 신체가 다 완성되지 않은 미성년들 특유의 중성적인 느낌이거든.”
“어? 그, 그래?”
“뭐, 그렇다 해도 대부분은 여자로 착각하겠지.”
“그것 봐! 역시!”
결론은 여성형에 더 가깝다는 거잖아!
나는 다시금 떠오르려는 끔찍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고 노력했다. 그 순간, 대뜸 머리에 통렬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이프리트가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으악! 뭐 하는 거야, 이프리트!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린 거야, 멍청아! 타고난 외모를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그런 쓸데없는 일로 손님을 계속 이렇게 세워 둘 거야?”
“그렇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냐? 아파 죽겠…….”
머리를 감싼 채 투덜거리던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어? 그런데 이프리트가 왜 여기 있어?”
“뭐야?”
그러자 안 그래도 사나운 이프리트의 눈꼬리가 더욱 사납게 올라갔다. 내가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단 사실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아, 아니, 난 그냥…… 어제 네가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아서…….”
“지금도 화나 있거든? 왜? 그럼 오면 안 돼?”
“아니, 그건 아니고. 하하하…….”
‘헉! 설마 이프리트 이 녀석, 어제의 일로 앙심을 품고 내게 저주라도 걸러 온 건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라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프리트는 그런 나를 한심하단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 얼빠진 표정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해? 정말이지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같은 엘퀴네스라도 어쩜 이렇게 전대랑 다를 수가 있는 거니? 네 전대의 엘퀴네스는 성격이 좀 시건방지긴 했지만 그래도 타고난 기품이라는 게 있었어. 그런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정령왕이…….”
“……기품 없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는 자기는 기품이 넘쳐나는 줄 아나. 생긴 건 날라리 같은 주제에.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당당히 이프리트 앞에서 중얼거리지는 못했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은 정령왕으로 역사에 기록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목숨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이 정령왕이 정말 왜 온 거지? 설마 일부러 시비나 걸자고 행차한 것은 아닐 테고.’
이런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이프리트는 새침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곧 당당하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앞으로 네 교육을 내가 담당하기로 했어.”
“……뭐?”
“거참. 정령이 귀먹을 수도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못 들었어? 내가! 네 교육을! 담당하기로 했다고!”
“……!”
나는 헉하고 터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참았다.
뭐야, 이프리트가 나를 교육한다고? 대체 어째서? 미네르바나 트로웰이 가르쳐 주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그 둘 중에서 한 명이 맡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충격이 더 컸다. 설마 내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래서 대놓고 날 싫어하는 이프리트를 보낸 건 아니겠지? 짧은 사이에 수만 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울상은 집어치워. 기분 나쁘니까.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아크아돈의 회복에 집중하고 있어서 바빠. 어쩔 수 없이 내가 널 맡게 된 거라고.”
“……이프리트 너는 안 바쁘고?”
“뭐, 뭐야? 당연히 바쁘지. 그럼 내가 한가할 것 같아? 너 따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무지 엄청나게 바쁘다고.”
“으음, 그렇구나. 그런데 왜 굳이 네가……?”
“흠흠, 굉장히 바쁘지만 난 다른 애들이랑 달리 유능해서 말이야. 다들 힘든 상황인데 이 정도쯤은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걱정하지 마. 내가 일주일 안에 널 완벽한 정령왕으로 각성하게 해 줄 테니까.”
“…….”
의기양양하게 단언하는 이프리트와는 달리 나는 얼굴이 핼쑥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 이프리트가 가르치는 ‘완벽한 정령왕’이라니. ……과연 일주일 뒤에 내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엉?”
그때 이프리트가 나를 노려보며 말을 건넸다. 내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그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진짜 귀먹었어? 나한테 할 말 없냐고 물어봤잖아!”
할 말? 할 말이야 많지. 저기 이프리트, 나 가르치는 건 말인데, 그거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내가 이렇게 착해 보이고 성실해 보여도 말이지. 실은 머리도 엄청 나쁘고 반항도 조금 할 줄 알거든? 네가 아무리 스파르타식으로 달달 볶아도 내가 못 따라가면 너만 고생하는 거잖아, 그치? 그러니까 부탁이니 제발 다시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번엔 한 대로 끝나지 않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없는데…….”
“없다고? 정말 없는 거야?”
“음? ……아! 앞으로 잘 부탁해?”
“그거 말고!”
“그, 그럼 뭔데?”
“뭐야, 정말 모르는 거야?”
정말 모르겠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멀뚱히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 답답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던 이프리트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어제 미네르바랑 트로웰한텐 너를 ‘지훈’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며. 근데 나한텐 왜 그런 말 안 하는 건데?”
“뭐? 아아― 그 소리였어?”
헤에, 설마 그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나는 의외의 심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라면 나를 향한 호칭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을 줄 알았다. ‘너’라거나 ‘인마’라거나 ‘이 자식아’ 정도만 불러 줘도 감지덕지하라 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나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길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표현 방식이 제멋대로일 뿐 이프리트가 날 싫어하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난 피할 생각만 하기 바빴다니. 괜한 선입견 때문에 그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속으로 반성하면서 급히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미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를 못 했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너도 미네르바나 트로웰처럼 날 ‘지훈’이라고 불러 줬으면 해.”
그때까지도 나는 이프리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이어진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이었다.
“싫은데?”
“…….”
하하하.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나는 눈앞에서 생글거리고 있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석상처럼 굳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재미있다는 듯이 눈꼬리를 가득 휘어 접었다.
“얘가 아직도 이해를 못 했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난 널 완벽한 정령왕으로 만들 거라고. ‘지훈’은 전생의 이름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그때 이름을 계속 쓰면 되겠니? 난 널 엘퀴네스라고 부를 거야. 이 몸의 깊으신 뜻을 고마워하기나 해.”
“……그, 그럼 왜 내가 지훈이라고 소개하길 유도한 건데?”
“그야 재미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살짝 치켜뜬 이프리트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바람도 없는데 허무한 공기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교육은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봐주지 않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둬.”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이프리트는 어제처럼 똑같이 불덩이로 변해 사라졌다. 사라지는 순간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들려왔다.
“다른 건 몰라도 놀리는 재미만큼은 톡톡한 녀석이네? 아―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다.”
“…….”
바야흐로…… 여왕님과의 전쟁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