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6화 (6/608)

제6화

“설마 영역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소리 하지 마, 트로웰.”

“가능성을 말했을 뿐이야.”

“말도 안 돼. 지금도 이미 충분히 힘들단 말이야. 희망을 품어도 모자랄 판에 여기서 더 나빠질 걸 생각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건 이프리트의 말이 맞아, 트로웰.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확인한 것도 아니잖아. 비관하는 건 사실을 확인하고 난 이후에도 늦지 않아.”

미네르바까지 이프리트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트로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적당한 바람이 가세하면 그것만큼 흉포한 것도 없다. 두 정령왕의 마음이 맞은 이상 연약한 대지인 자신은 태워지기 전에 얌전히 물러나는 수밖에.

“트로웰, 너어― 방금 무척 실례되는 생각하지 않았어?”

“설마.”

노려보는 이프리트의 얼굴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치의 껄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천사 같은 미소였다. 물론 한두 해 그를 보아 온 것이 아닌 이프리트는 결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프리트는 잠시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정말이지. 뭐, 됐어.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물의 영역부터 확인하러 가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 죽겠어.”

이프리트의 재촉에 다른 두 정령왕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불길한 기류는 점점 뚜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위의 정령들은 그 근처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 우왕좌왕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과 혼란의 감정들은 주군인 정령왕들에게 모두 고스란히 전해졌다.

“흠, 이대로는 정령계가 큰 혼란에 빠지겠는걸. 우리의 힘으로 안정시킬 수 있을까?”

“당연한 거 아니야? 안 돼도 어떻게든 해내야지. 나 참. 정령계에서 정령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게 말이 돼?”

“……아니, 하지만 그건 오히려 당연한 현상인지도 몰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미네르바?”

뜻밖의 말에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미네르바는 차분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의 영역은 엘퀴네스 고유의 공간이야. 그리고 우리 정령왕 고유의 영역은 본래 아무나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지. 오직 그 휘하의 정령에게만 허락된 곳이니까. 지금까지 물의 정령이 아닌 다른 정령들이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했던 게 이상한 거야.”

“그치만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주인인 엘퀴네스가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사실 물의 영역이라곤 해도 말이 좋아 그렇지, 지금은 바짝 말라비틀어진 폐허에 불과하잖아? 남아 있는 물의 정령은 나이아스조차 하나도 없는 걸, 뭐.”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이프리트. 그곳은 이미 왕의 영역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지.”

“……그런데 새삼스럽게 지금 갑자기 본래의 질서가 다시 지켜지고 있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트로웰이었다.

그 순간 세 정령왕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바라보았다. 엉켜진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선에서 그 현상이 가리키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맙소사…….”

“……설마?”

* * *

눈을 뜨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물’이었다. 정말 그것 말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 만큼 내 주변은 온통 새파란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바닥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 한가운데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본능적으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을 뻔했지만, 나는 곧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를 움직일 때도 물속 특유의 저항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각의 느낌만 제외하면 공기 중에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우와…… 이거 진짜야?’

내가 물의 정령왕이라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을 뜨자마자 이런 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을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속에서 숨을 쉬다니. 갑자기 너무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보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김규현이었나? 반 친구 중에 판타지 소설의 맹신자인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이 지금 내 상황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마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할 게 분명했지만.

‘아 참, 그렇지. 내 몸! 문을 건너면 원래의 내 모습을 되찾는다고 했잖아. 이게 내 진짜 몸인 건가?’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내 몸을 살폈다. 밀빛에 가까운 새하얀 피부, 그리고 가는 팔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하얗다. 손이 엄청 예쁘네. 게다가 예전에 입었던 흉터들도 없어.’

나 정말 환생한 거구나.

이미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증거들을 만끽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몸이라고 해 봤자 아직은 팔이며 다리며 하나같이 어색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나는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펴 보기를 반복했다. 처음 보는 손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광경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참 신선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이제 막 태어난 상태임에도 내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옷의 형식이 내가 평소에 즐겨 입는 라운드 티셔츠와 긴 바지 차림과 똑같았다. 온통 낯선 것투성이인 상태에서 그것만은 친숙해 마음에 들었다.

‘어……?’

그때 문득 갑자기 주변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껄끄러운 불순물이 침범해 오듯, 묵직한 느낌의 무언가가 가까이 다가서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감각이 느껴지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정도일까. 하나같이 화려한 외모에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와― 이것 봐. 사방이 온통 물이야.”

“그러게. 설마 했는데 정말로 재생했네.”

“놀라워. 그 황폐하던 공간이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감탄한 얼굴로 연방 주변을 살피던 그들이 홀로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세 사람은 흠칫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나 역시 갑자기 나타난 그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기분과는 별개로 대충 저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나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정령왕들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늘 처음 보는 존재들임에도 마치 오랜 시간을 알아 온 것처럼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음, 저기…… 엘퀴네스?”

한동안 나와 그들 사이에 흐르던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외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귀밑을 살짝 덮는 검은 머리칼과 한낮의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듯 새카만 피부, 무엇보다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남자…… 맞지?’

외모는 확실히 소년인 게 분명한데 이런 의문이 드는 건 아마도 그가 가진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 요염하다고 해야 하나. 검은색 피부가 사람을 섹시하게 보이게 한다는 건 알지만, 그 표현이 이토록 지독하게 어울리는 존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그의 눈동자는 무한정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홀리게 될 것 같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확인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층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역시.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아니지. 지금은 탄생을 축하하는 게 먼저인가? 꽤 늦었구나. 이제라도 와 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야. 안 그래도 제법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거든.”

“트로웰, 쓸데없는 사족은 붙이지 마.”

“하하, 미안. 엘퀴네스가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헤에, 저 녀석이 트로웰. 그러니까 땅의 정령왕이구나.’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에게선 정겨운 흙냄새가 풍겼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면 한가득 맡곤 하던 청명한 숲의 냄새였다.

이어서 나는 그의 옆에 서 있는 하얀 피부의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끝 부분이 거의 투명하다시피 희미했다. 표정이 없이 차분하게 나를 응시하는 모습에선 고운 바람이 감돌았다.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온통 하얀색 일색이란 느낌이었다. 심지어 눈동자까지 새하얀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오히려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뭐야, 이번 엘퀴네스는 여성체야?”

그 순간 들려오는 가늘고 높은 음성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뚫어질 듯이 나를 살피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소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소녀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굉장히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타오를 듯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칼도, 토끼처럼 새빨간 커다란 눈동자도, 굳이 다른 장신구를 차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그 자체만으로 화려하고 눈에 띄었다. 심지어 피부색조차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옅은 핑크색이다. 그런데도 모든 것들이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리는 게, 마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미소녀 전사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악당 세력의 여왕님 쪽인 것 같지만.

‘음, 그러니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겠지?’

정령왕은 4명이라고 했고, 남은 것은 이프리트밖에 없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대체로 내게 호의를 보이는 다른 두 정령왕에 비해 그녀는 다소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약간 날카롭게 올라가 사나워 보이는 눈매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근데 나더러 여성체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여자같이 생겼단 소린가?’

여자 같다니. 강지훈 17년 인생을 통틀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다. 당장 거울을 찾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온통 물밖에 없는 공간에 그런 세세한 도구가 갖춰져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일까. 이프리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너 혹시 벙어리야?”

“이프리트.”

“하지만 저 녀석이 계속 기분 나쁘게 빤히 바라보고만 있잖아. 아무리 엘퀴네스가 싸가지 없는 걸로 유명하다고 해도 그렇지. 첫 만남에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아?”

……헐. 내가 싸가지 없는 걸로 유명하다고?

이곳에서 날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을 텐데 왜 그런 소문이 퍼졌지? 설마 아레히스들이 나에 대해 뭔가 악담이라도 퍼뜨리고 다니는 건가? 권하는 용액을 뿌리치고 도망쳐 왔으니 그들이 앙심을 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이번에도 반응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 혼자 속으로 우물거렸다. 그러자 더욱 발끈했는지 이프리트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니까?”

“아…….”

“뭐?”

“……안녕.”

결국 재촉에 못 이긴 나는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면서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째선지 인사를 받는 정령왕들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뭔가에 경직된 듯 상당히 떨떠름한 것이, 어딘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슬쩍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하세요?”

“…….”

“…….”

어라라, 이것도 아닌가?

사방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으로 뒤덮였다. 나는 조금 전보다 더 굳어진 세 정령왕을 보며 어색하게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음, 저기…… 정령왕들 맞지? 인사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아직 경황이 없어서 그만……. 으음, 정식으로 인사할게. 일단은 내가 새로 태어난 물의 정령왕……인 건 맞을 거야. 딱히 착오가 생긴 게 아니라면 말이야.”

“……착오라니?”

“아니, 그게…… 정령왕이라곤 해도 사실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내가 이렇게 운이 좋을 리가 없는데 좀 이상하달까. 아하하하, 하하하하. 아, 아무튼 잘 부탁할게.”

“…….”

그러나 허무한 웃음 끝에 애써 건넨 인사말은 그저 홀로 공중에 흩날릴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에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어,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니?”

그러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그들 중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미안. 신경 쓰지 마. 딱히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전대의 엘퀴네스와 성격의 괴리가 너무 커서 적응이 잘 안 됐을 뿐이야.”

“전대의 엘퀴네스?”

……라는 건, 내 이전 세대의 물의 정령왕을 말하는 거겠지? 성격이 괴리가 크다는 건 그만큼 나와 많이 달랐다는 소리일 것이다. 혹시 싸가지 없다는 것도 내가 아니라 전대를 말했던 건가? 그 녀석의 성격이 도대체 어땠기에?

“아무튼 환영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 으응……. 나, 나도 잘 부탁…….”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어색하게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트로웰의 표정이 묘하게 그리운 빛을 띠었다.

“오랜만이야, 물의 감촉.”

“……에?”

“굉장히 기분 좋다고.”

트로웰은 정말로 기쁜 듯 나른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특유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시선을 둘 곳이 없는데, 미소까지 더해지자 남자라는 걸 아는데도 정신이 다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건 바로 이어진 그의 다음 행동이었다. 그가 내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은 것이다. 그 뜻밖의 행동에 나는 손을 빼지도, 마냥 놔두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속인데도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저, 저, 저기? 트, 트로웰?”

이봐, 너.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자각 없이 유혹하지 말아 줄래? 아니, 그보다 나는 남자잖아! 뭘 두근거리는 거야! 정신 차려, 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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