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화 (5/608)

제5화

“자, 그럼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 아, 참참. 그걸 잊을 뻔했네요.”

“……?”

아레히스의 말에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수하 중 한 명인 프레우니스가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내게 불쑥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이런 걸 준비했나 싶었다.

어쨌거나 당연히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나는 ‘이게 무슨 짓이지?’ 하는 시선으로 그의 상관인 아레히스를 바라봤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문을 통과할 때 받는 차원의 압력을 완화해 주는 용액입니다. 마셔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환생 이후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막는 역할도 하거든요.”

“……이걸 마시라구요?”

컵 안엔 마치 용암처럼 불그스름한 빛깔을 지닌 걸쭉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따금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방울이 툭툭 터져 나가는 것을 보니 천 년 식욕이 다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이거…… 정말 마셔도 괜찮은 걸까? 권하는 걸 거절할 수가 없어 떨떠름한 기분으로 받아들긴 했지만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런 내 심정을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아레히스가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조금 쓰긴 해도 맛은 크게 나쁘진 않을 겁니다. 영체에도 무해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설마하니 제가 먹고 잘못되는 것을 드리겠습니까?”

“아하하…… 그……렇죠?”

그런데 말이지, 아레히스 씨? 당신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무서워.

차마 면전에 대고 ‘네’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어설픈 웃음으로 맞장구쳐 주었지만, 그럴수록 정체불명의 액체에 대한 내 거부감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러자 아레히스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억지로 내 입에 컵을 들이밀었다.

“자자, 뭘 그렇게 망설이십니까? 몸에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쓰다는 거 모르십니까? 얼른 드세요, 얼른!”

“에? 자, 잠깐만요! 이게 무슨…… 웁!”

무슨 짓이냐고 항의할 겨를도 없었다. 입이 벌어진 틈을 타 그가 액체를 입안에 들이부은 것이다. 끈적이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입안을 가득 점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도로 뱉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심코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그 결말은 끔찍했다.

“쿠흡! 우웨엑! 이게 뭐야!”

“이런, 괜찮으십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우웩! 우웨에엑!”

뭐? 조금 쓰지만 맛은 나쁘지 않아?

하늘에 맹세하건대, 세상의 그 어떤 쓴맛도 이보다 최악이진 않으리라.

뱃속에 들어차는 불쾌한 기분에 나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로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토해내려고 애를 써도 한 번 들어간 액체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딴 걸 강제로 마시게 하다니!’

나는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아레히스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가 이 음료의 맛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억지로 마시게 한 것부터가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리 살기에 가까운 째림을 날려도 그저 여유만만한 자세로 나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다. 그 시선은 분명 ‘관찰’이었다. 마치 약물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연구원처럼 말이다.

‘이런 썩을……. 나 혹시 마루타 된 거 아니야?’

정령왕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로 사람 정신을 빼놓고 사실은 이상한 약물로 실험을 한 게 아닐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 다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가 진정된 것을 느꼈는지 아레히스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자, 그럼 엘퀴네스 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지, 질문?”

“1+1이 뭐죠?”

“…….”

이 순간 나는 사람이 살의에 찬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절절히 실감했다.

기절할 만큼 쓴 약을 먹여 사람 울화를 돋우더니…… 뭐? 이젠 뭐가 어쩌고 어째?

“에, 엘퀴네스 님?”

스산한 내 표정에 당황한 것일까. 아레히스와 그 수하의 사자들이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빠드득 이를 갈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1+1……?”

“네, 그, 그랬습니다만.”

“우와, 정말 미치겠네. 이 사람이 진짜 누굴 호구로 아나!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요? 1+1? 하! 저 이래 봬도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인간이거든요? 그런 저한테 지금 5살짜리 코흘리개도 다 아는 걸 물은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아니면 뇌가 청순한 것 같아요?”

“으음. 죄송합니다만, 엘퀴네스 님. 저나 엘퀴네스 님이나 인간은 아닌데…….”

“이익!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 아닌 게 뭐! 인간이 아니면 나한테 1+1이 뭐냐고 물어도 되는 거야? 1+1이 뭐야! 2잖아, 2! 2 아니야? 여기선 1+1이 2가 아닌가 봐요? 아― 그래요? 여기선 2가 아닌 거야? 우와, 그건 또 처음 알았네. 여긴 한국이랑 숫자의 개념이 다른가 보죠?”

“흠흠, 알았습니다. 알았으니 제발 진정하십시오. 흐음, 역시 안 되네. 이걸 어쩌지…….”

아레히스는 연방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해했다. 내 무례한 행동보다는 다른 부분에 더욱 곤란함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는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달랜 뒤, 수하들과 구석으로 가서 심각하게 무언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이대로 그냥 들어가시게 할 수는…….”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지?’

왠지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살짝 그들이 의논하고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대체로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드문드문 몇 가지 말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할 텐데, 역시 더 먹여야겠죠?”

“아무래도 더 드셔야…….”

“……할 때까지 해 보는 게 ……습니까?”

‘헉!’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그들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다른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그 몇 마디만으로 이미 그들의 목적은 명백했다. 조금 전의 그 용액을 내게 다시 먹이려는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저런 최악의 음료수는 내 평생 단 한 모금이면 족하다! 아니, 넘치고도 남아! 내가 저딴 걸 두 번 다시 먹을 줄 안다면 그건 인간 강지훈을 너무 우습게 본 거라고! 내가 이대로 얌전히 당해 줄 줄 알고?

그들끼리의 대화가 끝났는지 서서히 내게로 집중되는 6개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그렇게 사정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시야에 한구석에 있는 ‘생명의 문’이 들어온 것은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 이상한 액체가 차원의 압력을 완화해 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저걸 제대로 마시지 않고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앗! 잠깐만, 엘퀴네스 님!”

“에잇, 난 몰라!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뭐! 그딴 액체 다시 마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빌어먹을!”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목숨을 가지고 도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독할 만큼 쓴 약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난 아레히스의 만류를 채 듣기도 전에 겁도 없이 생명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고,

“우아아악!”

정신을 잃을 만큼 거세게 빨아 당기는 기류에 휘말려 문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저편에서 희미하게 아레히스의 외침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기류에 밀려드는 순간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인간 강지훈’으로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지훈을 삼킨 생명의 문 내부는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잔잔한 공기가 이렇듯 난폭하게 움직이는 것은 누군가 그 안에 들어갔을 때뿐이다. 거친 기운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듯 사방으로 폭주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명계의 인물인 아레히스나 두 명의 영혼 인도자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저 기류가 빨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인세에 탄생할 영혼밖에 없었다.

“흐음…… 그렇게도 이 약이 싫었나. 저렇게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가 버리다니.”

지훈이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는데도 아레히스의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로서는 이제껏 명계의 골머리를 썩혀 오던 사건 하나가 해결된 것이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인도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레히스 님? 망각의 물이 소용없었으니 엘퀴네스 님은 인간의 기억을 가진 채 탄생하게 될 겁니다. 정령계에 혼란이 빚어지지는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혹시나 정령왕으로서의 직무를 하지 못하시게 된다면…….”

그러나 두 남자의 염려와는 달리 아레히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인간으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인간과는 영혼의 근본부터 다른 순결한 정령왕이니까요. 적응 과정에서 진통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오히려 저는 기대가 되는데요?”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지워 보고자 사용했던 망각의 물은 지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본래라면 마시는 순간부터 숫자의 계산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말하는 법조차도 잊게 해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전설의 액체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정령왕의 존재가 신(神)에 가까운 존재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지훈이 ‘물’을 다스리는 엘퀴네스였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망각의 함량을 더욱 높인 상태였는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을 보면 후자 쪽의 이유가 더 맞으리라.

아레히스는 점점 잦아드는 기류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인간을 이해할 줄 아는 정령왕이 있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 * *

풍요로운 대지와 맑은 공기, 넘치는 생수와 타오르는 정열의 불꽃.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축복의 땅 아크아돈.

그러나 이제 이곳은 더 이상 과거의 풍요로웠던 세계가 아니었다.

마른 대지는 과실을 맺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으며 바람은 먼지를 날리는 폭풍이 되었고, 사랑받던 불꽃은 건조한 공기에 기폭제가 되어 나날이 생명을 삼키는 흉포한 존재로 변해 가고 있었다.

물의 부재(不在).

모든 것은 10년 전부터 시작된 지독한 가뭄 때문이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고대 때부터, 아크아돈은 단 한 번도 물이 부족한 일이 없던 세계였다. 해마다 적당량의 비가 내렸고, 대륙 어디를 가도 맑고 깨끗한 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지만 처음 한두 해가 지날 때까지도 사람들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상에서 사소하게 벌어질 수 있는 크고 작은 해프닝 중 하나쯤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한두 해에서 멈출 줄 알았던 가뭄은 3년이 되고 4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0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세계의 멸망을 직감했다.

이미 강은 거의 말라붙어 바닥을 드러내게 된 지 오래였다.

절망한 사람들은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먼바다의 물을 끌어와 정제해 뿌리거나 인공 비를 만들어 마른 대지를 달랬다. 심지어 그들의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고 사람을 잡아 산 채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진정한 이유를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아크아돈에 10년째 가뭄이 지속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연을 관장하는 정령계에 물의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은 것.

오직 그 하나로 인한 재앙이었다.

* * *

“미네르바.”

뒤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막 물의 영역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10년간 아무런 변화가 없던 그곳에 조금 전 이상한 징후가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본 그곳엔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과 불그스름한 피부의 소녀가 서 있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과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였다.

“너희…….”

“방금 그거, 물의 영역이었지?”

“너도 느꼈어?”

“너도?”

“응.”

짤막하게 의사를 확인한 그들은 굳은 얼굴로 마주 보았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소멸한 전대에 이어 새로 탄생해야 할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은 지 벌써 25년이 넘었다. 뒤늦게 사태를 눈치챈 신계에서 얼마 전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아직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진 않았다. 그 때문에 정령계는 현재 하루하루가 비상 상태였다.

물의 부재에 신음하는 것은 아크아돈만이 아니다. 정령계 역시 균형을 잃은 힘을 안정시키기 위해 오랜 진통을 앓고 있었다.

4대 정령은 누구 하나 강하고 약함이 없이 균등한 힘으로 서로 완벽하게 보완하는 체제다. 그 때문에 단 하나의 부재에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들쑥날쑥해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정령왕들은 모두 극도로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의 영역에 일어난 수상한 징후는 그다지 좋은 조짐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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