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88)화 (88/90)

#88화.

루시아는 그간 겪은 일들과 그녀가 슈타디온에 있게 된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들려주었다.

“요새 공작 가의 상황은 어떠니?”

“어떤 상황이요? 돈은 엄청, 엄청 많은 것 같고 다들 잘해 주시고…….”

“아니. 공작님과 황태자 전하의 약혼에 대해서 말이야.”

“아.”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가 있구나!

‘역시.’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역시 그녀가 틀린 게 아니었다. 이 결혼에는 아가사의 고집과…….

“그게 사실은… 공작님이 너무 안쓰러운 거 있죠.”

루시아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이 안쓰럽다고?”

뜻밖의 말에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시아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네, 알고 보니까… 이 약혼에 숨은 비밀이 있었어요.”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께서 바라시지 않았었는데 상황에 떠밀려서 결혼을 결정하신 것 같더라구요.”

이 또한 코델리아가 생각한 말이 아니었다.

“아가사 공작님은 자유로운 게 어울리는 분이신데……. 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공작님께 실례니까.”

루시아가 귀엽게 혀를 빼물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작 부인?”

“어, 어… 나는 잘 지냈다, 루시아.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

“네. 공작님이 잘해 주시니까요. 공작님의 배려로 다음 주부터 신전에 출퇴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아. 저 각인했어요!”

루시아가 제 뒷목을 내보였다. 선명한 각인의 문장이 피부 위에 새겨져 있었다.

“젬이라고 엄청 귀여운 신수가 있는데……!”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이를 악물었다.

역시.

루시아는 신에 가장 가까운 자다. 루시아가 반드시 황태자의 반려가 되어야 했다.

그들에게 내려진 예언대로!

* * *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루시아를 통해서 내게 서류를 두고 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였다.

루시아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코델리아 백작 부인을 완전히 믿게 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사업 계획서가 정말 마음에 쏙 들었을뿐.

“으, 이걸 어떡하냐.”

게다가 이것뿐만 아니라 엠마도 고민이었다. 엠마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 주지?

아오.

쿵.

머리를 박았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너,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차라리 태어나는 순간부터 빙의했다면 나았을 뻔했다.

그럼 완전 초기화된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잖아.

바바바바박.

“뭐야.”

바바바바박.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메리가 책상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둥글고 통통한 배를 쭉 내밀고.

“올려 달라고?”

메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고민하는 꼴을 못 보지.

메리를 책상 위에 올려 주자 킁킁대면서 검사를 하더니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준 서류 위에 앉았다.

낯설어서 그런가.

그렇게 고개를 몇 번 갸웃하고 그 위를 돌아다니는가 싶더니.

파바바바박!

“안 돼!!”

백작 부인이 준 서류를 찢으려던 메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메리! 종이가 다 찢어지잖아. 이러면 안 돼.”

너 신수라며!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잖아! 어디서 발뺌이야.

“니 정체 다 뽀록났어! 솔직히 말해, 메리.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도 너지?”

메리가 못 알아듣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아가사’는 어디 갔어. 응?”

메리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듣는 거야, 못 알아듣는 거야.”

메리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오뚜기처럼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너는 언제 신수화하냐. 나도 속 시원히 대화 나누고 싶다, 진짜.”

메리가 혀를 내밀고 환히 웃었다.

으아, 나도 그냥 개로 태어날 걸 그랬나 봐.

* * *

톡톡톡.

“으, 뭐야.”

어제 고민이 많아서 새벽 늦게 잠든 덕분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엠마가 일을 쉬니 나를 깨우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이상한 소리에…….

“레이?”

레이가 창문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근엄하고 진지한 자세로. 그 옆에는 젬과 젤리가 함께했다.

얼른 뛰어가서 발코니를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아침부터?”

“아침? 공작님의 아침은 오후 1시부터 시작이오?”

레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냐는 듯이.

“……지금이 오후 1시야?”

“정확히는 오후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오.”

“으응… 내가 늦잠을 자 버렸네. 큼!”

“그럴 수 있지. 어제 공작님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오.”

젬과 젤리도 뽈뽈뽈 날아 들어와서 저들이 편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배를 드러내고 하루 종일 자고 있던 메리도 고개를 바짝 들었다.

“잘 쉬었다면 잘된 일이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소.”

그러고 보니… 나도 레이에게 용건이 있었다. 젬과 젤리보다는 밤비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레이 같아 보였다.

“별말씀을.”

“나는 공작님 덕분에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소. 푸우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오.”

“그렇다면 나도 다행이고.”

“밤비도 공작님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었소.”

“밤비도 행복하다면 그 또한 다행이고…….”

이건 진심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절대로 허망하지 않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이곳이 나만의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신수 모두를 위한 파라다이스라는 증거.

“……공작님은 착한 사람이구려.”

“내가?”

글쎄. 그건 모르지.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엠마를 그렇게 속상하게 하지 않았을 거고…….

이 자리를 뻔뻔하게 차지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맞아, 공작님은 착해. 착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공작님을 괴롭히면 나쁜 사람!”

두 손을 위로 흔드는 젬의 뺨을 꼬집 했다. 너무 귀여워.

“나무는 잘 심었어?”

“아야! 공작님 나빴어!!”

젬이 금세 태세 전환했다. 이 우디르보다 빠른 녀석.

“나무는 잘 심었어! 나무는 더 크게 자랐어! 그런데 공작님이 내 볼을 이르케, 이르케. 나빴어!”

억울해 보이는 젬의 뺨을 문질문질 해 주었다. 볼을 부풀리고는 홱 하고 돌아앉았다.

젤리가 젬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또 삐졌냥?”

“아니야! 젬이는 화가 난 거야.”

“그게 뭐가 다르냥?”

“화난 건……. 화난 건 화난 거고… 삐진 건 삐진 거야!”

저 귀여운 꼬꼬마들 같으니.

으, 잠시 대화가 딴 길로 샜네. 요 녀석들과 있으면 정신이 없었다.

“아, 레이. 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말이오?”

“밤비에게 그 소녀에 대해서 물어봐 줄 수 있어? 거기서 본 적 있는지, 인상착의를 아는지, 혹은 어떤 사람인지.”

“오! 그러는 수가 있었구려. 할 수 있소!”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쓰다듬는 그 모습도 퍽 귀여웠다. 애늙은이 말투를 쓰는 배추 인형 같다고 할까.

레이의 머리를 나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레이가 나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공작님은 신기한 사람이구려.”

“내가?”

“그렇소. 뭔가…….”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소. 공작님하고 있으면 편안하고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소.”

“나야말로 신기하네. 그런 건 모르겠는데. 자, 일단 밤비한테 가 볼까?”

레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일단 종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엠마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나…….

“신수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 좀 준비해 주고 나갈 준비를 도와줘.”

“네, 공작님.”

“큼. 엠마는 좀 어때?”

“아…….”

하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녀가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방에서 안 나와서.”

“……알았어.”

지금은 엠마를 혼자 두는 게 맞는 거겠지?

사실 엠마를 볼 면목도 없었다. 엠마는 내가 황태자와의 일을 숨겼다고 화를 냈다.

그런데 내가 숨기고 있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 * *

엠마가 몸을 웅크렸다.

어제는 속상해서 눈물만 나더니 오늘은 민망했다. 그래서 아가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가사에게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됐는데…….

아무리 아가사가 엠마를 아껴 주고 사정을 봐준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하녀고 아가사는 공작이었다.

“으, 괜히 눈이 돌아가서는.”

엠마가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사실 엠마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아가사의 사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그녀도 안다.

아가사의 세계는 엠마의 세계보다 너무 넓고 위험했다. 이브라임의 말대로 아가사의 주변은 정글처럼 아가사를 노리는 이들 투성이였다.

아가사가 황태자를 선택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아휴, 이 다혈질! 이걸 어떡하냐…….”

엠마가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엠마, 안에 있니?”

그런 엠마를 베리타 부인이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