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자, 여기에 앉으세요.”
“…….”
내가 도시에 갓 상경한 촌놈처럼 굳어 있는 동안 아레히스와 인도자들은 덤덤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악하고 있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다들 아무렇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뭐야, 여기선 이런 일이 당연한 건가?’
머쓱해진 나는 주춤거리며 아레히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왕이면 미리 예고라도 좀 해 줄 것이지. 말투는 친절하지만 배려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것 같다.
자리에 앉자마자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아레히스는 곧 품 안에서 사각으로 된 투명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 상자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덮개를 열자 그 안에서 여러 장의 카드가 튀어나왔다. 뒷면은 전부 검은색, 앞면은 전부 원색으로 색칠된 상태였다.
“……?”
처음 보는 물건에 의문을 보이는 내게, 아레히스는 그에 대한 설명 대신 다른 말로 화제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저승 아닌가요?”
“후후, 비슷합니다. 정확하게는 명계라고 합니다.”
“명계요?”
“신계, 정령계, 마계와 더불어 4대 차원이라 불리는 곳 중 하나죠. 중간계, 그러니까 지훈 군이 살았던 지구 같은 곳과는 달리 이 4개의 차원은 오로지 독자적으로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육체를 지닌 자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세계이지요. 이렇게 설명해 드리면 이해가 될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죽어서야 올 수 있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그가 하는 설명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4대 차원이니 중간계니, 온통 딴 세상(실제로도 딴 세상이지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레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튼 이곳 명계에서 하는 일은 지훈 군이 익히 알고 있는 저승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생이 다한 영혼을 거두고 다시 내세에 분배하죠. 바로 지훈 군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으음, 대충 알겠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된 거예요? 제대로 사망 처리가 된 게 맞나요? 아까 저분들의 말로는 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라고 하던데…….”
“그에 관해서 이제부터 전부 설명을 드릴 겁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요.”
부드럽게 답한 아레히스는 곧 웃음기를 거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우선, 지훈 군에게 사과의 말씀부터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쪽의 착오에 의해서 생긴 사고였습니다. 영혼의 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겠군요. 지훈 군은 피해자입니다.”
“영혼의…… 분배요?”
왠지 시작부터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말이었다. 내가 떨떠름한 어조로 되묻자 아레히스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세의 길을 걷는 영혼이든 새로 창조된 영혼이든, 일단 육체를 입는 자들은 모두 이곳 명계에서 분배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분배 과정 연산에 착오가 생겨서 원래 가야 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잘못 분배되는 경우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라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10억 분의 1, 혹은 100억 분의 1도 되지 않을 만큼 지극히 낮은 수치의 확률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혹, 부모 형제와 유대감이 없지는 않았습니까?”
“……!”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는 내 반응에 아레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약간의 연민과 죄책감, 동정이 어린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는 지훈 군이 그들 가족의 운명에 정해지지 않은 존재였으니 소홀히 대하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아마 그들도 지훈 군을 홀대하면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이 아이를 거부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저희의 실수 때문에 지훈 군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게 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진짜 제 가족은 따로 있다는 건가요?”
“본래의 길을 찾으면 그렇게 될 겁니다. 당신의 운명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으니까요.”
애써 달려온 레일이 출발 지점부터 틀렸다는 소리였다.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한 내게 아레히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훈 군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이 없는 혼은 육체와의 결속이 약하기 때문에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분리가 되거든요.”
“하하하…….”
어쩐지 별로 심하게 부딪힌 것 같지도 않았는데 죽어 버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전부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겪은 교통사고는 가벼운 수준의 접촉사고였을 뿐이다. 이전에도 그 정도의 충격은 자주 겪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도로만 따지면 그 전에 받았던 충격들이 더 큰 편이었다.
사실 자랑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엔 지나가는 불량배에게 잘못 걸려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마침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태진이가 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며칠간 병원 신세를 졌을 것이다.
그때의 일을 계기로 태진이와 친해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분리가 되는 거라면 이미 그때 분리가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아, 그건 지훈 군이 그 상황 자체를 위협으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육체는 멀쩡하지만 영혼과의 결속이 약한 겁니다. 이 경우엔 육체적인 충격보다 정신적인 충격에 영향을 더 많이 받습니다. 즉, 당신이 ‘죽는다’고 인지하는 때에 결속이 끊어진다는 뜻이죠. 어지간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지훈 군은 살고 싶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던 모양입니다.”
“…….”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그런 의지는 내게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어려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할 나이에 죽었다면 스스로 인도자를 찾아가지도 못해 우연히 발견되기까지 영원토록 혼자서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아레히스에게 듣는 순간, 나는 그나마 나에게 아주 운이 없지는 않았다고 속으로 자위했다.
하지만 내 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 * *
“자, 그럼 지훈 군의 진짜 운명을 찾아보도록 할까요? 이것을 봐 주십시오.”
아레히스가 나에게 내민 것은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 꺼내 두었던 카드들이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은 ‘소울 메이트’라고 불리는 카드입니다.”
“소울 메이트?”
“영혼의 동반자. 즉, 이 카드에 칠해진 한 장 한 장의 색깔들이 영혼에게 부여된 운명을 나타냅니다. 이미 17년이나 공백이 생겼으니 당신은 되도록 빨리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 소울 메이트가 위치를 찾는 걸 도울 겁니다.”
설명을 마친 아레히스는 곧장 카드를 한데 섞어 모은 다음, 검은색의 뒷면이 위쪽으로 향하도록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나는 불안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뒤집힌 카드들을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하는 건데요?”
“간단합니다. 이 카드들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한 장을 고르면 됩니다.”
“……그것뿐인가요?”
“하하, 너무 간단하지요? 하지만 이래 보여도 소울 메이트는 주신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신뢰하셔도 됩니다.”
“…….”
주신이라고 하면 가장 높은 신을 말하는 건가?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카드 중에서 아무거나 뽑아 들었다. 고민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에 고르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걸로 할게요.”
“오, 선택하신 겁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고개를 끄덕인 아레히스는 내가 고른 카드를 바르게 뒤집었다. 그러자 한눈에 보아도 화사한 색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하도록 맑은 하늘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늘색이라곤 할 수 없었다. 각도를 다르게 할 때마다 색깔이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늘색과 하얀색 그리고 붉은색, 마지막으로 다갈색의 빛이 한 면 위에서 일률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아름답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아레히스와 인도자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헉! 아레히스 님!”
“이, 이건!”
“……?”
일제히 신음을 삼킨 그들은 부릅뜬 눈으로 카드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상황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충분했다.
혹시 내가 고른 카드에 문제가 있는 건가?
괜히 불안해지는 기분에 나는 한껏 위축된 상태로 물었다.
“저기……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됐나요?”
“하아. 이거 정말 행운이랄지, 운명이랄지…… 아무래도 드디어 찾은 것 같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예?”
찾았다니? 뭘?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에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아레히스가 서둘러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생각만 했군요. 죄송합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그만…….”
“대체 무슨 일인데요?”
“궁금하십니까?”
“아, 아니 됐어요. 그보다 그냥 카드를 다시 뽑으면 안 될까요? 사실 조금 전엔 너무 대충 뽑은 것 같거든요.”
하지만 내 말에 아레히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소용없습니다. 이 소울 메이트의 선택은 단순히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고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여기서 선택된 색은 비록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거나,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진 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운명의 색깔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윽, 그래요?”
“예, 설령 다시 카드를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해도 당신은 반드시 이 카드를 고르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운명의 색이기 때문이죠.”
아레히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격양된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그의 두 뺨은 조금 전과는 달리 옅은 붉은색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카드에 담긴 색깔들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소울 메이트의 첫 번째 색은 영혼에게 부여된 육체의 종족을 나타냅니다.”
“종……족이요?”
“그렇습니다. 지훈 군이 살던 세계에선 생소한 단어겠지만, 중간계의 수많은 차원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초록색은 초목을 상징하는 엘프, 붉은색은 열정을 상징하는 인간, 검은색은 어둠을 지배하는 마족, 흰색은 신성을 상징하는 신족, 파란색은 고귀함을 상징하는 드래곤, 그리고 금색은 뛰어난 기술성을 상징하는 드워프입니다. 그리고…… 이 다채색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종족의 순서가 모두 지나고 나자 아레히스는 생긋 웃고는 또 다른 소울 메이트를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단 네 장으로만 이뤄진 배열이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레히스는 다시 한 번 카드를 고르도록 권유했고, 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소울 메이트에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번에 고른 카드는 사파이어보다도 푸르른 시원한 파란색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아레히스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하는 내게 불쑥 엉뚱한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지훈 군. 전생에서 몸이 약하거나 잔병치레를 자주 하지는 않았습니까?”
“예? 아, 네. 체력이 약한 편이긴 했는데…….”
“비가 자주 오거나 태풍, 혹은 장마로 인한 피해를 당한 적은요?”
“그런 적은 없지만 비는 자주 왔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릴 때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여름은 유독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해마다 도로가 침수되고 계곡에 사람이 갇히는 등, 장마 피해 사례가 연일 뉴스에서 방영이 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 이야기가 왜 지금 이 순간에 거론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무효로 돌아가 버린 전생인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지금은 원래의 내 위치를 찾는 중이 아니었던가.
“문제까진 아닙니다만, 대답은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조금 전에 제가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이 세상엔 지구만이 아닌 여러 종족이 존재하는 차원들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네, 기억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레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 차원들 중에서 가장 이름 높은 곳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아크아돈’이라 불리는 곳이죠.”
“아크아돈?”
“‘첫 번째 탄생’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중간계에서 가장 첫 번째로 세워진 차원이고, 그만큼 고귀하고 거룩한 땅으로 이름 높은 곳이죠.”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말에 집중했다. 혹시 조금 전에 했던 질문들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곳에 재앙이 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10년이 넘도록 전 대륙에 비가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헉, 10년이요? 그건 재앙이 아니라 거의 종말 수준이잖아요. 그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미 멸망했겠네요?”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비만 내리지 않을 뿐, 햇빛이 강하다거나 무더위가 지속되는 추가적인 문제는 없거든요. 더구나 아크아돈은 지구와는 달리 특별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마법사들이 인공우를 내려 간신히 버텨 가는 것 같더군요.”
“헤에, 마법사요?”
게임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 마법사가 실제로도 존재한다고? 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아레히스는 귀여운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아크아돈엔 특히 더 유능한 마법사들이 많은 편입니다. 물론 그들의 선에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요.”
“그럼 어떻게 해요? 뭔가 조치를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더구나 아크아돈은 절대 멸망해서는 안 되는 차원 중 하나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한때 전 신계의 모든 신들이 아크아돈의 상황에 주목하고 재앙의 원인을 찾았죠.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뭐, 뭐였는데요?”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해서일까. 나랑은 상관이 없는 얘기인데도 어느새 그의 말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왠지 너무 신경이 쓰이고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레히스는 그런 내 반응을 이미 예상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