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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85)화 (85/90)

#85화.

“오늘 내가 공작님을 찾아온 것은 부탁할 게 있어서라오.”

여기는 서양 판타지 세계고, 레이의 외양은 젬이나 젤리하고 다를 게 없었다.

저 말투하고 간극이 대단한데.

“부탁?”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소.”

“무엇이든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라.”

“……사람을 하나 찾아 주시오.”

레이가 흐려진 얼굴로 말했다.

“아직 어린 소녀라오. 나를 그곳에서 도망치게 해 준 소녀지.”

“그곳?”

레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을 쳤다니. 레이도 어딘가에 잡혀 있었던 걸까?

그렇게 잡혀 있던 애들을 구해 낸 게 여러 번이다 보니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 봐. 단서가 많아야 찾기가 쉬워.”

“동료들이 몇몇 더 있었다고 들었소. 하지만, 다른 곳에 갇혀 있었던지라 그 동료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오.”

“뭐 하던 곳이었는데?”

“……신수들이 피를 뽑히고 있었소.”

어……? 이거 아는 이야긴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피를 내다 파는 것 같았소. 나는 거기에 마지막에 붙들렸었는데… 피를 뽑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도망쳤소.”

레이가 회한에 찬 눈빛을 허공에 던졌다.

“나는 그곳에서 내 동료들을 구해 내지 못했소. 부끄럽게도 내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오.”

“거기에 사람은 누가 있었는데?”

“휠체어를 탄 남자 하나와 덩치가 큰 남자, 그리고 한 소녀가 있었소.”

골든벨이 울렸다.

“나는 그 소녀를 찾고 싶소.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갇혀 있던 동료들을 구하고 싶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레이가 나를 향해 간절하게 말했다.

“내 동료들이 죽어 가고 있을 걸 생각하면 내가 가슴이 아파서……. 죄책감에 물도 넘어가지 않는다오. 내가 그렇게 도망쳐서는 안 됐던 거였소.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레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작은 어깨에 얹힌 죄책감이 레이를 거대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레이.”

“걱정을 안 할 수가…….”

“그 애들을 지금 당장 만나게 해 줄 테니까.”

“정말이오?”

“그 소녀는 찾아봐야겠지만, 동료들은 여기에 있어.”

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를 품에 안고 내가 매일 아침마다 걷는 길을 걸었다. 밤비와 푸우를 비롯해 다친 신수들이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

아직 아가인 푸우는 대자로 뻗은 채 밤비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밤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코를 킁킁거리며 내 손바닥의 냄새를 맡았다.

“밤비. 이 친구가 너를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

밤비가 투명한 눈을 깜빡였다.

“레이. 여기에 있는 두 친구가 네가 찾던 동료들이야. 이쪽은 밤비, 그리고 저기는 푸우.”

밤비가 레이의 냄새를 맡았다. 푸우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이가 포르르 날아서 밤비의 콧잔등에 손을 얹었다.

“혹시 나를 기억하시오?”

약간 격앙된 목소리였다.

“나는 나와 함께 마지막에 붙잡혔던 신수가 있던 걸 기억하오! 그게 그대였을 수도…….”

레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밤비가 레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니. 그대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오. 이 비겁자를 걱정하면 어떡하냔 말이오.”

레이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참, 가혹한 것들이 그 어깨에 얹혀져 있었다. 정말 가엽게도.

심지어 그건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서 강제로 짊어진 짐이었다. 죄인들은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죄는 여전히 짙은 낙인처럼 남아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괴로워하는 것이다.

제발 이 세상에 죄 없이 고통받는 이들이 없어졌으면.

* * *

오늘은 오랜만에 야회가 개최된 날이었다. 주최자는 랜돌프 후작 부인이었다.

주말의 지루함에 늘어져 있었던 귀족들이 몸을 일으켜 총집합했다.

본디 랜돌프 후작 부인은 고매한 성품으로 사교계에서도 인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랜돌프 후작 부인의 야회를 외면한 유명 인사는 딱 셋뿐이었다.

아가사, 이브라임, 루시아.

셋 다 황족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대단한 유명세를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아쉽네요. 이곳이라면 슈타디온 공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아니래요. 휴, 대체 어딜 가면 볼 수 있대요? 그렇게 가진 게 많으면 뭘 해. 전시할 줄을 모르는데.”

“그래도 다음 주 본인 약혼식에는 모습을 드러내겠죠.”

“그거야 그렇겠지만…….”

귀부인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이 이번 모임에는 루시아가 참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랜돌프 후작 가는 여전히 능력을 잃은 신수를 봉양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버림받은 신수들을 데려다가 키우고 있는 아가사 공작이라면 당연하게 관심을 보일 만하다고 판단들 한 것이다.

하지만, 랜돌프의 연회에도 아가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초대장은 보냈다.

하지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프란체스카 랜돌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은 가득했다.

공작 가에 어떤 명분이 있어야 찾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런 명분조차 하나도 없었다.

프란체스카가 아쉬운 얼굴로 제 무릎에 앉은 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로니. 아무래도 오늘도 만나 뵙기 힘들 것 같구나.”

로니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프란체스카가 아가사를 만나고자 하는 건 로니 때문이었다. 현재 사교계 사람들은 신수들이 슈타디온에 있으면 능력을 되찾는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로니도 신수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아가사를 만나서 의논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연락을 했는데 한 번도 답을 받은 적이 없다.

프란체스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아가사를 만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프란체스카의 야회에는 다양한 목적으로 아가사를 노리는 이들이 더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역시 롤라 야니스였다. 야니스 자작가의 차녀, 롤라.

롤라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움켜쥐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아가사에게 쏠려 있었다. 일전에는 아가사를 악녀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던 이들도 그녀를 욕하길 꺼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역시, 사교계의 남자들이었다. 영식들은 아가사의 옆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아가사에게 청혼서를 보냈었던 이들 중에는 롤라의 약혼자도 있었다.

롤라가 모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롤라는 아가사가 그런 유명세를 얻은 건 신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또리를 데려가서 돈을 번 거지. 하, 내 신수를…….’

롤라가 이를 아득 갈았다. 그날, 롤라는 신수를 도둑맞았다. 그래도 반쪽짜리여도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날을 떠올려 보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와서 또리를 빼앗아 간 건지.

“재수 없어.”

롤라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도 어쩌면 이걸 이용해서 후작 부인과 인연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롤라가 프란체스카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후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그래요. 롤라 야니스 영애. 그간 잘 지냈나요?”

“예, 저야. 후작 부인은 잘 지내셨습니까?”

프란체스카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염려해 줘서 고마워요.”

롤라가 프란체스카 품에 안긴 신수를 힐끗 보았다. 볼 때마다 혐오감이 치민다.

저런 걸 끼고 다니는 프란체스카가 사실 이해가 가질 않는다.

‘차라리 우리 또리가 훨씬 낫지.’

하지만, 이런 속내도 감출 때다. 롤라가 처연한 척 프란체스카의 건너편에 앉았다.

“저, 후작 부인. 사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롤라 영애. 말해 봐요.”

“사실 야니스에도 신수가 있었던 걸 아시나요?”

“아.”

그랬던가요?

프란체스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수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때는 지나갔으니 어느 집에 어느 신수가 있는지도 잊혀진 것이다.

그게 10년이라는 시간이 가진 힘이었다. 롤라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 작은 강아지 신수였지요. 제겐 너무 좋은 친구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슈타디온에 있습니다. 공작님께 빼앗겼지요.”

롤라가 입술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을 말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프란체스카는 제 신수, 로니를 생각했다. 어쩌면 이걸로 슈타디온에 접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절대로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평화롭게!

프란체스카가 로니를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혀를 낼름거리는 로니는 뱀 신수였다. 작고 새까만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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