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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84)화 (84/90)

#84화.

“젬이는 식물을 다룰 수 있어. 젬이는 힘이 엄청 세!”

젬이가 알통을 내보였다. 말랑말랑하고 가는 이쑤시개 같은 팔이었다.

아니, 잠깐만.

식물을 다룰 수 있다고?

맞다!

이 세계의 신수들은 각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젬이의 능력은 식물을 다루는 것. 그 식물의 종류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 땅에 존재하는 식물이면 된다.

한 번에 크게 자라게 할 수도 있고, 없던 씨앗도 피어나게 할 수 있었다.

“젬이만 믿어!”

젬이 파다다닥 하늘로 날아올랐다. 젬이 두 팔을 펼쳤다. 화아아악.

빛의 구체처럼 변한 젬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요술 공주가 변신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 순간.

우직끈.

무언가가 부러지는 큰 소리가 울렸다.

“무, 무슨…….”

대지도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모두가 놀라던 그 때.

정원에 얌전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몸을 일으켰다. 성인 남자 셋이서 끌어안아야 둘레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

그런데 그 나무가 말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겉으로 드러난 뿌리를 움직여 나무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꺄, 꺄아아아…….”

근처에 있던 하녀가 놀랐는지 비명을 지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근데 나 이해해.

나도 놀라 자빠질 뻔…….

“제, 젬… 이게 뭐야?”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젬이 손을 쭉 뻗었다.

“미미 1호!”

“미미 1호……?”

젬이 나무에 턱 하고 올라탔다.

“미미 1호! 가쟈앗!”

젬이가 힘차게 외쳤고. 미미 1호라고 불린 거대한 정원수가 삐그덕거리며 움직였다.

우직끈, 우직끈.

정원수가 말 그대로 레이를… 안아 올렸다. 공주님처럼 소중하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여기가 중세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관인 건 알고 있었다. 근데 저, 저건…….

“오…….”

다행히 나만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개중엔 주저앉아 버리는 이도 있었다.

“와, 미쳤다.”

누군가의 탄성이 울렸다.

“자, 미미 1호! 출발!”

나무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모두가 넋 놓고 응시했다.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아니, 조지나.

믿기지 않는데 현실인 거 같아.

* * *

새로운 친구가 왔다.

그 소식이 순식간에 슈타디온 전체에 퍼졌는지 신수들이 하나둘씩 레이의 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젬!”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것은 젤리와 밤비, 그리고 푸우였다. 젤리는 이제 사족 보행을 시작한 푸우에게 올라타 있었다.

당당한 슈퍼 베이비 푸우가 아장아장 걸었다.

“아기 괴롭히는 거 아니야! 나빴어!”

“괴롭히는 거 아니야냥. 푸우가 태워 준댔다냥!”

젤리와 젬이 투닥거렸다.

두 신수의 소란에 레이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쉿!”

젤리가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댔다. 레이가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레이.”

레이가 눈물을 흘렸다.

“아픈가 보다냥.”

“젤리가 소리 질러서 그러잖아, 나빴어!”

“젬이가 시끄러워서 그런 거다냥!”

시끄럽게 구는 두 신수를 원숭이 신수 크리스틴이 끌어안았다.

“웁, 웁, 웁!”

“꾸웁!”

“우끼끼끼!”

젬과 젤리가 그제야 조용해졌다. 신수들이 조용히 레이의 곁을 지켰다.

레이가 옅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레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다리가 잘릴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었다.

레이는 누군가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덫에 걸려서 앞으로 꼬꾸라졌을 때, 레이는 그대로 잡혔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뒤에 자신을 도와주는 착한 인간을 만나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이의 옆에는 여러 신수가 있었다. 아주 평온한 얼굴로.

신의 품으로 돌아왔다.

레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며 이제는 편안해진 숨을 내뱉자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레이가 그 고통 속에서도 숨을 놓아 버릴 수가 없던 이유. 레이는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레이! 도망쳐. 절대로 잡히면 안 돼. 멀리, 멀리 도망치는 거야!’

그 애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만나려면 건강부터 회복해야 했다. 지금은 조금 쉬어야겠단 생각에 레이가 느리게 잠에 빠져들었다.

레이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였다. 슈타디온의 세 번째 신수화였다.

* * *

레이의 긴급 치료가 끝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조지나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주 앉아 놓고도 한동안 조지나는 무언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멍한 모습이었다.

“큼.”

“아.”

“어, 조지나?”

“네, 공작님.”

“일단 오느라고 수고했어. 먼 길이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공작님. 오히려 늦어서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냐. 그건 정말로 괜찮아. 그런데 레이는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야?”

“덫에 걸린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다리도 많이 다쳤지만 덫에 걸리면서 앞으로 넘어졌는지 머리에도 부상이 있었어요. 사실 살아 있는 게 다행인 상태였습니다.”

“……흠.”

조지나도 레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듯했다.

배에서 내려서 슈타디온으로 넘어오던 숲길에서 발견했다고 했으니까.

어쩌다가 사냥꾼들이 놓은 덫에 걸린 것 같다고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었다.

“수고했어, 조지나.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숙소는 여기 있는 엠마가 안내해 줄 거야.”

“네, 공작님. 그러면 편히 쉬세요.”

“그래, 여독을 풀고 다시 만나자고.”

조지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제 방으로 갔다. 오늘 하루가 정말 길었던 느낌이다.

다비드가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서 레이, 조지나… 코델리아.

폭풍에 휩싸인 것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니 벌써 잘 시간이었다. 어두컴컴해진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안에 나엘이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엘이 보낸 편지…….

테이블을 성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찍이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늦었잖아. 내일 열어 보지, 뭐.

애써 테이블을 외면하고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엘이 무슨 편지를 썼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나는 내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엘이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후우…….”

이브라임과 나엘까지. 거기에 다비드.

빙의 전엔 누군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물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잘생긴 남자가 나로 인해 울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K-드라마 같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위치에 서고 나니 가시방석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아가사,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솔직한 마음으론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될 때까지 피하고 싶었다. 최대한.

피곤한데도 정신은 너무 또렷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잠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짹짹짹.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큼.

* * *

가장 먼저 변한 레이를 발견한 것은 루시아였다. 젬이와 함께 뿌리가 뽑혀 버린 나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잘 자라고 토닥여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레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 음……. 레이?”

“안녕하시오.”

체형도 그렇고 새하얀 것도 그렇고 젬이와 비슷한데,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말의 귀를 가진 신수가 루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레이라고 하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루시아라고 해……?”

루시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분명 생긴 건 젬이나 젤리처럼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영혼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할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루시아… 그렇구려. 어제 나를 치료해 준 게 그대였소?”

“으응, 그랬었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소. 그대 덕분에 내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 같소.”

루시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루시아는 젬과 젤리 같은 신수만 봐 왔다. 저렇게 점잖고 정중한 신수는 처음이었다.

‘공작님… 저 너무 적응 안 돼요.’

루시아가 삐걱거렸다. 기름칠 안 한 기계처럼.

* * *

분명 이 소설의 설정은 ‘신수들이 능력을 잃은 세계’였던 것 같은데.

벌써 신수화에 성공한 세 번째 신수가 등장했다.

레이. 어제 고통에 신음하던 레이가 신수화에 성공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레이라고 하오.”

그리고 레이는 세상 확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청학동 선비님이냐. 양반이 따로 없네.

“어제는 고마웠소. 그대가 여기 주인이라고 하던데. 뭐라고 부르면 되오?”

머리를 풀어 헤친 게 신선 같기도 하고. 혹시 조선시대에서 오셨는지…….

“하하하, 나는 아가사라고 해. 편하게 공작님이라고 불러.”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구… 요.

왠지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은 포스였다.

“허허허허. 알겠소. 공작님.”

“아픈 데는 괜찮아?”

“다행히 참을 만하오. 하지만, 아직 두 다리로 걷는 건 무리인 것 같소.”

레이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리고 나는 레이를 비유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을 찾아냈다.

훈장님이네, 훈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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