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7화 (7/608)

제7화

“후후, 그냥 내버려 둬, 엘퀴네스. 네가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까.”

“으응?”

때마침 이어진 미네르바의 말에 나는 간신히 혼란스러워진 정신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냥 흐뭇한 표정을 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물이 없어서 트로웰이 가장 고생을 많이 했거든. 대지는 특히 인간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편이니까. 해마다 죽어 가는 동식물과 작물을 보살피랴, 툭하면 일어나는 산불을 수습하랴, 아마 우리 중에서 가장 네 존재가 절실했을 거야.”

“아, 그, 그래?”

“흥, 미안하게 됐네요. 산불을 일으킨 원인이라서.”

그때 척 듣기에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부터 내게 시비조로 말을 걸던 이프리트였다. 토라진 그의 얼굴에 미네르바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한테 뭐라고 한 게 아니야, 이프리트.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

“하지만 불은 내 관할이잖아.”

“그렇게 따지면 산불 같은 건 애초에 공기가 건조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지. 절반은 내 책임이라 할 수 있어.”

“공기가 건조해진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고.”

마지막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노려보는 이프리트의 얼굴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령왕의 수명은 만 년이 넘는다지 않는가. 그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곧 죽어도 얼굴 보고 지내야 할 동료들과 벌써 삐걱거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외려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는지 이프리트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달아올랐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집어치워. 바보 같아 보이니까. 하긴, 너 바보 맞지? 오죽 어리바리했으면 제대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온담.”

“컥…….”

가뜩이나 찔렸던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하다니. 기가 죽은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손에 뺨을 비비고 있던 트로웰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프리트,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틀린 말한 건 아니잖아? 저 녀석이 공석인 동안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알기나 해? 너희 둘은 그나마 물과 궁합이 맞는 편이기라도 하지. 내 쪽은 상극이라 저 녀석의 기운이 줄어들면 반대로 기운이 더 강해진다고. 인간 세상에 해마다 불바다가 일어나는 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힘을 자제하려고 노력한 내 고충을 누가 알겠어? 그게 다 모두 저 녀석 때문이란 말야!”

“그런 식으로 남을 탓하는 건 그만둬. 이번 일은 엘퀴네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명계에서도 말했잖아. 그날 영혼 배속을 책임지던 자가 실수한 것뿐이야. 엘퀴네스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라고.”

“흥, 그래― 알았어. 어차피 너희는 저 녀석이 그저 반갑기만 하지?”

“이프리트.”

“됐어. 다들 똑같아. 난 이딴 영역에 오래 있어 봤자 기분이 불쾌해지기만 하니까 이만 돌아가겠어. 반가운 존재끼리 어디 잘들 놀아 보라고.”

이프리트는 잔뜩 기분이 상한 얼굴로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화르륵 불길이 되어 사라졌다. 마치 마법 같은 광경이었지만 나는 감탄할 겨를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람.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아니, 설령 있다 해도 그래. 어떻게 첫 만남에 저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퍼붓고 사라질 수가 있지?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냐?

황당한 심정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남은 트로웰과 미네르바도 곤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이런. 단단히 삐쳤네. 아직 어린애라니까.”

“이프리트는 원래 감정이 극단적인 편이니 할 수 없지. 미안해, 엘퀴네스. 우리가 대신 사과할게.”

“어? 아니, 뭘 이 정도로 사과까지…… 난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는 서둘러 두 손을 저었다. 그러자 두 정령왕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변했다.

“이번 엘퀴네스는 상당히 마음이 넓군.”

“그러게. 의외인걸. 물의 정령왕은 다 전대 같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번 기회에 엘퀴네스와 이프리트 사이의 오래된 악연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악연?”

“아아, 물과 불은 본래 상극의 속성인 탓에 대대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거든. 특히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 때가 가장 최악이었지. 아마 한동안은 그 영향이 남아 있을 거야. 앞으로 종종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지만, 엘퀴네스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차분한 미네르바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다시 한 번 뜨악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극의 속성이 원인이라니.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잖아?

“결국 저 여왕님과 매번 마주칠 때마다 싸워야 한단 말인가…….”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냐. 아하하! 아, 근데 저기, 그 엘퀴네스란 호칭 말인데……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

“지훈?”

“그게 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두 정령왕의 모습에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음…… 실은 내가 인간이었을 때 쓰던 이름이거든. 성은 ‘강’이고 이름은 ‘지훈’이야. 새로 태어났으니 새로운 이름에 익숙해지는 게 당연하긴 한데, 아직은 이쪽이 더 편해서 말이야. 뭐, 그렇게 부르기 싫으면 할 수 없지만.”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그들이 내 말에서 주목한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인간이었을 때라니? 설마 엘퀴네스 너, 인간으로 태어났던 거야? 단순히 차원의 틈에 빠져서 헤매고 다녔던 게 아니라?”

“에? 차원의 틈? 아니,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었는데…….”

“헤에, 그게 정말이야? 멋진데. 이건 그냥 유희 정도가 아니잖아. 정령왕이 인간으로 태어나다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군. 역대 정령왕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일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미네르바?”

“……흔한 일은 아니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트로웰과는 달리 미네르바는 그나마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그 역시 눈빛에 가득 담긴 호기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이름이 이곳 발음이 아닌 걸 보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태어났던 모양이지?”

“아, 응. ‘지구’라는 곳인데……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어.”

“흐음. 그렇구나. 그런데 용케 그때의 기억들을 가지고 태어났네? 명계에서 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거야?”

“망각의 과정?”

“그래, 새로 태어나는 경우엔 전생의 기억을 전부 지우는 것이 관례거든. 혹시 특이한 물 같은 걸 마시게 하지 않았어?”

물이라. 설마 그 고약한 액체를 말하는 건가?

미네르바의 질문에 나는 잠시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지독한 쓴맛을 다시 떠올렸다. 그 탓에 덩달아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트로웰이 무슨 사정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긴 했나 보네. 망각의 물은 차마 온전한 정신으론 마실 수 없는 맛이라고 들었지.”

“그런데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건가?”

“그건 당연한 게 아닐까. 엘퀴네스는 물의 정령왕이잖아. 망각의 물이라는 것도 애초에 물의 일종이니까 그것을 다스리는 엘퀴네스에겐 통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상하네. 보통은 처음 마시게 했을 때 효과를 보지 못하면 바로 다른 방법을 썼을 텐데. 왜 그대로 태어나게 한 거지?”

“…….”

여기서 내가 멋대로 생명의 문은 열고 투신(?)했다는 걸 굳이 알릴 필요는 없겠지. 응, 그럴 거야.

인제 보니 아레히스가 내게 이상한 질문을 했던 것도 기억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대책 없이 도망을 쳤다니. 나는 평생 그 일을 가슴에 묻기로 다짐했다. 어쨌거나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런 사소한 비리(?) 따위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지훈’이라고 부르면 된다는 거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엇? 정말? 그래도 돼?”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인데, 뭐.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인간 세상에서 살았을 때 얘기를 듣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앞으로 한동안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빠질 테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나는 다음 순간 이어진 트로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바빠진다니?”

“네가 태어났으니까 지금까지 편법으로 얼기설기 막아 놓은 자연의 규칙들을 재정비해야지. 그게 우리의 임무잖아.”

그, 그런가? 아레히스에게 들었을 땐 그저 내가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막연히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든가 임무 같은 것에 대해선 한 번도 깊이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런 나를 향해 두 정령왕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딱히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막연히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모르는 나는 그저 멀뚱히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인제 그만 시작하는 게 어때?”

결국 기다리다 지친 듯 미네르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침묵과 눈싸움 끝에 얻어낸 승리(?)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에 담긴 뜻을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뭘 시작하는데?”

“자연을 회복해야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그 순간 스산하게 가라앉은 미네르바의 표정을 보며 나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지 않아도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인데 노기까지 스미니 차마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무섭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쳐다봐도 나는 정말 모르는 거거든?

그때 트로웰이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조언을 덧붙였다.

“정령을 만들면 돼.”

“저, 정령?”

“그래, 정령. 하급의 나이아스들이야 네 존재를 느끼고 저절로 탄생하겠지만 중급과 상급 정령들은 네가 직접 만들어야 해. 음? 뭐야, 그 표정은. 정말 몰랐다는 얼굴이네?”

정말 몰랐던 거 맞는데…….

내 표정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는지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드디어 내가 장난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로선 그들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막 갓 태어난 참이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거잖아?

“당연한 건 아니지.”

“어?”

그 순간 이어진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트로웰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트로웰, 지금 뭐라고…….”

“지훈, 너 방금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어? 으, 으응.”

“그게 아니라는 거야. 정령왕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연의 흐름을 읽고 그에 따른 대처 방법을 저절로 깨닫게 되어 있어. 우리가 알려 주지 않더라도 네가 스스로 정령들을 만들어 분포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거지.”

그, 그런 거야? 아니, 그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건 대체 어떻게 안 건데?

마음 같아서는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른침을 삼키는 것뿐이었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파헤쳐진 것 같았다.

그때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미네르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훈,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지금 여기서 정령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있겠어?”

“어? 지, 지금……? 그, 글쎄. 가르쳐 준다면 시도는 해 보겠지만…….”

“흐음……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미네르바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욱 어두워 보였다.

“미네르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아마도. 내가 판단하기엔, 지금 지훈의 상태는 인간으로 태어난 부작용인 것 같아.”

“부작용?”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트로웰을 향해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나였다. 부작용이라니!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아레히스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십몇 년의 세월이 도로 무용지물이 된 것도 억울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병까지 겹쳤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 때문에 그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니까 이런 건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미리 한계를 정하고 마는 거야. 한마디로 스스로 능력을 좀먹고 있는 셈이지.”

“흐응, 골치 아파졌는걸.”

“이건 상당히 큰 문제야. 명계에선 대체 왜 망각의 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은 거지? 그들도 이렇게 될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윽……!’

탄식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나는 어깨를 바짝 긴장시켰다.

인간의 기억을 갖고 태어났기에 벌어진 문제다. 그러니까 그건 결국…… 내가 멋대로 도망친 게 원인이라는 거잖아?

‘이 바보, 멍청이! 내가 언젠간 이런 사고 칠 줄 알았어! 으아, 이제 어떡하지?’

왠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한두 대 맞는 걸론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이 순간 내가 왜 트로웰을 바라보았는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즉시 나는 그를 본 것을 후회했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게 말이야, 미네르바. 대체 명계에서 왜 그랬을까.”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순탄치 않은 미래가 예견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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