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87)화 (87/90)

#87화.

내 것이 아닌 애정을 가로채고 나는 너무 속 편히 살았다.

왜 엠마의 무한한 사랑을 잊고 있었을까. 내가 행복하면 웃고, 내가 슬프면 함께 울었던 나의 하녀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실신할 것처럼 울다가 소란을 듣고 쫓아온 하녀장에게 붙들려 나간 엠마 생각에 마음이 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아가사. 이 멍청아. 너는 너를 사랑하는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대체 왜…….’

아가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아가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엉망이 된 집무실을 하녀들이 정돈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았다.

“코코아를 좀 드시겠어요?”

정돈이 끝나고 베리타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고마워.”

잔은 베리타 부인의 배려만큼이나 따뜻했다. 베리타 부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셨어요, 공작님.”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고생?

“고생은 내가 아니라 엠마가 했지…….”

베리타 부인이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베리타 부인은 내 마음을 위로하듯 곁을 지켰다.

한참 동안이나.

* * *

코델리아가 가슴 위를 꾹 짚었다. 그간 코델리아는 슈타디온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었다.

맨 처음엔 아가사를 놓고 그녀를 아이콘으로 해서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언제나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장 조사를 하면서 사업을 구상하던 중에 나엘의 약혼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아가사와 약혼을 한다나.’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코델리아는 그 길로 나엘을 찾아가려 했지만 접견을 거부당했다.

나엘이 바쁘다는 것 같기는 했지만…….

코델리아는 나엘이 그녀를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엘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에 기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루시아가 성녀로 각성했다는 소식 말이다.

‘황태자 전하……!’

이 소식을 나엘은 들었을까. 그리고 코델리아가 했었던 말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나엘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깨달았다.

나엘은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당부를 잊은 것이다. 아니면, 다른 색다른 감정에 푹 빠져서 잊고 싶거나!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슈타디온 공작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비드를 찾아갔고, 슈타디온에 갈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두 손을 맞잡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리고 되돌릴 건 되돌려야 해.”

무슨 일인지 루시아도 슈타디온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슈타디온이 요새 화제의 중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공작이 보살피던 신수들이 각성했다지?

그래도 코델리아는 과거의 아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악독하게 나엘에게 집착했었는지. 나엘이 그런 아가사에게 등이 떠밀려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나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가사의 농간일지도.

[옳지, 잘한다. 그렇게 찢어 놓는 거야.]

음습한 목소리가 코델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나를 거스르려는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

먼 곳의 손이 무형의 실을 당겼다. 팽팽하게.

* * *

폭풍 같던 아침이 지나가고 오후가 왔다. 엠마가 엉망으로 휘저어놓은 집무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고요한 느낌이었다.

엠마는 한동안 일을 쉬겠다는 말을 베리타 부인을 통해서 전해 왔다.

하.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그런 와중에 손님마저 찾아왔다. 심지어 내가 잡은 약속이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찾을 때는 안 나오시더니 이렇게…….

“부인이 전한 사업 계획서는 잘 살펴보았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루시아가 닮은 것도 같았다.

직접 본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소설 속에 나온 것보다 이지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할 이야기가…….”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내 말을 잘랐다.

그제야 붕어 같은 눈을 들어 백작 부인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똬리를 튼 감정이 절대로 호의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부인?”

“황태자 전하와 약혼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만.”

“그 약혼을 꼭 하셔야겠습니까? 기어이 이렇게 끌고 오시니 속이 편하십니까?”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게 무슨…….”

“황태자 전하를 그렇게 괴롭히신 것만으로도 모자라셨습니까? 과거 공작님 덕분에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곤란해하셨는지 아십니까?”

아.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나를 경계하는 게 아니다.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내 발목을 붙들었다.

이걸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멍청했었던 거지. 디에고 같은 나엘의 사람들이 나를 반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아가사는 나엘에게 집착하고 쫓아다니고 못살게 굴었다.

엠마가 나엘을 미워하듯, 나를 미워하는 나엘의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였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어.

“사과는 제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 하셨어야지요.”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과를 하시려면 이 약혼에서 물러나셔야 하구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코델리아가 말했다.

“이 약혼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나와 나엘의 약속이기도 하고 사이에 걸려 있는 것들이 있지.”

“결국 이 약혼을 하시려는 거군요.”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변명하시면서 붙들고 싶으신 건 아니시고요?”

“뭐?”

“언제는 멋대로 하신 적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제가 그렇게 막아서도 황태자 전하의 침실에 뛰어들었던 건 공작님이 아니셨나 봐요?”

코델리아가 잔뜩 비꼬았다.

“저는 공작님이 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업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잠깐만, 코델리아 백작 부인. 미안한 말인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약혼을 제안한 건 내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였어.”

“……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인 것뿐이야. 과거의 일은 부정하지 않겠네. 자네의 말도 이해는 가.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고 지금의 나는…….”

황태자를 싫어해.

이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그런데 입이 꽉 틀어막힌 것처럼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엘에게 내뱉은 말은 상처가 되어 그를 쑤셨다.

나엘은 그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싫어?’

그렇게 묻던 나엘을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 건가.

“공작님은요?”

“……이런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하고 나누어야 할 것 같은데.”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사업 말인데. 그런 마음이라면 나도 같이 안 하는 게 맞겠지.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 주게.”

“…….”

“그리고 내가 하려던 말은 루시아가 자네를 많이 찾았다는 거였어.”

지친다.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미움을 받는다는 건 꽤 피곤한 일이었다.

“루시아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네. 만나 보겠나?”

코델리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사실을 배신당한 자의 얼굴이었다.

이해가 가는 동시에 짜증이 났다.

“……예, 공작님.”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더 이상 내게 따지고 들지는 않았으니까.

자꾸만 운명이 부추기는 기분이었다.

나엘의 편지를, 그리고 내 마음을 외면하지 말고 답을 내리라고 말이다.

* * *

코델리아는 곧장 루시아에게로 안내되었다. 코델리아는 아가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는 있겠지.

“루시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루시아였다. 루시아가 코델리아를 보고는 표정이 환해졌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루시아가 지내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예쁘게 살이 오른 루시아의 두 뺨도.

루시아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잘 지냈니?”

코델리아가 확인차 물었다.

“네! 공작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루시아가 해맑게 웃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코델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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