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정령왕 때문이었습니다.”
“정령왕?”
“아크아돈은 주신이 직접 개입하는 지구와는 달리, 4대 정령을 통해 자연계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곳이거든요. 특히나 각 정령왕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태계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죠.”
“그, 그게 뭔데요?”
나의 질문에 아레히스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지구 출신이시면 이런 단어들이 생소하시겠군요. 정령이란 자연의 4대 원소, 그러니까 물, 땅, 공기, 그리고 불에 서려 있는 순수한 영체를 뜻합니다. 정령왕은 그런 그들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존재로, 주어진 기본 수명만도 만 년이 넘지요. 능력 또한 거의 준신(神) 급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소멸한 후엔 신의 삶을 부여받으니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헤에, 죽으면 신이 된다고요?”
“애초에 정령왕이란 존재는 가장 온전하고 고결한 영혼으로만 탄생하거든요. 신의 자격을 부여받기 충분하지요. 물론 이를 거절하고 인세(人世)를 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럴 때는 드래곤 같은 고귀한 종족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고요.”
“으음,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아까 4대 차원이 어쩌구 할 때 정령계라는 곳도 있었던 것 같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정령왕이란 존재 때문에 재앙이 일어났다구요? 그들이 일부러 비를 내리지 않은 건가요?”
“아니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
“최근에 물의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있었거든요. 한 정령왕이 소멸하면 곧바로 다음 정령왕이 탄생하여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대의 물의 정령왕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았더군요. 아크아돈에서 일어난 10년 재앙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죠.”
“겨우 그거 하나로요?”
물의 정령왕인지 뭔지 하나가 없다고 10년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내게 아레히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가 아닙니다, 지훈 군. 그만큼 정령왕의 존재가 대단한 겁니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모든 자연계의 ‘물’에 대한 권리와 통제가 가능한 존재니까요. 특히 아크아돈은 정령계의 지배를 받는 차원이니 더욱 영향이 클 수밖에요.”
“으음, 그렇겠네요.”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무튼 물의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를 조사하던 신들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습니다. 탄생을 앞두고 있던 정령왕의 영혼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되고 만 겁니다.”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두 인도자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의 일로 상당히 혹사를 당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레히스 역시 괴로운 과거를 추억하는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정령왕의 영혼은 만드는 것도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사라진 물의 정령왕은 이미 선대로부터 힘까지 다 물려받은 상황이었거든요. 그를 찾지 못하면 물의 정령왕의 대가 끊기는 거나 다름이 없었죠. 영혼의 탄생은 이곳 명계의 소관이라 자칫 모든 책임을 저희들이 전부 뒤집어쓸 판국이었습니다. 전 차원에 인도자들을 보내 수색을 하고, 과거의 모든 자료들을 꺼내어 훑고, 온종일 그를 찾는 일에만 매달렸지요. 그래도 끝끝내 나타나지 않아 이젠 틀렸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장황하게 설명하던 아레히스는 이내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정령왕의 영혼을 찾아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지난 세월 그를 찾기 위해 고생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처럼 아득해지는 순간입니다.”
“예? 찾았어요? 어디에 있는데요?”
혹시나 운이 좋으면 그 대단한 존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그 즉시 바로 대꾸한 아레히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정령왕에게 소개 좀 해 달라는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아니, 평소의 내 성격을 짐작하건대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정말로 바보 같은 행동을 말이다!
“어디에 있긴요, 바로 제 앞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네?”
대체 무슨? 아레히스의 앞이라면 나밖엔 없는…… 에에엑? 서, 설마? 순간 당황하는 나를 보는 아레히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만하게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승기를 잡은 장군처럼 의기양양한 포즈로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띠었다.
“두 번째 소울 메이트의 색은 종족의 지위. 각도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다채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정령을…… 그중에서도 사파이어와 같이 시릴 듯한 푸른색은 ‘물의 정령’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은 현재 모두 소멸한 상태. 정령왕이 먼저 태어나지 않으면 하급 정령들은 태어날 수가 없죠. 따라서 이번 소울 메이트에서 물의 정령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물의 정령왕’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빠른 속도로 설명을 마친 아레히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운명을 잃은 여러 영혼들에게 시도해 봤지만 이 색깔을 선택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에에에에엑??”
* *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세계를 다스리는 4대 정령왕이 있었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불의 이프리트, 바람의 미네르바, 땅의 트로웰, 그리고 물의 엘퀴네스였어요. 어느 날 물의 엘퀴네스는 자신이 소멸할 때가 다가옴을 알았고, 곧바로 명계로 가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모든 힘을 부여해 주었답니다. 새로운 물의 정령왕이 탄생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새로 탄생한 물의 정령왕은 그만 멍청하게도 엉뚱한 세계에서 잘못 태어나 인간 노릇을 하였답니다.
정말 골 때리지 않나요? 글쎄, 명계의 사자들이 잘못을 지적해 줄 때까지 자기가 정령왕인지도 몰랐다지 뭐예요? 자기 때문에 다른 쪽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죽어 가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것참 정말 띨띨한 놈 아닙니까? 하하하하하하하!
“글쎄,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번 일은 지훈, 아니 엘퀴네스 님의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당신께서 그렇게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느새 나에 대한 호칭을 극존칭으로 바꾼 아레히스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 환상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더 이상은 못 봐 주겠는 모양이다.
“당신이 잘못 태어나신 건 저희 쪽의 불찰이었으니 당신의 부재로 인한 아크아돈의 피해도 어디까지나 저희 책임입니다. 이미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시정 조치를 취해 둔 상태이고, 다행스럽게도 사태가 더 악화하기 전에 당신을 찾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모든 일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뿐이에요.”
아레히스가 말한 원상태라는 것은 내가 아크아돈의 정령계라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나는 쉽사리 그의 말에 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저같이 평범한 놈이 정령왕이라니…….”
머리가 특별히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외모도 그저 그래서 변변한 여자 친구 하나 만들어 본 역사가 없는 나였다. 그런 내가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레히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단번에 정색을 하며 단 한마디로 내 생각을 일축했다.
“소울 메이트는 주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 착각일 리가 없습니다.”
“하, 하지만 그쪽에서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은 게 10년째라면서요. 저는 지금 17살이거든요?”
“아뇨, 정확히 태어나지 않은 주기를 따지면 25년째입니다.”
“에?”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아도 한동안은 기존에 태어난 물의 하급 정령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거든요. 모든 물의 정령이 소멸하고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된 것이 10년이 된 것뿐입니다. 게다가 본래 차원들 사이에선 시간의 흐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쪽에서의 3년이 지구에선 10년이 될 수도, 단 하루가 될 수도 있는 법이죠.”
“으음, 그래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요. 인간이었을 때 몸이 약하다고 하셨죠? 그건 정령왕의 강대한 힘을 인간의 육체가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비가 잦고 해가 지날수록 피해가 커진 것은 당신이 성장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정령왕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죠. 이래도 납득이 되지 않으십니까?”
그, 그랬던 건가요? 하지만 그렇게 치면 나랑 동년배인 데다, 한국 출생이자, 어릴 때 몸이 약했던 애들은 전부 엘퀴네스 후보인 거잖아. 그런 애들이 어디 한두 명이겠냐고!
뭔가 납득하려 노력해 볼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끝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다시 태어나면 된다는 거잖아. 굳이 내가 틀림없다는데 딱히 별일이야 있겠어? 살다가 아니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다. 이미 한 번 잘못 태어난 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체념에 가까운,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후우, 알았어요. 어떻게든 되겠죠.”
“물론입니다. 별로 어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곳엔 엘퀴네스 님의 동료인 다른 정령왕들도 계시니까요. 다들 하나같이 좋은 분…… 음, 뭐 어쨌거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왠지 말을 하다 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착각이십니다.”
지금 저렇게 말하는 아레히스가 시선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내 착각이겠지? 왠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냥 내 착각일 거야.
나는 집요할 정도로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제대로 된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내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아레히스는 상당히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시계를 확인하듯 몇 번이나 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내 초조한 얼굴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자, 그럼 이제 슬슬 환생하러 가실까요?”
“에? 벌써요?”
“아크아돈에선 지금도 한 시간에 몇 명씩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크아돈을 재생시키려면 엘퀴네스 님이 서둘러 탄생하셔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꽤 심각한 상태라고 했었지.
나는 순순히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우리는 방문을 열고 나가 끝없이 이어지는 새하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없는 복도는 마치 미로처럼 수십 개의 갈래로 얽혀 있었다. 더구나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앞을 분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들은 시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건지 단 한 번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걸어갈 방향을 정했다.
거침없던 그들의 발이 멈춘 것은 내가 거의 하루 종일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복도의 끝을 알리는 막다른 벽 앞에 와 있었다. 내가 당황하지 않은 건 그 앞에 작은 나무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안개들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위에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차원 4. 정령계]
“……설마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령계에서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
그래, 설마 아무려면 그럴 리가. 태어나는 게 그렇게 썰렁하고 간단한 형식일 리가 없어. 암 그렇고말고. 그러나 스스로 세뇌하듯 중얼거리던 나에게 아레히스의 가차 없는 대답이 화살촉처럼 날아와 박혔다.
“호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건 ‘생명의 문’이라는 겁니다. 이 문을 통과한 자는 주어진 운명에 따라 알맞은 신분과 외모를 갖고 태어나게 되지요. 단번에 알아내시다니 눈치가 빠르신데요?”
“…….”
제길. 난 왜 꼭 이런 쓸데없는 건 잘 맞히는 거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응? 그런데 방금 뭐라고 그랬지? 외모를 갖고 태어난다고?
“정령도 외모가 있어요?”
“물론이지요. 특히 정령왕들은 본 영혼의 모습에 가장 가깝게 구현됩니다. 재질이 정해져 있어 각자 고유색을 띠긴 하지만요.”
“고유색?”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 같은 것 말입니다.”
“아하! 음, 그럼 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색만 바뀌어서 태어나는 건가요?”
지금까지 의식하지 않았는데, 현재 내 모습은 강지훈이었던 시절 그대로였다. 영혼의 모습대로 구현된다는 건 결국 이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겠지? 나는 속으로 태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아레히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네에?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에? 아니에요?”
“당연하죠! 지금 엘퀴네스 님의 모습은 진짜 당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있을 때 입었던 육체에 영향을 받아서 본래의 모습이 변질한 상태이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 본 모습을 되찾으실 겁니다.”
“그, 그래요?”
내 본래의 모습이 따로 있다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나는 조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왕 새로 태어날 바에야 진짜 모습을 찾는 게 좋긴 하겠지만 그래도 막상 달라진다니 조금 섭섭한 기분이었다. 17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인사하던 얼굴이랍시고 잘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나름대로 정이 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